< 회색 송곳니 부족 -3- [2권 끝] >
[흥!]
노인은 코웃음을 치고는 수한을 노려보았다.
[회색 송곳니 부족은 결코 협박에 굴복하지 않는다. 힘으로 핍박한다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네놈들은 일신의 무력을 믿는 것 같다만 우리에게도 우리의 싸움 방식이 있다. 초원이 네놈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분위기가 격해졌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태수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원정대를 제압한 것으로 보아, 여러분에게 모종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 능력이 위협적인 것도 알겠고요. 그러나 위협적인 것으로 따지면 저희도 뒤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겪어보셨겠지만, 여기 있는 수한씨는 원거리 전투의 대가입니다. 그리고 저는 AA급 이능력자이지요. 저희들이 마음
먹고 나서면, 여러분의 피해도 상당할 겁니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보아하니 이곳 근처에는 변이체도 많은데, 그렇게 피해를 많이 입으면 과연 마을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음!]
노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태수가 아픈 곳을 찔렀기 때문이다.
생존은 회색 송곳니 부족의 제일 과제였다. 그 무엇도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태수는 노인의 기색을 살피다 말을 이었다.
[결국 칼로 시시비비를 가리게 되더라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뭐요?]
[저희 원정대를 공격한 이유가 뭡니까? 저희는 그저 변이체를 사냥하러 왔고, 저희가 고위 변이체를 잡아가면 여러분도 덜 위험해지니 좋은 일일 텐데요.]
[하, 그걸 몰라서 묻나?]
노인이 벌컥 화를 냈다.
[너희 지구인들은 감히 우리 부족의 차기 신녀를 범하고 살해했다! 그로 인해 60년에 1번 치르는 피의 제전을 치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뿐이냐? 네놈들은 핏빛 군주를 모독했다. 그 죄는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것이니, 네놈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그 살과 피를 핏빛 군주에게 바쳐, 영혼을 붙잡아 영세토록 고
문할 것이다!]
노인은 두서없이 욕설을 쏘아붙였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느라 단편적인 사실이 몇 개 흘러나왔다.
수한은 그 사실과 상기르에서 수집한 정보를 조합하여 진실에 가깝게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세르엘 종족과 지구인의 사고방식은 다르지만, 얼마 전 벌어졌던 일은 지구인이 보기에도 흉악하기 짝이 없는 범죄였다.
이제 초경을 시작한 여자아이를 욕을 보이고, 죽였다고 한다.
그것도 세르엘 종족이 신성시 하는 신상 앞에서.
여자아이가 반항하자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신상에 오줌을 갈기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더구나 여자아이와 함께 있던 이들까지 죽여 그 머리를 신상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으니……
신녀와 신녀의 호위대가 소지하고 있던 부족의 보물들까지 약탈했다고 했다. 회색 송곳니 부족이 몇 세대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을.
그것만으로도 이성을 잃을 일인데, 여자아이는 하필 차기 신녀였다.
지금 조사단을 찾아온 일행 중 무녀 가리올라의 심장을 먹고, 그녀의 투시 계열 이능을 이어받아야 했다는 뜻.
닥쳐오는 위험을 느끼고, 과거의 일을 읽어내고, 생명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이능은 회색 송곳니 부족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했다. 단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부족의 존립이 위태롭게 된 것이다.
노인이 한동안 욕설을 퍼붓다가 조용해지자, 수한은 자신이 정리한 사실을 재빨리 설명했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그게 정말입니까?”
“이런 개새끼들이……”
“시벌, 그런 것들은 전부 고자로 만들어야 됩니다!”
세르엘 종족은 굉장히 아름다운 종족이고, 발정기에 들어가면 이성을 유혹하는 강렬한 페르몬을 풍겼다.
거기에 보물들까지 보면 욕심이 나긴 할 것이다. 모두 특수한 이능이 걸린 진귀한 물건이니까. 지구에 내다 팔면 막대한 돈을 챙기겠지.
그렇다고 해도 범죄는 범죄.
다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범인들을 성토했다.
