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63화 (64/254)

< 승전 연회 >

협상이 끝나고 대대적인 승전 연회가 벌어졌다.

전리품을 인도 받는 것은 내일. 협상이 끝나자 벌써 밤이 된 것이다.

별로 참가하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전리품 분배에서 외계 종족 중 가장 많은 몫을 받은 탓이다. 다른 종족들이 백안시할 게 뻔했다.

하지만 케르베스 인들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원정대 대부분이 참가했다.

다른 종족들도 대부분 전원 연회장으로 왔다. 빠져봤자 한두 명이었다.

연회장은 시청 중간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크기가 컸다. 작은 강당을 방불케 했다.

중앙을 비워놓고, 온갖 음식들을 쌓아 올렸다. 재료의 원형을 살려 요리한 터라, 수한이 보기에는 해괴해 보이는 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연회장 가장 자리에 누울 수 있는 긴 의자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방석도 곳곳에 깔려 있는데, 음식을 놔둘 탁자는 보이지 않았다.

내심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케르베스 인 시종들의 인도에 따라 의자 하나에 앉았다.

수한이 의자에 앉자, 시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

뭐라고 정중한 태도로 말은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세라프 어를 할 줄 모르는 모양.

시종이 의자에 눕는 시늉을 했다. 왜 불편하게 그렇게 앉느냐는 것이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수한이 머리를 굴릴 때 새미가 그 옆에 쏘옥 앉았다.

시종이 둘을 번갈아 보더니 뭔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깊이 허리를 숙인 뒤, 종종걸음으로 다른 곳을 향해 갔다.

“쟤 왜 저래?”

“글쎄……”

케르베스 인들이 같은 의자에 앉는 경우는 가족이거나 연인 사이밖에 없었다. 시종은 사실을 추리해냈지만, 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연회장 안이 가득 찼다.

의자 하나마다 한 명씩 앉았다. 그리고 단정한 옷을 입은 시녀들이 시중을 들었다.

왜 탁자가 없나 했더니 음식을 가리키면 시녀들이 음식을 조금 떠서 가져왔다. 심지어 직접 떠먹여주기까지 했다.

수한으로선 상상도 못 했던 호사. 옆에 앉은 새미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흥겨우면서도 경쾌한 음악이었다. 외계 행성 음악은 처음 듣지만, 제법 들을 만 했다.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세요?]

잠깐 음악이 멈춘 사이, 시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덕담이 쏟아지자, 시장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먼저 우리 쿠시아르 시를 위해 힘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기계 괴수와의 전투에 참가했던 이능력자들, 쿠시아르 시 군대, 여덟 외계 종족의 이름이 차례차례 호명되었다.

시장이 우아하게 절을 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시장이 자리에 앉자, 문이 열리며 무희들이 들어왔다.

속이 다 비치는 천으로 몸을 감쌌는데, 천박하지가 않다.

무희들이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었다. 그때마다 팔찌와 발찌가 부딪치며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현란하고 화려한 몸놀림에, 수한은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새미가 수한에게 속삭였다.

“신기하다, 그지?”

“그러게. 지구에선 볼 수 없는 거잖아.”

“음악도 신기하고 아가씨들도 너무 예뻐. 한 명 납치해서 지구에서 키우고 싶다.”

“하하하. 하긴 귀엽긴 하다. 그런데 저번에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예전에는 그랬는데, 여기 오니까 고양이 키우고 싶어졌어.”

안타깝게도 음식은 별로 입에 맞지 않았다.

일단 겉모양이 너무 이질적이었다.

부리부리한 눈이 열 개 쯤 있고, 다리가 여섯 개 쯤 달린 큰 물고기를 그대로 튀겨낸 요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먹고 싶겠나?

고양이 인간들은 안 그런데, 음식들은 왜 저 모양 저 꼴인지 몰랐다.

연회장 중앙에 놓인 것을 보고 있으면 입맛이 확 떨어졌다. 더구나 양념을 거의 하지 않고 반쯤 익혀 놓아서 수한에게는 너무 비렸다.

