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계 괴수 -2- >
“그야 모르는 일이죠. X-0 수치는 당분간 비밀로 하세요. 괜히 사실이 퍼져나갔다가 차원문을 못 타면 큰일 납니다.”
“걱정 마세요.”
쿠시아르로 복귀하며 중계기를 10 킬로미터 거리마다 심었다. 인공위성도 기지국도 없는 외계 행성이지만, 이것으로 차원문 상태를 실시간으로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숙소에 원격 감시 체계를 구축하자, 파견대의 인물들이 기웃거리며 찾아왔다.
그들까지 내칠 수는 없었다.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다. 대신 차원문 진입 시점은 파견대에서 처리해 주기로 약속 받았다.
수한은 작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X-0의 녹색 그래프가 일직선으로 천천히 상승하고 있었다.
차원문이 열릴 때가 되면 그래프의 상승이 한 풀 꺾인다. 그리고 소강상태를 맞이했다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며 기계 괴수가 나타난다.
한참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새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뭐해?”
“모니터링 하고 있지.”
“언제까진데?”
“1시간 후면 교대야.”
“고생한다. 이능력자는 좀 빼주지.”
“하하, 이능력자 대접 받고 싶으면 전투부로 가야지.”
새미가 수한의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수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나 알바트로스랑은 궁합이 별로 안 맞나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 처음 원정은 잘 다녀왔는데 두 번째 원정부터는 계속 안 좋았어. 예전 공격대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어.”
“그냥 운이 없는 거지 뭐.”
하긴 새미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깔루 행성에서는 조난당했고, 미이바 행성에선 아마테라스 공격대와 부딪혔다. 거기다 타이누 행성에서는 세르엘 인들에게 억류당하여 죽을 뻔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외계 행성 원정 자체가 위험했다. S급 이능력자라 해도, 운이 없으면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새미가 조용히 말했다.
“나 그냥 공격대 퇴사하고 수호자 연맹 들어갈까 봐.”
“음……”
수호자 연맹은 장단점이 명확했다.
일단 박봉이다. 연봉은 높지만, 원정 기회가 없으니 배당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만큼 안전하고,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대전쟁 당시 수호자 연맹이 앞장서서 기계 괴수들에게 맞서 싸웠고, 지금도 치안 유지를 위해 힘쓰고 있으니까.
수한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동생들의 조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여자가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을 때는 이런저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말고 그냥 안아주라고 했지?
수한은 한쪽 팔로 새미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새미가 수한의 옆구리로 파고들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에도 X-0 그래프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원정대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쿠시아르를 돌아다녔다. 지형을 살피고, 방어 태세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른 행성의 원정대와도 마주쳤다. 대부분이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갔지만, 몇 개는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날 저녁, 상군이 원정대를 모아놓고 말했다.
“쿠시아르의 총 전력은 S급 3명, AA급 12명, A급 30명, B급 100명 정도입니다.”
“생각보다 많네요?”
“각 행성의 원정대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상황이 불리해지면 다들 달아나겠지만, 나쁘진 않은 소식입니다.”
“소형 기계 괴수면 좋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소형이면 도시 방어에 가담하고, 중형이면 철수하겠습니다. 괜히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지요.”
“예!”
밤이 되었다.
모니터에는 여전히 녹색 선이 일직선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고, 세 번째 날 밤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소형 기계 괴수가 나타날 거면 지금쯤 변화가 보여야 하는데……
혹시 중형이나 대형 기계 괴수가 나오려는 걸까?
불안감이 원정대에 감돌기 시작했다.
철수 얘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성급한 것 같지만, 미적거리다가 탈출하지 못하는 것보단 낫다는 것이다.
논의가 본격화되려는데 마침내 그래프에 변화가 일어났다.
완만한 상승세에서, 수평선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자가 급히 원정대를 깨웠다.
“과장님! 서 과장님!”
“하암, 무슨 일이야?”
“X-0 수치가 소강상태로 들어갔습니다!”
“뭐?”
네 번째 날 새벽.
모두 곤히 자고 있었지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짐을 쌌다.
X-0 상승세가 멈칫한 이상, 몇 시간 내에 어떤 기계 괴수가 출현할지 결판이 난다.