태규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하나 있었다. 곧 초경을 시작할 테니 세르엘 종족의 차기 신녀와 비슷한 나이인 셈인데, 차기 신녀에게 일어났던 일이 자기 딸에게 벌어진다고 생각하자 끔찍했던 것이다.
세르엘 종족의 무녀가 이들을 차분히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노인에게 몇 마디를 속삭였다.
노인이 입에서 불을 뿜듯 격하게 소리쳤다.
[우리 부족은 모든 부족원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 혈채를 받아낼 것이다. 절대 타협은 없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 추악한 범죄자는 그냥 놔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가 도대체 누굽니까?]
그 말에, 노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 지구인들이 저지른 짓이다. 발뺌할 속셈이냐?]
[그게 아닙니다. 확실히 하자는 겁니다. 지금 잡힌 자 중에 진범이 있었습니까?]
[없었다. 쥐새끼처럼 도망쳤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범인과 같은 행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저희 원정대를 잡은 거 아닙니까? 같은 행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멋대로 잡아 억류하고, 처형하는 것은 사리에 어긋납니다.]
[피의 대가는 오직 피로만 받아낼 수 있다. 고문하지 않고 지금까지 가만히 놔둔 것을 감사히 여겨라!]
[그것은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만약 무고한 저희 대원들에게 위해를 끼친다면, 저희도 여러분에게 피의 대가를 받아낼 겁니다.]
[으으음!]
노인은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닫았다.
대화가 헛돌고 있다.
조사단은 범인이 누구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회색 송곳니 부족이 보기에는 다 같은 지구인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고 있던 무녀가 앞으로 나섰다.
[그대들의 뜻은 알아들었습니다. 저희도 무고한 자들에게 피의 대가를 받아내고 싶진 않습니다. 억류하고 있는 자들이 정말로 무고하다면, 그들을 방면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녀!]
[족장님. 이게 최선입니다.]
지구인들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얘기는 잘 되고 있었다.
문제는 범인이 누구냐는 것.
수한은 무녀를 보며 질문했다.
[무녀님께서는 투시 계열 이능력자시지요? 그럼 진범을 알아내셨을 겁니다. 누가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어렵지 않지요.]
무녀는 품속에서 길쭉한 두루마리를 하나 꺼냈다.
정밀한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남자 몇 명.
피부는 조금 가무잡잡한데, 코가 오뚝했다. 눈두덩은 깊고, 머리칼은 짙은 검은색이었다.
한국인이 아니다.
백인, 그것도 인도 쪽에 분포한 인도-아리아인이었다.
태수가 이를 갈았다.
“쉬바 공격대, 그 새끼들 때문에 우리 공격대만 개고생을 했네요?”
“개자식들, 아주 박살을 내야 합니다!”
“당장 수호자 연맹에 제소하지요. 어떻게 해서 타이누 행성 원정을 허가 받은 건데,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렇게 초를 친답니까?”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또 한편으로는 분개했다.
알바트로스 소속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한참 성장 중인 알바트로스가 치명타를 맞는 거니까.
수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요 며칠 사이 마음고생 했던 게 그 작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곱게 죽이지는 않는다.’
수한이 찾아가서 죽일 수는 없다. 그랬다간 감옥에 갇혀 죽을 때까지 콩밥만 먹을 테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계획을 착착 수립했다.
그 사이, 태수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경과야 어찌 됐든, 저희 행성의 공격대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점에 대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그 죗값은 진범이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같은 행성 출신이라는 이유로 죽인다면, 당장 속은 시원하시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습니다.]
아울러 알바트로스 공격대와 쉬바 공격대의 차이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쉽게 말해서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
[으음.]
노인은 한 풀 꺾인 기색이었다.
수한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들과 저희는 같은 행성 출신이고 같은 종족이지만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세르엘 종족은 64개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저 멀리 다른 대륙에 있는 푸른 날개 부족이 저지른 일로 회색 송곳니 부족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노인이 생각에 잠겼다.
