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라도 -1- >
타이누 행성인들과 얘기는 잘 되었다.
MOU를 체결했다.
타이누 행성인들에겐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래도 서류를 꼼꼼하게 읽은 후 손해 볼 게 없다는 판단을 하고 사인을 했다.
팡팡! 팡!
플래시가 터졌다.
알바트로스 공격대와 타이누 행성에 얽힌 이야기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그 과정이나 결과 모두 무척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르엘 종족.
미남 미녀 종족으로 유명한 이들 아닌가.
지구인은 외형에 강하게 구애 받는 종족이었다. 자연히 지구를 방문한 이들 중 회색 송곳니 부족에게 집중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고, 모든 조율을 마친 후 타이누 행성인들이 돌아갔다. 알바트로스의 지원 요원 몇 명이 짐을 바리바리 싣고 그들을 따랐다. 지금부터 지원이 시작될 것이다.
통역할 일이 없어져 수한도 특별 휴가를 받았다. 지원 2과가 다음 원정을 떠날 때까진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다.
태수가 수한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해서 갔더니, 두툼한 봉투 하나를 건넨다.
금일봉.
“수한씨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장님께서 절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물러나왔다. 이제 12월 말까지는 계속 휴가였다. 2016년 1월 4일 월요일에 출근하면 된다.
회색 송곳니 부족에게 받은 힘의 결정은 모두 흡수한 뒤였다.
만물 변환 점수는 38점, 만상 투시 점수는 11점을 얻었다.
같은 C급인데, 투시 계열 힘의 결정은 이미 한 차례 흡수한 적이 있어 효율이 떨어지나 보다.
조금 아쉽긴 했다.
그래도 다른 곳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레벨은 117이 되고, 지능과 위엄은 1씩 오르고……
세라프 재판에서 대부분이 상승했다. 생전 처음 세라프 종족과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고, 재판 결과를 수한이 의도한 대로 이끌고 간 게 컸다.
반면 레벨 업 도우미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실패했다.
지훈이 너무 바빴다.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했는데 시간이 안 난다고 했다. 최소한 지금 개발 중인 물건의 시제품이 나와야 시간이 좀 날 거라나.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했다.
그러는 동안 새미가 퇴원을 했다.
건강을 완전히 되찾은 상태였다. 얼굴도 예전의 미모를 되찾았다.
“크리스마스 전에 퇴원해서 다행이다.”
“진짜. 잘못하면 크리스마스를 병원에서 보낼 뻔 했잖아?”
정말 오랜만의 데이트였다.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밤거리를 걷기도 하고.
그러다 새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오빠. 새해에는 뭐할 거야?”
“글쎄.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금요일까지 3일 연휴잖아. 나는 부모님이랑 여행 가기로 했어.”
“그래?”
“응. 설날에는 못 오실 것 같아서 이번에 오신대. 그래서 새해에는 시간을 못 낼 것 같아.”
“어쩔 수 없지. 나도 동생들이랑 여행이나 가야겠다.”
새미의 부모님은 외교관이었다. 1년 대부분을 부임지에 가 있었는데, 이번에 딸을 보러 귀국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걱정스러울 만도 할 것이다.
깔루 행성에서 조난당했던 게 겨우 얼마 전인데, 이번엔 외계인들에게 억류까지 당했으니까.
수한은 새미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부모님이랑 같이 있겠다는데 뭐 어쩔 것이냐.
커피를 휘젓다가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설날에는 혼자 있는 거야?”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럼 원정 다녀오고 나서 어디 여행 가지 않을래? 설날이랑 휴가 붙여 쓰면 해외도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흐응……”
새미가 묘한 눈빛으로 수한을 쳐다보았다.
좀 머쓱하긴 했지만, 수한은 뭐 어떠냐는 듯 당당하게 새미를 마주보았다.
새미가 샐쭉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해. 엉큼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에이, 아냐. 그냥 자기랑 같이 놀러가고 싶어서 그래.”
새해는 가족들과, 설날은 함께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동생 녀석들이 속을 썩였다.
1월 1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 간 여행을 다녀오자고 했는데, 이미 약속이 있다는 것이다.