1시간 만에 폭발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하면 소형 기계 괴수.
6시간이 걸린다면 중형, 24시간이 걸린다면 대형, 72시간이 걸린다면 거대 기계 괴수였다.
“빨리빨리 움직여요. 1시간 반 안에 끝냅시다. 만약 그 동안 X-0 폭발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구로 귀환하겠습니다.”
숙소에 풀어놓았던 짐을 몽땅 싸서 ATV에 실었다.
혹시 모르니 전투 장비만 놔두었다. 화생방 장비도 마찬가지였고.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났다.
수한을 비롯한 원정대가 눈치를 볼 때,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소강상태 종료 됩니다. X-0 수치 증가하기 시작했어요!”
멀뚱히 모니터를 보고 있던 지원 14과의 막내가 소리를 지른 것이다.
원정대가 환호했다.
“좋았어!”
“기계 괴수 사냥이다!”
“우리 안 돌아가도 되는 거죠?”
“그래도 짐은 다 싸놓도록 하죠. 불리해지면 탈출해야 하니까. 아, 수한씨는 저랑 같이 시청에 다녀옵시다. 케르베스 인들이 상황 파악을 하고 있는지 알아봐야죠.”
“예, 과장님.”
시청에 갔는데, 아직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듯했다. 저번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왕좌왕하며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었다.
개중 가까이 있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 시장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시장님을요?]
[예. 저희 공격대에서 기계 괴수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는데, 그것을 직접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직원의 눈이 커졌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손짓을 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은 둘을 시청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시청 지하 5층에 시장실이 있었다. 직원이 그 안에 대고 몇 마디를 하더니, 둘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시장이 긴 의자에 누워 서류를 보다 고개만 돌려 둘을 보았다. 희고 곱슬곱슬한 털이 참 앙증맞았다.
[반가워요. 거기 누우세요.]
문화 자체가 잘 드러눕는 건가 보다.
시장이 누운 의자 앞에도 긴 의자와 푹신한 침대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수한은 근처 침대에 편안히 누웠다. 오히려 상군이 의자에 엉거주춤 앉더니, 낯짝 참 두껍다는 눈빛을 보냈다.
[기계 괴수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요?]
[예. 차원문에서 나오는 X-0의 양이 소강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시장은 툭 대답하고는 자기 왼쪽 손등을 혀로 핥았다.
생김새도 그렇고,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영락없이 고양이를 닮았다.
상군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소강상태를 벗어나 폭발 단계로 접어든 것도 아십니까?]
[뭐라고요?]
심드렁하던 시장의 눈이 반짝였다.
반쯤 몸을 일으켜 둘을 주시했다.
[방금 전, 그러니까 소강상태 시작 후 정확히 1시간 만에 X-0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한 정보인가요?]
[저희 지구 문명에 대해서 대충은 아시죠? 지구에는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앉은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걸 활용했습니다.]
[신기한 기술이네요. 좋아요. 믿어 보겠어요. 소강상태가 1시간이었다 이거죠?]
시장은 즉시 쿠시아르 내의 모든 전력을 소집했다.
일단 X-0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면 기계 괴수가 금방 나타난다. 아무리 길어도 3시간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능력자들이 전부 모였다.
모아 놓고 보니 굉장히 많았다. 수백 명은 가뿐히 넘었다.
커다란 광장에 모여, 케르베스 인들은 자기들끼리 출병식을 가졌다. 시장이 연설하고, 저마다 함성을 질렀다.
원정대에게는 따로 작전관이 붙었다.
정신 계열의 C급 이능력자. 텔레파시 능력이 있어 쿠시아르 지휘부와 교신이 가능했다.
[여러분은 제 지휘에 따라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수한이 통역을 위해 작전관을 따라다니기로 했다.
대략 준비가 끝나자 바로 출발했다.
소형 기계 괴수이니만큼, 도시 밖의 황야에서 맞아 싸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며칠 전 차원문을 향해 접근하면서 봤던 바위산.
그것들이 실은 쿠시아르의 방어 요새라고 했다. 바위산마다 작은 진지가 숨겨져 있고, 대 기계 괴수용 대형 병기를 설치해 놓았다던가.
