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53화 (54/254)

< 세라프 재판 -1- >

수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여럿이 있었다.

그 중 상급 속성 부여를 골랐다.

이번 일을 계기로, 본인의 무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새롭게 추가되는 속성은 여덟 가지.

유도, 약화, 실명, 마비, 중독, 광명, 암흑, 붕괴.

지금은 1레벨이라 유도 속성만 쓸 수 있었다. 최대 100레벨까지 성장이 가능한데, 그때가 되어야 모든 속성 사용이 가능해진다.

“이제 갑시다.”

원정대만 아니라, 회색 송곳니 부족도 데려가기로 했다.

촌장 노인과 대전사 갈락, 이렇게 둘.

이들만이 아니라 약탈당한 일곱 마을에서도 증인을 내세웠다. 마을을 모두 들러야 하니, 차원문이 있는 도시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게 생겼다.

며칠에 걸쳐 계속 남하했다.

SUV와 ATV에 타이누 행성인들을 나누어 태웠다. 최대 속도로 달렸다. 며칠 지나자 원정대원들이 하나둘 기침을 하기 시작해서 마음이 급해졌다.

이윽고 차원문이 있는 도시, 그뤼메아에 도착했다.

촌장 노인이 직접 전사단에 면담 요청을 넣었다. 성채 앞을 지키던 전사가 용건을 듣더니 화들짝 놀라며 성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면담 허락은 금방 떨어졌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단장이 직접 일행을 맞이했다.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붉은 꽃잎 전사단도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행성인이라 어떻게든 돕고 싶던 참인데,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두 팔을 걷어붙였다.

태수가 수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희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고생하세요.”

“제가 뭐 할 게 있나요. 일만 넘겨 드린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지구에서 처리할 일이 더 복잡할 것이다. 타이누 행성은 대부분이 도와주려고 하겠지만, 지구는 오히려 방해하려고 들 테니까.

새미가 푸석푸석한 얼굴을 하고 수한을 보았다.

“오빠, 나 먼저 가 있을게. 조심해야 돼.”

“그래. 몸 조리 잘 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원래 이능력자는 신진대사가 더 활발해서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몇 주 간 이능이 금제된 반작용인지, 원정대의 이능력자들이 더 심하게 앓고 있었다.

지구인들이 모두 지구로 돌아갔다.

수한은 그뤼메아에 남아 고소장을 작성했다.

그뤼메아의 붉은 꽃잎 전사단도 고소장을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럼 재판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구두로 접수를 받는단다. 결국 고소장 작성은 수한의 몫이 되었다.

‘고소장을 어떻게 쓰더라?’

몇 년 전에 한 번 써본 적이 있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하긴 수한이 아는 건 대한민국 양식이지 종족 연합 양식도 아니다. 그저 사실을 적시해서 쓰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고소인과 피고인을 명시했다. 고소취지와 범죄사실, 고소이유를 기재한 뒤 증거자료 목록을 기록했다. 진실 서약을 쓰는 것으로 고소장 작성을 끝냈다.

아울러 재판 신청서도 썼다. 이상의 일을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니, 세라프 재판을 통해 해결하고 싶다고 한 것이다.

붉은 꽃잎 전사단의 루드가 고소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밋밋한 거 아닙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이렇게 쓰면 우리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전달이 잘 안 될 것 같습니다.]

수한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 그 얘기입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세라프 종족은 투시 계열 이능으로 당사자들의 마음을 꿰뚫어 볼 테니까요. 고소장은 담백하게 써도 충분합니다.]

[그렇습니까?]

이게온 행성으로 고소장과 신청서, 증거 자료를 이동시켰다.

최고 평의회 산하 중재 위원회가 위치한 곳.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지구에서도 세라프 재판을 신청하면, 답신은 금방 올 것이다.

며칠이 지났다.

슬슬 초조해질 무렵, 세라프의 전당이 빛을 토했다. 빛이 스러진 자리에 금가루를 섞은 먹물로 쓴 편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수한이 가장 먼저 확인해 보았다.