“어, 형. 나 미현이 누나랑 정동진에 일출 보러 가기로 했는데……”
“나도 친구들이랑 졸업 여행 가기로 했어. 미안해.”
“그래? 어쩔 수 없지.”
졸지에 새해를 혼자 보내게 생겼다.
내심 서운했다.
어릴 때는 형 밖에 모르는 귀여운 녀석들이었는데, 이젠 형은 안중에도 없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냥이다.
3레벨만 올리면 120레벨에 도달하며 3번째 초능이 개발된다. 기왕이면 다음 원정을 떠나기 전까지 120레벨을 달성하고 싶었다.
그걸 위해 생각해둔 게 있었다.
마라도 여행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변이체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곳을 꼽자면 개마고원이 첫 번째다. E급과 F급 변이체도 많고, 유일하게 D급 변이체가 출현하는 곳이니까.
대신 민간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국군이 그곳을 지키면서 변이체들을 사냥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제외.
그 다음은 지리산과 마라도였다.
D급 변이체는 없어도, E급과 F급 변이체가 많았다. 그래서 변이체 사냥꾼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 중 지리산에 사냥꾼이 더 많았다. 육지여서 활동하기 더 편했던 것이다. 마라도는 상대적으로 출입이 적어, 해군이 인근 모슬포 항에 주둔하면서 정기적으로 소탕 작전을 벌였다.
지리산은 알바트로스 공격대에 입사하기 전 가서 생활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레벨은 꽤 올렸지만, 지금은 가봤자 별로 도움이 안 될 터였다.
그렇다면 마라도가 낫겠다.
지금까지 레벨 업 도우미에 대해 알아낸 바로는 새로운 경험을 할 때 레벨이 잘 올랐다. 육지 대신 바다에서 사냥을 하면 120레벨이 되는 것을 기대해 볼 만 했다.
예약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이동했다.
버스를 타고 제주도 남단의 모슬포까지 간 후, 인근의 모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모슬포 근처의 중문 관광단지에 특급호텔들이 밀집해 있지만, 굳이 거기까지 가서 잘 생각은 없었다.
마라도로 출발하는 배는 하루에 겨우 두 번 있었다.
예전에는 예닐곱 번씩 왕복했다는데, 변이체들이 마라도에 자줄 출몰하면서 횟수가 줄었다.
“마라도는 위험한데…… 혹시 변이체 사냥꾼이세요?”
항구 매표원이 수한의 차림새를 살피더니 넌지시 물었다.
수한은 말없이 들고 온 가방을 툭툭 쳤다. 가죽 가방이 우그러들며, 언뜻 총 모양이 나타났다.
더구나 지금 입은 것은 국군 전투복이었다. 개마고원 5년 근무 기장과, 하사 계급장이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매표원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요새 마라도 변이체들이 극성이에요. 매년 겨울마다 그렇긴 했는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더 난리니까 조심하세요.”
“지리산은 갈수록 변이체가 줄어든다고 들었는데 신기하네요.”
“바다라서 변이체를 잡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여긴 사냥꾼들이 별로 안 와서 계속 변이체 수가 늘고 있어요. 이렇게 오셨으니 변이체 많이 잡고, 돈도 많이 벌어가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수한은 가방에 소총과 권총 2자루, 대검만 넣어 가져왔다.
총알을 넉넉히 담다 보니 무게가 너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중간에 공항에서 한 번 제지당했지만, 이능력자 신분증을 제시하여 통과할 수 있었다.
마라도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걸리는 시간은 고작 30분.
배 안에서 군것질거리를 팔기에 맥주 한 캔과 오징어 한 마리를 샀다. 굳이 좁은 배 안에 있을 것 없이, 갑판 위로 올라왔다.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캬!”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수한이지만, 바다 위에서 마시는 맥주의 맛은 참 각별했다.
수한을 눈여겨보던 중년 남자 하나가 말을 걸었다.
“변이체 사냥꾼이신가 봅니다.”
“예, 맞습니다. 예전에 지리산만 몇 번 가봤는데, 마라도에 한 번 가보려고요.”