이능력자들은 한데 모여 빠르게 전진했다.
케르베스 인들은 당나귀를 닮은 동물을 타고 있었다. 덕분에 전진 속도는 꽤 느렸다. 1시간에 20 킬로미터를 가는 게 고작이었다.
작전관이 수한을 보고 말했다.
[지휘부에서 여러분에게 정찰을 해달랍니다. 여러분이 타고 있는 게 속도가 가장 빨라서 그런 모양입니다.]
[좋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다.
수한이 자청해서 나섰다.
지휘관을 남겨두고, 무전기와 사진기만 덜렁 챙겼다. 어차피 지원 14과 과장과 상군도 어느 정도는 세라프 어를 할 수 있으니까.
중계기 위치도 알고 있으니 그 근처에서 하면 원거리 무전이 가능했다. 주시자의 눈으로 멀리서 살펴보기만 하고 도망칠 작정이었다.
“오빠! 조심해!”
“걱정 마. 금방 갔다 올게.”
길게 늘어선 대열을 빠져나가 쌩 달려 나갔다.
차원문이 있던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1시간 반 정도 최고 속도로 달리자, 멀찍이 기계 괴수의 모습이 보였다.
주시자의 눈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언뜻 보니 거미처럼 생겼다.
16개의 다리가 피라미드 형태의 본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본체에는 파랗고 둥그런 렌즈 같은 게 빼곡히 박혔다. 거대한 쇠기둥 같은 다리 끝이 송곳처럼 날카로워, 땅을 딛을 때마다 깊숙이 박혔다.
대충 어떤 놈일지 감이 왔다.
렌즈는 기계 괴수들이 흔히 쓰는 광선포였다. 출력은 약한 편이지만, 집 한두 채쯤은 간단히 날리곤 했다.
그걸로 부족하면 다리로 내리찍을 게 분명했다. 단단한 땅도 저렇게 파고드는 위력을 가졌으니, 뭐든 걸리기만 하면 작살이 나겠지.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이 자리에서도 수십 개는 넘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수한은 조금 더 접근하기로 했다.
마침 주변에 돌 더미가 몇 개 보였다. ATV는 으슥한 곳에 숨겨두고, 화생방 장비를 착용한 채 천천히 이동했다.
무모하다고?
천만에, 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런 거였다.
이번에 새로 개발한 급속 이동.
여차하면 그걸 사용해서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본인만 아니라 탈것의 속도도 올려주니, 도주용으로는 아주 그만이다.
천천히 기계 괴수에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접근하자 슬슬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느낌.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주시자의 눈을 발휘했다. 그러자 아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다리에 작은 가시 같은 것들이 물 샐 틈 없이 났다. 그리고 본체의 아래쪽에, 커다란 포대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종의 주포라고 할까.
“푸흐으윽!”
갑자기 기계 괴수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녹색 가루 같은 것이 뿜어졌다. 일부는 바람에 실려 멀리 날아가고, 또 일부는 인근 땅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걸 뒤집어쓴 생물들이 변이를 일으켰다.
식물들이 급속도로 커지며 사방으로 촉수를 뻗었다. 지하에 숨어 있던 동물들이 흉포한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기어 나왔다. 하늘을 날던 새들도 기괴하게 변형되어 살의에 찬 눈을 번뜩였다.
볼 건 다 봤다.
수한은 사진기에 망원 렌즈를 장착하고 사진을 최대한 많이 찍었다. 그 후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ATV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본대로 복귀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수석에 놔둔 무전기를 작동시켰다.
[과장님! 과장님! 들리십니까?]
[아, 듣고 있어요.]
[기계 괴수는 거미 형태입니다. 주포가 있고, 광선포 수백 개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소형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TAS 계열 중 하나로 보입니다.]
[TAS? 만만치 않겠네요. 알겠습니다. 사진은 찍었어요?]
[예, 최대한 많이 찍었습니다.]
[좋아요. 바로 복귀해 주세요. 교대 인력 보내겠습니다.]
수한은 ATV를 최대 속도로 몰아 금방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