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거 수집 -1- >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사람들이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새미가 수한의 뒤쪽을 한번 보았다. 뒤따라오는 태수와 다른 사람들을 한 번 보더니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도 오셨네?”
“그럼, 당연하지. 자기 몸은 괜찮아?”
“이능 금제 때문에 좀 무기력한 것 빼고는 다 괜찮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수한은 새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새미의 얼굴이 살짝 발그랗게 변했다.
“그런데 오빠,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공격대에서 우리가 붙잡힌 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아, 김정기씨랑 박기태씨, 이창희씨가 지구로 귀환했어. 그 사람들 덕에 상황을 알 수 있었지.”
“그랬구나! 죽은 줄로 알고 있었는데…… 잘 됐다!”
새미가 눈물을 글썽였다.
수한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촌장이 아래로 내려왔다. 한 손에 시꺼먼 열쇠 뭉치를 들고 있었다.
조사단과 약속한 대로, 원정대를 풀어주려는 것이다.
수한은 얼른 물러났다.
촌장이 바깥에서부터 자물쇠를 풀었다. 대원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조금 지나자 새미가 갇힌 철창도 열렸다.
“오빠!”
새미가 수한에게 덥석 안겼다.
오래 씻지 못해 묘한 냄새가 올라오지만, 수한은 그 냄새마저도 향기롭게 느꼈다.
꽉 껴안은 채 뺨을 비볐다.
옆에서 촌장을 비롯한 세르엘 종족이 묘한 눈으로 수한을 쳐다보았다.
자신들을 상대할 때는 그렇게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기던 자였다. 그런데 자기들이 보기엔 예쁘지도 않은 이계인 여성을 껴안고 방긋거리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가 봐도 됩니까?]
촌장이 고개를 저었다.
[가도 사흘 후에 가시오. 이능 금제를 해제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밖으로 나왔다.
태양을 마주한 대원들이 눈이 부신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을 부족민들이 경악과 분노에 찬 표정을 하고 보고 있었다.
“$#^@#%@#$%!”
“#$$%^&$%#!”
거세게 촌장에게 항의하지만, 촌장은 얼굴을 굳히고 있을 뿐 뭐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새미가 주위를 돌아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들 왜 저래?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수한은 잠깐 멈칫했다.
설마 자기들이 왜 붙잡혀 있는 줄 모르는 걸까?
그에 대해 묻자, 새미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지원 1과 과장님이 몇 번 물어보긴 했는데, 대답해주질 않았어.”
“그래?”
“혹시 오빠는 알아? 답답해 죽겠어. 잠자다 잡힌 것도 억울한데, 뭘 물어보려고만 해도 다 무시하기만 하고……”
수한은 아는 대로 털어 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새미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새미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수한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세상에……”
“죽일 놈들이네!”
“그런 새끼들은 몽땅 거시기를 잘라 버려야 됩니다!”
“뭐야, 그럼 그놈들 때문에 우리가 이 개고생을 한 거야?”
사람들이 분개했다.
흥분하여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건물 벽을 주먹으로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수한은 급히 열기를 진화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회색 송곳니 부족은 그렇다고 하지만, 증거 확인은 못 했어요.”
“세르엘 종족은 거짓말 안 하잖아요.”
“그 새끼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사냥 시작하고 2주가 지났는데도 ATV에 실은 전리품이 적어서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개 같은 놈들! 그런다고 약탈을 해?”
지원 1과 과장이 사실에 가까운 추론을 해냈다.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억류되어 있던 사람들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 처형 날짜까지 잡혔었다는 소리를 듣자 아예 폭발해 버렸다.
그쯤 되자 분노해 있던 부족민들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무녀가 나와서 설명을 했다. 수한이 옆에서 들으니, 오전에 수한이 했던 푸른 날개 부족 운운 하는 비유를 그대로 써먹고 있었다.
부족민들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냉정하게 따져 보니 이치에 맞았던 것이다.
큰 칼을 찬 이능력자가 입에서 불을 뿜듯 소리쳤다.
[그럼 이 피 끓는 원한을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무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촌장도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부족민들이 어두운 얼굴로 둘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늘어뜨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지구인들은 압류 당한 물건들을 모두 돌려받았다. ATV와 무기, 전리품까지 온전했다. 손 하나 대지 않은 듯 처음과 동일한 상태였다.
