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54화 (55/254)

< 세라프 재판 -2- >

공기가 무거워졌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마니엘라가 좌중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 칼날 같은 시선과 마주한 이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고운 입술이 나풀거리며 죽음보다 잔혹한 형벌을 선고했다.

[이번 일은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일찍이 목도하지 못했던 흉악한 범죄다. 따라서 세르엘 종족의 차기 신녀를 직접적으로 간살하고, 모든 범죄를 주도한 지구인 다섯에게 밀랍인형의 저주를 내린다.]

밀랍 인형의 저주.

전신의 감각은 그대로 살려놓고, 모든 생체 활동을 정지시키는 무시무시한 저주였다. 더구나 죽는 것도 불가능했다. 수십 수백 조각으로 몸을 찢어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세라프 종족이 직접 건 저주이니 최소 수십 년은 지속될 터. 저들은 죽을 때까지 배고픔과 목마름, 온갖 질병으로 인한 통증을 감내해야 한다.

마니엘라가 지팡이를 휘저었다. 지팡이 끝에서 보라색 광선이 뻗어나가더니 지목한 다섯을 직격했다.

그들이 울부짖었다.

그것도 잠시, 곧 울부짖는 표정 그대로 굳어졌다. 사람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든 밀랍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은 오직 눈동자 뿐.

고통과 절망의 빛이 눈동자에 가득 맺혀 있었다.

대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높은 강도의 처벌이 나올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법정에 모인 종족들 모두 압도당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니엘라의 말이 이어졌다.

[최근, 종족 연합에 가입한 종족이 많아지면서 종족 연합 내에서 벌어지는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나머지 인원 중 직접적으로 세르엘 종족과 인근 마을을 공격한 지구인 스물둘에게 석화의 저주를 내린다. 동맹을 공격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들은 돌이 되는 것을 각오하도록 하라!]

원정대의 거의 대부분이었다.

보라색 광선에 맞은 인도인들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머리끝과 손발부터 회색으로 변하더니,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몸 전체가 돌로 변했다.

남은 세 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마니엘라는 이들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 자리에 있었으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셋에게는 시각과 청각 상실의 저주를 내린다.]

[억울합니다! 저희는 원정대를 말리려고 했습니다. 저들이 고집을 부리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세 명이 소리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말리려고 했다고? 말은 좋구나. 대충 말리는 시늉만 했다는 것을 안다. 정말로 말리고자 했으면, 그들의 총 앞에 몸을 던지기라도 했어야지! 그들이 약탈한 것을 나눠 가진 것은 너희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방관한 자들이여, 오감 중 2개만 빼앗는 것을 감사히 여겨라!]

쾌도난마와도 같은 판결이었다.

보랏빛 광선에 맞은 셋이 악을 쓰며 발광하자 경비병들이 그들을 끌어냈다. 밀랍인형이 된 다섯 명과 돌이 된 스물두 명도 바깥으로 끌어내니 비로소 조용해졌다.

마니엘라가 법정을 돌아보았다.

[내 판결에 이의가 있느냐?]

있을 리가 없었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마니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것 같구나. 그럼 여기서 재판을 끝내도록……]

수한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마니엘라가 수한을 응시하자, 법정 내의 시선이 온통 수한에게 쏠렸다.

[이의가 있느냐?]

[예. 아직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무슨 문제냐?]

[먼저 보랏빛 장막께서 내리신 단호한 판결에 승복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은 핏빛 군주에게 안겼을 차기 신녀의 영혼도, 그리고 희생당한 타이누 행성의 다른 영혼들도 보랏빛 장막께 감사하고 있을 겁니다.]

수한은 의식적으로 고소인 측의 타이누 행성인들을 돌아보았다.

마니엘라의 푸른 눈이 그들을 향하자, 타이누 행성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마니엘라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고자 하는 말이 뭐냐?]

[범인들은 충분한 대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고소인들은 그들에게 입은 피해에 대해 배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배상?]

[예. 당장 차기 신녀가 죽은 회색 송곳니 부족은 부족의 생존을 걱정해야 합니다. 일곱 개의 마을도 목책이 무너지고 전사들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에 대한 배상을 받고 싶습니다.]

형사는 결론이 났으니 민사도 처리해 달라는 것.

마니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인의 말이 옳다. 범인들이 속해 있던 지구 행성의 쉬바 공격대가 고소인들이 입은 피해를 그에 상응하는 힘의 결정으로 배상하도록 한다. 중재 위원회가 이 과정을 철저히 감독할 것이며, 제대로 배상하지 않을 시 내가 직접 나서 단죄하겠다.]

여기까진 예상했던 범주.

수한은 다시 손을 들었다.

마니엘라가 또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족하다?]

[예. 회색 송곳니 부족과 일곱 마을에 필요한 것은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지원입니다. 힘의 결정만 달랑 주는 것으로는 도움이 안 됩니다. 언제 그걸 흡수하고 이능력자를 각성시키고, 팔아서 물자를 마련하겠습니까? 차라리 이렇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말해 보아라.]

[대리인을 정해 고소인들을 실질적으로 돕게 하십시오. 무기를 공급하고, 필요하면 파병도 하고, 무너진 목책을 대신할 굳건한 장벽을 세우라고 하는 겁니다. 고소인들이 필요한 정도로 도움을 주고, 그 대리인이 쉬바 공격대에게 비용을 청구하면 됩니다. 그게 훨씬 더 실용적입니다.]

수한의 말뜻을 생각하느라 법정 안이 잠깐 침묵에 잠겼다.

가장 먼저 수한의 의도를 간파한 것은 쉬바 공격대의 사장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리친다.

