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52화 (53/254)

< 증거 수집 -2- >

정보 공유가 힘든 곳에 살아서일까?

세라프 재판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먼저 생각해 내지도 못한 것 같고.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개 군주가 세라프 종족을 뜻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그게 두 종족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날개 군주들께서는 모든 진실을 꿰뚫어보시지. 좋소.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노인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회색 송곳니 부족은 세라프 종족을 신성시하는 모양.

수한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일단 세라프 재판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설명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요구했다.

[저희 행성에서 세라프 재판을 신청하려면 필요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요?]

[증거가 필요합니다.]

[초상화가 있지 않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수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구에서도 투시 계열 이능력자의 진술을 증거로 썼다. 그러나 그 조건이 까다로웠다.

우선 수호자 연맹 소속이어야 했다. 또한 최소 B급 이상의 이능력자만 해당되었다. 더구나 범죄 경력이 있으면 거의 대부분 누락시켰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노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설마 시체를 가져가겠다는 거요?]

[그런 건 아닙니다. 진범들의 체액이 필요합니다.]

[체액이라고?]

[예. 우리 행성에서는 체액이나 머리카락, 손톱으로 그 신원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증거가 나오면, 그걸 이용해 세라프 재판을 신청할 겁니다.]

시체를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체액을 채취하더라도 지구에서 또 쉬바 공격대원들의 DNA를 채취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건 일단 생략.

[체액이라…… 좋소, 소린이도 자길 죽인 자들이 죗값을 치르기를 원할 테니까. 또 필요한 게 있소?]

[무녀님께서는 투시 계열 이능력자시지요? 초상화를 보니, 과거를 직접 읽어낸 것 같았는데요.]

[추측대로요.]

[그렇다면 무녀님께서 보신 범죄 당시의 상황과 범인들에게 피해자가 입은 피해를 정확하게 서술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면 제가 직접 피해자의 시체를 확인하는 것도 좋고요.]

[시체를 보여줄 수는 없소. 그랬다간 부정을 탈 테니까. 대신 무녀에게 부탁하여 진술서를 써주도록 하겠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또?]

노인은 뭐가 그리 많냐는 얼굴을 했다.

[이 근처에 쉬바 공격대에 당한 마을이 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기왕 세라프 재판을 신청하는 김에, 그들이 당한 일도 첨부하는 게 좋을 겁니다.]

[흠, 그렇구려.]

[저희만 가면 문전박대할 게 뻔하니 사람을 붙여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소.]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노인이 박수를 치자 젊은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남자에게 몇 마디를 하자, 남자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잠시 기다렸다.

얼마 후, 사르륵사르륵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

무녀가 푸른색 병을 갖고 들어섰다. 붉고 흰 진득한 액체가 병에 담겨 있었다.

수한은 그것을 주목했다.

무녀가 수한을 보며 말했다.

[이 병에는 생기 보존의 힘이 부여되어 있어요. 당신 행성에서 어떤 방법을 써서 체액으로 신원을 밝혀내는지는 모르지만,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진술서는 여기 있습니다.]

무녀를 따라온 시종이 수한에게 길쭉한 두루마리를 주었다.

수한이 먼저 그 내용을 확인했다.

언뜻 봐도 굉장히 장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흉악한 범죄였다.

단순히 간살한 것이 아니라 온갖 모독을 다 가했다. 마치 대전쟁 전 대한민국에서 미군 병사에 의해 벌어졌던 윤금이 피살 사건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참혹함에 수한은 고개를 휘저었다.

어째서 회색 송곳니 부족이 그렇게 적대적이었는지 이해가 갔다.

알바트로스 원정대원들을 죽이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른 마을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시오. 우리 부족의 대전사 중 한 명을 붙여드리리다.]

노인이 대전사를 불렀다.

누군가 했더니 방금 수한을 안내해줬던 이능력자였다.

거력 계열 이능력자로, 이름은 갈락이라고 했다.