[타이누 행성, 도시 그뤼메아에 위치하는 세라프의 전당으로 보냅니다. 지구 행성의 인간 종족과 타이누 행성의 세르엘 종족의 분쟁 조정을 위한 세라프 재판을 요청 받은 바, 양 행성 시간으로 24시간 내에 재판 일정을 조율하기 위한 사절단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이후 양 행성 시간으로 360시간 이내에 세라

프 재판이 열립니다. 이 전언을 수신한 이상 세라프 재판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모쪼록 귀 행성에 무한한 영광과 풍요가 깃들기를 빕니다.

종족 연합 중재 위원회.]

이것으로 됐다.

하지만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재판이 남아 있었다. 재판에서 승리한 다음에라야 완전히 끝을 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 뒤, 사절단이 그뤼메아를 방문했다.

사절단은 그뤼메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뤼메아에 머물고 있던 촌장 노인과 대전사 갈락, 일곱 마을의 증인을 면담하고 돌아갔다.

며칠 후 또 편지가 도착했다.

지금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 이게온 행성에서 세라프 재판을 열겠다는 것.

그때 보기로 하고 수한은 지구로 돌아갔다.

병원에 들렀다. 전신을 검사한 뒤 예방 접종을 새로 맞았다. 타이누 행성용 예방 접종은 이게온 행성에서 통하지 않을 테니까.

새미는 입원 중이었다.

창백하던 얼굴에 서서히 홍조가 돌았다.

“좀 괜찮아졌어?”

“응. 난 괜찮아.”

“언제쯤 퇴원할 수 있대?”

“글쎄? 한 2주?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아.”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오래 걸리지는 않으니까 다행이다.”

“그러게.”

재판 날짜가 다가왔다.

하루 전 차원문을 넘었다.

알바트로스 공격대에서는 태수와 전투 2과 과장, 지원 1과 과장, 지원 15과 과장이 동행했다. 또 재판 신청에 도움을 준 세라프 연맹 대한민국 지부장이 따라왔다.

중재 위원회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런데 아침에 나오면서 인도인들과 딱 마주쳤다.

잠깐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인도인 중 한 명이 영어로 말을 붙였다.

“같은 지구인을 팔아넘기니 좋더냐? 대가로 뭘 받은 거냐? 외계인들이 엉덩이라도 대주든?”

무녀가 보여준 초상화에 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수한은 코웃음을 쳤다.

“같은 지구인? 엮지 마라, 재수 없으니까. 같은 지구인은 무슨 얼어죽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인도인들이 죽일 듯이 한국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행동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주변의 경비병들이 인도인들에게 경고 섞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한은 고소인 대기실로, 다른 사람들은 증인 대기실로 들어갔다. 인도인들은 피고인 대기실에 들어갈 터였다.

초조한 기색이던 촌장 노인이 수한을 보고 반색했다.

[오셨소!]

[예, 준비는 다 되셨지요?]

[준비라고 할 게 뭐 있겠소. 날개 군주께 진심을 보이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하오.]

[그게 정답입니다.]

법정의 문이 열렸다.

이번 재판에 참석하는 고소인 측은 수한까지 하여 20명, 피고인 측은 40명이었다.

피고인은 당시 쉬바 공격대의 원정대 30명 전원과 해당 공격대의 공격대장, 수호자 연맹 인도 지부장과 부지부장, 정부 관계자까지 포함되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관련 인물들이 모두 소환된 것이다.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가장 앞줄에 수한과 노인, 그리고 무녀가 자리를 잡았다. 수한이 대표로 발언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들 긴장한 모습이었다. 온갖 해괴한 형상의 외계 종족들이 법정에 자리를 잡자, 그들을 한 번 보고는 이마에 난 땀을 훔쳤다. 무녀는 아예 눈을 감고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수한은 어디선가 날카로운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피고인들.

그들이 수한과 증인 대기석의 한국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수한은 그들에게 싸늘한 비웃음을 한 번 날려주었다.

대애앵! 대앵!

누군가 징을 쳤다.

중재 위원회의 위원들이 들어왔다.

하나하나가 SS급 이능력자이면서, 자기 종족에서는 왕이나 대통령에 준하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참 신기하게도 생겼다.