조사단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기들끼리 얘기를 했다. 그러더니 다시 조사단에게 다가왔다.
그들이 내놓을 대답은 이미 결정된 거나 다른 없었다.
[좋소. 무슨 뜻인지 알겠소. 억류하고 있는 자들을 풀어주도록 하지. 우리가 잘못한 게 있으니, 배상도 하리다.]
[먼저 저희 원정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좋소이다. 따라오시오.]
이야기가 잘 되었다.
SUV를 타고 그들을 따라갔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무장은 충실하게 갖췄다.
마을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오전 일찍 출발했는데, 도착했을 때는 벌써 점심때였다.
SUV만 타고 가면 빨리 도착했을 텐데, 세르엘 종족은 염소를 타고 가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짐승의 송곳니 같은 길쭉한 기둥에, 커다란 가죽을 엮어 만든 천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밥을 짓는지 흰 연기가 곳곳에서 고즈넉이 피어올랐다.
수한을 본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개중에는 짐승 뼈로 만든 칼을 들고 달려드는 자도 있었다. 노인이 뭐라고 소리치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지만, 조사단을 보는 시선에는 적대감이 생생했다.
적의 어린 눈빛이 쏟아졌다.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다들 무시했다. SUV는 마을 입구에 세워놓고,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었다.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앞쪽에서 두 명의 전사가 나타났다.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각자 뼈로 만든 커다란 칼 한 자루씩을 든 전사.
낯이 익었다.
어제 오후에 공격해 왔던 전사들 중 선두에 섰던 이능력자들이었다.
그 중 덩치가 더 큰 자가 수한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어디라고 이방인이 들어오는 것이냐!]
이번에도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뭐라고 호통을 치자, 전사가 고개를 숙이면서도 항변을 했다. 주위에 몰린 주민들도 뭐라고 고함을 질렀다.
분위기가 흉흉했다. 금방이라도 사단이 벌어질 것 같았다.
노인이 다시 크게 소리를 치자 전사들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러나 아직 불씨는 남아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오.]
노인이 손짓을 했다.
마을 중앙에는 커다란 건축물이 하나 있었다.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돌로 쌓아 올려 짜리몽땅한 탑처럼 보였다.
건물 겉에 기하학적인 문양과 핏빛 그림이 가득했다. 수한은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나는데, 노인을 비롯한 세르엘 종족들이 건물을 보며 경의를 표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짧은 복도가 나오고, 거대한 철문이 하나 보였다.
세르엘 종족이 숭배하는 신, 핏빛 군주가 양각되어 있었다.
[그쪽이 아니오.]
조사단이 철문을 향해 다가가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으슥한 곳에 작은 계단이 하나 보였다. 노인은 수한을 거기로 인도했다.
계단 아래는 어두컴컴했다. 그 흔한 횃불 하나 없었다. 유령처럼 흐리멍덩한 푸른 빛 덩이가 허공을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내려갔다.
널찍한 광장이 나왔다.
커다란 돌기둥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돌기둥에 새겨진 문양이 간헐적으로 붉은 빛을 냈다.
광장 구석, 언뜻 철창 같은 게 보였다.
수한은 홀린 듯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툭 튀어나온 바위를 하나 지나자, 철창 안에 서넛씩 갇혀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원 2과와 17과에서 일을 하면서 가끔 마주친 지원부의 동료들, 저번에 미이바 행성에 같이 다녀왔던 전투 2과 사람들.
하지만 수한은 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둘씩 일어나 조사단에 속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 기뻐하며 얼싸안는 것을 그냥 지나쳤다. 그들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수한에게는 딱 한 명만 보였다.
안쪽에 따로 분류되어 있는 철창.
그 안의 여자 네 명.
그녀들이 수한을 보고 일어난다.
거기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썼지만,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여인.
여인이 수한을 보고 환히 웃었다.
수한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철창으로 다가갔다.
손을 내밀자, 서로의 손이 맞닿았다.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체온이 서로의 손을 타고 전해졌다.
그 속에서 이뤄지는 감정의 교류.
충만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