수한을 안내해주라는 말에 처음에는 불만 있는 기색을 보였다. 무녀가 옆에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자 비로소 얼굴을 풀고 수한을 보았다.

[내가 당신을 지금까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소. 소린이의 원혼을 풀어주겠다는 말을 믿겠소. 잘 부탁드리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갈락을 데리고 야영지로 돌아왔다.

지구인들이 모여들었다. 어제의 기억 때문인지 갈락을 자꾸 힐끔거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락은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수한은 태수에게만 무녀가 쓴 두루마리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태수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룩졌다. 종래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쓰레기 같은 종자들이네요.”

“얘기는 잘 되었습니다. 여기 시체에서 채취한 체액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시체에 생기 보존 같은 마법을 쓴 모양입니다. 잘 하면 DNA 검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SUV 한 대를 내줄 테니 증거를 더 수집하세요. 뭔가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태규 주임님과 이능력자 한 분만 지원해 주세요. 저까지 네 명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푸른 병은 태수가 챙겼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얼른 길을 나섰다.

SUV에 타자 갈락이 매우 신기해했다. 괜히 의자를 만져 보는가 하면, 창문에 대고 입김을 호호 불었다. 근육질의 덩치가 그러고 있으니 우스운 노릇이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수한은 갈락에게 물었다.

[쉬바 공격대에게 공격당한 마을이 꽤 많은 것으로 아는데, 몇 군데나 됩니까?]

[잘은 모르지만, 대여섯 군데 정도 될 거요.]

갈락은 품에서 지도를 꺼내더니 점을 몇 군데에 찍었다.

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수한은 머릿속에서 쉬바 공격대의 행동을 재구성해 보았다.

기껏 원정을 왔지만 전리품을 충분히 획득하는데 실패한다. 낙심하고 돌아가려는데, 우발적으로 회색 송곳니 부족의 차기 신녀와 부딪친다. 그녀를 범한 김에 살인멸구를 하고 보물을 빼앗는다. 어차피 범죄를 저지른 마당에 더 거칠 게 없으니, 남하하면서 타이누 행성인들을 약탈한다.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했다.

역시나 화살이 쏟아졌다.

모두 SUV에서 내렸다. 수한이 눈짓을 보내자, 갈락이 혼자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갔다.

“$#%[email protected]#@#$^!”

그들 고유의 언어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문이 열렸다.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갔는데 다들 창과 활을 겨누고 있었다. 뭔가 수상쩍은 짓을 하면 바로 공격하겠다는 태도였다.

촌장과 대면했다.

마치 표범이 직립 보행을 하는 듯한 종족.

다소 거칠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세라프 어가 흘러나왔다.

[우리들의 진술이 필요하다고?]

[그렇습니다.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이 있으면 더 좋고요.]

예를 들어 탄피나 땅에 박힌 총알, 부상자나 시체에 박힌 총알이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수한은 사정 설명을 자세하게 했다.

촌장은 뚱한 표정으로 갈락을 일별하더니 말했다.

[솔직히 우리는 너희 지구인들을 믿을 수 없다.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 건지 어떻게 아느냐? 하지만 회색 송곳니 부족이 이렇게 나서니 어쩔 수 없지. 협력하도록 하겠다.]

촌장의 협조를 얻어 증거를 수집했다.

총알, 탄피, 전투 식량이 담겨 있던 비닐 등등.

힌디어와 영어가 병기된 물건들을 몇 발견했다. 이게 가장 유용하게 쓰일 증거였다.

물어물어 쉬바 공격대에게 공격당한 마을을 모두 돌았다.

정확히 일곱 군데.

짧은 시간 참 난장을 피우기도 했다. 마을을 공격하여 그들의 보물을 약탈한 것이다. 그 중에는 보석도 있고, 이능 물품도 있었다. 하나같이 지구로 가져가면 값비싸게 팔 수 있는 것들이었다.

태규가 한숨을 쉬었다.

“지독하네요.”

“처음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변이체 사냥보다 외계인 약탈이 쉽다 보니,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괜히 종족 연합에서 우리 지구인들이 경원시 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니 욕을 먹는 거지요. 솔직히 욕 먹어도 싸요.”