일단 마을을 빠져나왔다. 근처에 야영지를 구축했다.
3일 뒤 돌아가서 이능 금제만 풀면 된다. 그 다음에는 완벽하게 자유의 몸이 될 터였다.
기뻐할 만도 한데, 모두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쉬바 공격대와, 회색 송곳니 부족에게 얽힌 일 때문이었다.
“이제 어쩌죠?”
“지구로 돌아가야지요.”
“그냥 돌아가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화장실 갔다가 뒤 안 닦고 나오는 기분인데……”
“맞아요. 어떻게든 결착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에이, 결착은요. 몸 성히 돌아가는 것으로 감사해야지요. 지금쯤은 다 지구에 갔을 텐데,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수호자 연맹에 제소해 봤자 벌금이나 좀 먹고 말겠죠.”
“하아, 여기 오려고 로비를 엄청나게 했는데……”
다들 맥이 빠진 모습이었다.
일단 따뜻한 밥부터 먹였다.
겨우 전투 식량이 전부였지만, 그 동안 입맛에 안 맞는 음식만 먹던 참이었다. 다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러면서 원정대에게 벌어졌던 일을 들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수면제에 당했던 것 같습니다.”
“수면제요?”
“예. 저희가 사냥한 하급 변이체 시체를 거래하기도 해서, 사실 그들을 믿고 있었거든요. 제가 그때 불침번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졌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녁에 회색 송곳니 부족이 우리 야영지를 처음으로 방문했었는데, 그들이 뭔가를 한 것 같습니다.”
“하긴 이런 곳에서 생존할 정도면 독과 함정에는 도가 텄겠지요. 정면 대결로 변이체들을 잡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수면제로 모두 재우고, 습격을 했다는 얘기.
그러니 손도 못 쓰고 당한 것이다. 마침 정찰을 하러 야영지를 떠나 있던 세 명만 도망칠 수 있었고.
각종 탐지 장치에 걸리지 않은 게 신기한데, 아마도 이능이 개입되어 있을 거라 추측했다.
족장은 영혼 계열 이능력자.
탐지 불가 이능 정도는 쓸 수 있으니까. 원정대에 투시 계열 이능력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마치고, 천막을 설치했다. 꽤 오래 쓰지 않았지만, 여전히 쓸 만 했다.
수한은 작은 천막에 새미를 눕혔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다들 건강한 것 같았다.
하지만 건강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회색 송곳니 부족에게 억류되어 있는 동안, 그들이 제공한 식사를 먹었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이들의 위장관 속에 기생충들이 드글드글 할 것이다.
수한이 따져보니, 3일 후 출발하면 지구에 도착할 때쯤 이상 증후가 보이기 시작할 듯했다. 그때 예방 접종의 효과도 거의 떨어질 테고.
수한은 태수에게 다가갔다.
태수도 급한 일을 처리하고 숨을 돌리고 있었다. 수한을 보더니 옆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휴, 수한씨. 고생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일이 잘 처리됐네요.”
“아직 다 끝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앞으로가 더 문제입니다. 쉬바 공격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골치가 아픕니다.”
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민될 것이다.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전면적으로 압박하자니 힘이 모자라니까.
수한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기엔 우리 공격대가 입은 피해가 너무 큽니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제소해도 솜방망이 처벌이 가해질 거라는 게 문젭니다. 서로 악감정만 쌓이면, 제소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결과만 나올 테니까요.”
“꼭 수호자 연맹에 제소하는 방법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방법도 있어요.”
“다른 방법이요?”
“세라프 재판을 거는 겁니다.”
종족 연합은 무수히 많은 종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 속한 행성만 수만 개가 훌쩍 넘는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문화 차이로 분쟁이 자주 발생했다.
그걸 조정하는 게 차원 분쟁 조정.
그러나 단순 조정만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서로 간에 피맺힌 원한이 켜켜이 쌓여, 피를 봐야 끝낼 수 있을 때가 그러했다.
그럴 때는 세라프 종족이 직접 관여한다. 세라프 종족이 재판장을 맡고, 자신의 이능을 동원해 쾌도난마로 결정을 내려 버린다.