“하긴 지리산은 요새 끝물이죠. 한때는 사냥꾼 천국이었는데 요샌 뭐……”
마라도가 성큼 다가왔다.
수한은 가방에서 총을 꺼냈다. 권총과 대검을 허리에 차고, 소총을 비껴들자 백전노장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무장했다. 여기서부터 변이체가 출몰하기 때문이었다. 소형 변이체 탐지기를 꺼내서 주위를 살피는 사람도 있었다.
마라도에 도착했다.
선착장에 배가 닿자 가뿐히 땅을 밟았다.
전반적으로 한산한 분위기였다. 소총이나 산탄총을 둘러맨 사냥꾼들만 오락가락했다.
아까 말을 건 중년 남자가 수한에게 다가왔다.
“사냥패는 정하셨습니까?”
“아뇨. 2박 3일 일정으로 온 거라서, 간단히 돌아보고 갈 겁니다.”
“아하, 사전 답사 오셨나 보네요.”
중년 남자의 얼굴이 돌변했다.
방금 전만 해도 호의적이었는데, 오히려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뀐 것이다.
동료가 아니라 잠재적인 경쟁자를 보는 눈.
수한을 지리산 사냥패 중 하나의 소속으로 생각했나 보다.
굳이 오해를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천천히 남쪽 해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라도는 작은 섬이다.
남북의 길이는 1.3km, 동서의 길이는 500m에 불과했다. 둘레는 고작 4.2km이고, 면적도 10만평 밖에 안 되었다.
얼마 걸리지 않아 마라도 남쪽 해안에 도착했다.
해안은 거뭇한 절벽으로 이뤄져 있었다. 파도가 달려와 절벽에 부딪치자 하얀 거품이 물씬 일어났다. 칼날처럼 바람이 불어, 얼굴이 상당히 시렸다.
절벽에 듬성듬성 세워진 표지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변이체 주의! 은신형, 감지 불가 변이체 있음!]
수한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주시자의 눈을 끌어올리자 두 눈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몇 마리가 보였다.
사람 몸통 크기의 거대 게, 바위처럼 보이는 굴, 조개 등등.
기껏해야 F급 변이체였다. 하긴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으니 E급이었으면 진작 걸려서 죽었겠지.
소총으로 한 마리 한 마리 죽여 나갔다.
굳이 속성 부여를 쓸 것도 없었다. F급쯤은 그냥 총만 쏴도 충분했다.
수한이 잡은 것은 정확히 게 3마리, 굴 2마리, 조개 3마리.
미리 준비해 온 끈으로 그것들을 묶었다. 바닥에 질질 끌며 선착장으로 돌아갔다.
주변을 오가던 사냥꾼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거 은신형 변이체 아냐?”
“맞는 것 같은데……”
“무슨 수로 잡았지?”
“저거 미끼로 써먹으면 좋겠다.”
사실 수한도 그러려고 잡은 거였다.
선착장에서 초대형 고무 대야와 큰 칼을 하나 샀다. 대충 아무데나 앉아, 변이체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게의 다리를 몽땅 잘라내고, 몸통 안의 내장과 살을 긁어냈다. 굴과 조개의 껍데기를 가른 뒤, 그 안의 살만 남겼다. 그 뒤 이거들을 모두 토막 쳐 적당한 크기로 만들었다.
사냥꾼들이 수한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말을 붙였다.
“이보쇼! 그거 혹시 파는 거요?”
“아뇨. 제가 쓸 겁니다.”
“그럴 거면 안 보이게 할 것이지, 왜 괜히 늘여놓고 작업을 해서……”
수한은 금세 작업을 끝냈다.
대야에 살점을 모두 집어넣고, 남은 잔해는 선착장에 마련된 소각로에 버렸다. 불을 댕긴 다음 기름 한 통과 대야를 들고 다시 남쪽 해안으로 이동했다.
마라도 변이체 사냥 방법은 기본적으로 낚시.
배를 타고 남쪽 바다로 나갈수록 변이체가 많았다. 그러다가 과거 기계 괴수가 죽은 지점을 벗어나면 수가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