“저도 동의합니다.”

야영지로 돌아왔다.

SUV의 트렁크에 일곱 마을에서 수집한 증거품을 몽땅 가져왔다. 진술서도 받아서 잘 보관했다. 비록 회색 송곳니 부족에게 받은 것만큼 유려하지는 않지만, 재판에 들어가면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그 사이 약속했던 사흘이 다 지났다.

노인과 무녀가 야영지로 와 금제를 풀어 주었다. 한동안 무기력하던 이능력자들이 기운을 되찾았다. 새미의 얼굴에 혈색이 돌자, 수한도 마음이 넉넉해졌다.

그런데 금제를 풀어준 뒤, 노인이 뜻밖의 말을 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는 심판을 어떻게 신청해야 하는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모르오. 우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겠소?]

타이누 행성은 통신 수단이 낙후되어 이런 종류의 정보나 지식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의외였다.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죽일 것 같이 굴더니, 이제는 도리어 도움을 청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신뢰를 쌓았다는 뜻일까.

태수를 돌아보자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누군가 하나는 남아서 세라프 재판 신청을 조율하는 게 좋았다. 조사단 중 가장 적격자를 뽑자면, 당연히 수한이 첫 순위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고맙소. 그에 따른 보상은 충분히 하겠소.]

노인이 수한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별 생각 없이 상자를 받아든 수한의 눈이 커졌다.

강렬한 파동이 느껴졌다.

이미 익숙해진 파동.

힘의 결정이었다. 거기서 뻗어 나오는 파동이 수한의 감각을 간질이고 있었다.

등급도, 계열도 알 수는 없다. 그래도 영 하급 힘의 결정은 아닌 것 같았다. 최소한 C급 힘의 결정은 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건장한 남자들이 커다란 나무 상자를 몇 개나 들고 나왔다. 각종 귀금속을 박아 넣어,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였다.

남자들은 상자를 원정대의 ATV 위에 실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나온 여자들이 대원들에게 작은 상자를 주었다.

누군가 무심코 상자를 열어보더니 소리쳤다.

“헉, D급 힘의 결정이다!”

“뭐? 진짜?”

“정말이야! 이거 팔면 3억은 너끈히 받을 텐데!”

몇 주 간 억류한데 대한 배상금이라고 이걸 주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회색 송곳니 부족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기뻐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수한도 슬쩍 상자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려 2개.

그 계열은 알 수 없지만, C급으로 보이는 힘의 결정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대박이다!’

수한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시가로 치면 20억 원. 레벨 업 도우미로 따지면 초능 점수 약 60에서 70점 정도.

이걸 다 온전히 흡수할 수 있는지 어떤 지는 모르겠지만, 외계 행성에 원정을 나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거기다 커다란 나무 상자에서는 B급으로 추정되는 힘의 결정 세 개와 화려하게 장식된 뼈 칼, 뼈 활, 뼈 창이 들어 있었다. 변이체 뼈를 가공한 뒤 이능을 부여한, 상당히 강력한 무구였다.

자기들 때문에 겨우 며칠 사냥하고 끝이 났으니 그걸 벌충해주겠다는 것.

이 정도면 이번 원정도 손해는 아니겠다. 아니, 대원들 입장에서 보면 훨씬 이득이었다.

수한을 포함하여, 원정대 전체가 사의를 표했다.

[이런 귀한 것을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않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오.]

수한에 의해 염소 130마리가 죽었는데도,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부담스러웠다. 그들도 바라는 게 있을 테니까.

기필코 이번 세라프 재판을 성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정대가 출발했다.

수한도 촌장과 갈락을 태우고 SUV를 몰았다.

일단 세라프의 전당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래야 중재 위원회에 세라프 재판을 신청할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 레벨 업 도우미를 확인했다.

100레벨.

그리고 속성 부여 초능이 마침내 50레벨을 찍었다.

2차 진화.

수한은 흐뭇하게 초능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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