이 과정에서 양 종족의 성문법과 관습법 모두를 무시한다. 오직 단 하나의 율법에 의거하여 판결을 내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연히 판결이 가혹할 때가 많았다. 따라서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세라프 재판을 신청하는 일이 드물었다.
신청 조건도 까다로웠다.
두 종족이 다 신청해야 한다. 어느 한 종족만 일방적으로 신청해 봐야 종족 연합 중재 위원회까지 올라가지도 못 한다.
태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라프 재판이라…… 그거 제가 알기로는 양쪽에서 다 신청해야 된다고 하던데요? 쉬바 공격대가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헛것 아닙니까?”
수한은 차갑게 웃었다.
“세라프 재판의 신청 요건은 같은 행성 출신의 같은 종족이어야 한다는 것,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타이누 행성에서는 회색 송곳니 부족, 지구에서는 알바트로스 공격대가 세라프 재판을 신청하면 조건이 충족됩니다.”
“허어!”
“수호자 연맹에서는 거부할 가능성도 있기는 합니다. 결국 그들을 통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들이댄다면 어떻게 될까요? 과연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힘들겠지요. 다만 일이 좀 커지는 것 같습니다.”
세라프 재판이 존재하는데도 지구에서 잘 이뤄지지 않은 이유가 뭐겠나.
이해 당사자가 저 멀리 외계에 있기 때문이다. 외계인을 비호하느라 같은 행성 안의 공격대에게 원한을 사느니, 그냥 한쪽 눈을 감고 모르는 척 하는 게 낫다.
반면 지금 알바트로스 공격대는 처지가 좀 달랐다.
“사장님, 생각해 보세요. 지구의 법률로 심판해 봐야 회색 송곳니 부족은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기껏해야 징역형인데, 자기들을 놀리는 거냐고 하겠지요. 이 근처 종족들도 공격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구 공격대 원정 금지 조치가 취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 공격대 입장에서는 시간은 시간대로 버
리고, 손해는 손해대로 보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수한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태수는 처음에는 복잡한 얼굴로 수한의 얘기를 들었다. 내용이 깊이를 더해갈수록 몰입하더니, 모든 내용을 들은 다음에는 무릎을 탁 하고 쳤다.
“좋은 생각입니다. 한 번 추진해 봅시다.”
밤을 보내고, 수한은 회색 송곳니 부족 마을로 들어갔다.
주민들이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몇 명은 이를 갈며 허리에 찬 칼에 손을 가져갔지만, 막상 꺼내 휘두르지는 못했다.
수한은 그들에게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족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눈치를 보니 알아듣질 못한 모양.
잠깐 마을 안을 배회하자, 큰 칼을 찬 근육질의 전사가 다가왔다. 다름 아니라 총알을 쳐내기도 했던 이능력자였다.
곱지 않게 수한을 쳐다본다.
[지구인이 여기에는 어쩐 일이냐?]
[귀 부족에게 제의할 게 있습니다.]
[흥! 일 없다. 금제 해제 받고 꺼지기나 해라. 우릴 그냥 놔둬!]
여전히 지구인 전체에게 거부감을 가진 모양이었다.
수한은 전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뭣이라?]
[귀 부족의 신녀를 참혹하게 간살하고, 보물을 훔친 것으로 모자라 신성 모독을 한 자들을 죽이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겁니다.]
전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 눈이 횃불처럼 이글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
[문자 그대로입니다. 저희 공격대 또한 이번 일에 대해 깊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귀 부족이 동의한다면, 진범을 잡아 처벌하고 싶습니다.]
[처벌하고 싶다고?]
전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한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와라!]
전사가 수한을 데려간 곳은 마을에서 가장 큰 천막이었다. 어제까지 원정대가 잡혀 있던 건물 바로 옆에 있었다.
천막 안에 대고 뭐라고 하더니, 그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라.]
안에는 어제 봤던 노인이 혼자 앉아 있었다.
수한을 보더니 퉁명스레 말을 걸었다.
[진범을 잡아주겠다고 했소?]
[저희가 잡아드리는 게 아닙니다. 약간의 도움을 드리는 겁니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노인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수한은 세라프 재판에 대해 설명했다.
촌장 노인은 처음 들어본 것처럼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퍼뜩 놀랐다.
[혹시 날개 군주의 심판을 말하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