[말도 안 됩니다! 대리인이라니요? 차라리 저희가 직접 하겠습니다. 몇 년이 걸리든, 비용이 얼마나 들든 고소인들의 피해가 복구될 때까지 전력으로 돕겠습니다.]

수한이 냉소를 지었다.

[거부합니다. 저희는 쉬바 공격대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복구하겠다고 와서 또 무슨 짓을 벌일지 어떻게 압니까?]

주변에 앉아 있던 타이누 행성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청석에서도 수한의 발언에 찬동하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쉬바 공격대 사장이 또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마니엘라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고소인 측의 요구가 합당하다. 대리인으로 내세울 자가 있느냐?]

[증인으로 나선 지구 행성의 알바트로스 공격대를 선택하겠습니다. 이번 사건에 있어 알바트로스 공격대와 회색 송곳니 부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들이라면 고소인 측의 입장을 대변하여, 복구를 돕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울 겁니다.]

[호오?]

마니엘라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수한을 보았다.

눈동자에 황금색 빛이 어렸다.

수한은 굳이 정신을 방어하지 않고 활짝 문을 열었다. 세라프 재판을 신청하기 전, 태수에게 알려줬던 계획을 명확하게 떠올린 것이다.

숨길 필요가 뭐 있나.

오히려 다 까발리는 게 나았다. 마니엘라가 보기에도 나쁜 계획은 아닐 테니까.

[으하하하하!]

마니엘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수한의 계획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었다.

대리인은 고소인들이 필요한 정도로 도움을 주고, 쉬바 공격대에게 비용을 청구한다?

그 필요한 정도라는 건 누가 정할까.

타이누 행성인들과 대리인 마음이다. 둘이서 짝짜꿍을 하면, 쉬바 공격대는 달라면 달라는 대로 뱉어내야 한다.

비용 청구하는 것도 그렇다. 중간에 뭘 어떻게 부풀릴 지 누가 알겠나. 꼼짝없이 등골까지 빼 먹히게 생긴 것이다.

대리인으로 나서는 알바트로스는 엄청난 이익이었다.

굳이 비용을 과다하게 청구해서 쉬바 공격대의 원한을 더 살 필요도 없었다. 복구를 도와주면서 챙길 이권만 해도 엄청났다.

변이체 사냥은 물론, 회색 송곳니 부족의 일상을 사진으로 찍어 팔아도 상당할 것이다. 그들이 만든 이능 물품을 지구에 가져와 팔아도 좋았다. 거기다 회색 송곳니 부족을 통해 다른 세르엘 종족의 부족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지원은 남의 돈으로 하고, 생색은 생색대로 내고, 사업을 벌여 막대한 이득을 챙긴다.

말 그대로 일석삼조.

수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쉬바 공격대가 불성실하게 비용을 지불하거나 연체할 수도 있으니, 인도 정부와 수호자 연맹 인도 지부에서 지급 보증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피고인 측에 앉아 있던 정부 관계자와 인도 지부장이 놀라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급 보증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지금 사태는 인도 정부와 인도 지부가 공격대 관리 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그에 따른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만. 더 이상의 발언은 무의미하다. 판결을 내리겠다.]

마니엘라가 황금색 눈을 빛냈다.

[고소인 측에서 제안한 방안을 받아들인다. 알바트로스 공격대는 고소인 측의 피해가 완전히 복구될 때까지 물심양면에 걸쳐 지원을 하고, 거기 소요되는 비용은 전액 쉬바 공격대에서 부담한다. 만약 비용 지급이 성실하게 되지 않을시, 인도 정부와 수호자 연맹 인도 지부가 5:5로 대신 지급을 한다. 중재 위원

회가 이 과정을 감독할 것이며, 이로 인해 새로운 분쟁이 생길 시 엄중하게 처벌하도록 한다. 아울러 오늘 일로 인해 서로에게 보복을 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

수한이 원하던 대로 되었다.

마니엘라는 또 이의가 있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재판이 끝난 것이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데, 문득 그녀의 황금색 눈이 수한에게 고정되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아련하게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재미있는 것을 가지고 있구나.]

마니엘라가 수한의 왼쪽 손목을 보고 있었다.

레벨 업 도우미를.

[제국의 무기를 가진 지구인이라…… 흥미롭구나. 훗날 다시 보게 될 일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마니엘라가 떠나갔다.

중재 위원회의 위원들도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거미 형상의 위원 하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으로 세라프 재판을 마친다. 우리 위원회는 보랏빛 장막께서 내린 판결이 정확히 이행되도록 철저히 감독할 것이다. 폐정!]

대애앵, 대앵!

징이 울렸다.

방청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남은 인도인들이 수한과 알바트로스 공격대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장했다.

촌장 노인과 무녀가 수한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이제 소린이도 편히 눈을 감을 거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닙니다. 저도 사실을 알고 나서 그들과 같은 지구인이라는 게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 공격대와 여러분이 돈독한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그야 이를 말이겠소.]

조만간 회색 송곳니 부족과 일곱 마을의 대표자들이 지구를 방문하기로 했다.

갈태수 사장과 그들이 악수를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수한도 마음이 넉넉해졌다.

새미가 참가했던 원정대가 회색 송곳니 부족에게 억류되면서 시작된 조사, 그리고 재판.

그게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제국의 무기라……’

다만 마니엘라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당장 수한을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레벨 업 도우미에 대해서는 세라프들도 알고 있는 모양.

개마고원에서 발견된 제국인 시체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수 동기인 지훈을 잘 구슬리면, 작은 정보라도 얻어들을 수 있겠지.

지구로 돌아왔다.

얼굴이 더 좋아진 새미가 수한을 반겼다.

며칠 후, 예정대로 타이누 행성인들이 지구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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