민들레 씨앗처럼 생겨 둥둥 부유하며 들어오는 자, 몸 전체가 투명한 인간처럼 보이는 이, 커다란 거미 형상을 한 존재 등등.

도합 여덟.

그들이 착석한 뒤 기다렸다.

잠시 후, 건물 전체가 적색 빛에 휩싸였다.

세라프 종족이 이동해 오는 것.

수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마치 가슴 위에 돌을 올려놓은 듯했다. 저절로 입이 말라오고,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회색 송곳니 부족이 가장 심했다.

책상에 아예 머리를 처박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기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꼭 염라대왕 앞에 끌려간 죄수를 보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적색 광채가 법정 안을 매섭게 휩쓸었다.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정면의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형체 하나가 보인다.

말로만 듣던 세라프 종족.

가장 약한 개체도 SS급 이능을 보유하고 있다는 그들.

문명의 전달자.

차원의 수호자.

옅은 청색 기운이 감도는 흰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다. 날개가 어찌나 큰지 법정의 끝에서 끝까지 닿을 듯했다.

머리는 찬란한 금발이고, 피부는 우유처럼 새하얬다. 한 손으로는 길쭉한 은색 막대를 쥐었다. 그 막대 양 끝에서 보라색 가루가 대기 중으로 점점이 흩어지고 있었다.

세라프는 의자에 앉은 채 좌중을 굽어보았다.

그 압도적인 시선에 모두 숨을 죽였다.

고운 입술을 열자,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미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헤븐 태생, 모든 세라프의 딸, 보랏빛 장막 마니엘라다.]

법정 안에 있는 이들의 눈이 온통 마니엘라에게 쏠렸다.

다들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한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마니엘라에게 느껴지는 강렬한 힘에 경탄하면서도, 냉정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바로 옆에 앉은 민들레 씨앗 형상 종족이 묘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떨리며 소리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보랏빛 장막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 지구 행성과 타이누 행성의 분쟁을 해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모든 것은 진실의 눈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피고인의 신원을 확인하고, 고소장을 낭독하여 죄목을 밝히고, 변호인들이 진술을 했다.

검사의 역할을 위원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마니엘라는 세상을 초월한 듯한 눈으로 재판 과정을 지켜보았다.

진술을 모두 듣고, 마니엘라가 손을 하나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

법정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고소인 측은 피고인 측이 회색 송곳니 부족의 차기 신녀를 간살하였고, 그들의 신을 모독하였으며, 호위대를 살해한 뒤 보물을 탈취했고, 인근의 일곱 마을을 약탈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이의가 있나?]

피고측 변호인이 급히 항변했다.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실수였습니다. 피고인들은 선의로 그 소녀를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피고인들이 그 소녀가 발정기인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발정기인 줄 알았으면 아예 접근하지 않았을 겁니다. 소녀가 풍긴 페르몬 때문에 심신 미약 상태가 되어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코 피고인들이 의도한 게

아닙니다.]

마니엘라는 피고인들을 한 번 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가 황금색 빛을 진하게 뿜었다.

입가에 뚜렷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럼 그 자리에서 용서를 빌었어야지 호위대를 죽인 것과 보물을 빼앗은 것, 인근 마을을 약탈한 것은 어째서 그런 거냐?]

[피고인들은 범죄를 저지른 것을 뒤늦게 깨닫고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때문에 추가 범죄를 저지른 겁니다. 남하하면서 마주친 마을들이 자기들을 추격할 거라고 과대망상에 빠진 것이지요. 당시 피고인들은 정상적으로 사리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정신적인 상처가 남아, 정신 병

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피고측 변호인이 진단서니 소견서니 하는 것을 제출했다.

마니엘라는 그것을 보더니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눈에서 황금빛을 뿜으며 일갈했다.

[참으로 가증스럽구나.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니엘라님, 저희는……]

[닥쳐라! 너희들의 시커먼 욕망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실수였다고? 심신 미약? 공황 상태? 헛소리 하지 마라! 너희는 추악한 범죄자이며,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서릿발 같은 분노가 쏟아졌다.

변호인이 몇 마디 말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마니엘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판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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