결국 몇 개 먹어보고는 포기했다. 그나마 쿠시아르 특유의 술과 차는 맛이 있어 다행이었다.

무희들의 춤사위가 끝났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더니, 앉아있는 종족들에게 다가갔다. 말을 걸기도 하고,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주는가 하면 애간장을 녹이는 교태를 부렸다.

그들의 친화력이 대단했다.

전리품 분배 때문에 별로 분위기가 안 좋았다. 그런데 무희들이 노력을 하여 공기가 확연히 달아올랐다. 나중에는 흥청망청 즐기는 분위기가 되었다.

수한에게도 한 명이 접근했다.

날렵한 몸매가 유난히 돋보이고, 다른 이들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무희였다.

무희가 친근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세요?]

수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 생소한 음식들이어서요. 그래서 그런 거지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참, 룬 문자 단검은 잘 쓰셨어요? 꽤 저렴한 가격에 팔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웬 룬 문자 단검?

수한은 무희를 쳐다보았다.

그냥 노란 고양이 얼굴인데, 유난히 짧은 수염을 보자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혹시 그때 그 종업원 아가씨?]

[어머, 기억하시네요?]

[이야, 정말 반갑습니다. 원정 오면서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도요. 할리온에게 얘기는 들었는데, 예전에 봤던 분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아, 할리온님과 아는 사인가 봅니다.]

[곧 결혼할 예정이에요.]

무희가 배시시 웃었다.

할리온이 그걸 보고 수한이 앉아 있는 쪽으로 왔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당신이 말한 지구인, 내가 지구 여행할 때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야. 신기하지?]

[뭐? 정말?]

할리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한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두 분 곧 결혼하신다면서요? 미리 축하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쑥스럽네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할리온이 웃으며 무희의 허리를 껴안았다. 무희가 교태를 부리며 할리온의 품에 답삭 안겼다.

세라프 어로 떠들었더니, 옆에서 새미의 시선이 느껴졌다.

수한은 간략하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새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맞아. 나도 그 얘기 들어봤어. 용산 외계인 알바생이라고 인터넷에서 꽤 유명했었잖아.”

“그 외계인이야.”

“진짜 신기하다.”

새미가 새삼스런 눈으로 무희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 고양이 아가씨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수한이 정중히 인사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지구 출신 알바트로스 공격대 소속 C급 이능력자, 이수한입니다. 여긴 제 애인이고, 같은 공격대 소속 B급 이능력자인 윤새미라고 합니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새미도 눈치껏 인사를 하자, 무희가 활짝 웃었다.

[저는 쿠시아르 일족, 세네티의 딸 기나리아라고 해요.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앞으로 자주 봤으면 좋겠네요.]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세네티님이라면……]

[지금 시장직을 맡고 계세요. 이제 많이 노쇠해지셔서, 몇 년 뒤에는 은퇴하시겠지만요.]

[아, 그렇습니까?]

수한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기나리아를 보았다.

지구에서와는 다르게, 케르베스 행성에서는 무희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모양이다.

쿠시아르 일족.

케르베스 행성이 기계 괴수에게 침략 받기 전에는 쿠시아르를 중심으로 한 왕국을 지배하던 가문이다. 지금은 처지가 달라졌다고는 하나, 그 위상은 여전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시장의 딸이라고 그랬다.

이를테면 공주 격이라고 할까. 나중에는 시장 자리에 오를 지도 모르는 자였다.

사정을 들은 새미가 눈을 반짝였다.

“혹시 지구 말고도 다른 행성에 가본 적 있으세요?”

[많았죠. 지구가 53번째인가 54번째인가 했을 거예요.]

“우와, 대단하네요. 전 여기가 겨우 6번째인데……”

[새미님이라고 하셨죠? 새미님은 공격대 소속으로 원정 다니니까 그럴 거예요. 전 혼자 돌아다녔어요.]

“돈이 많이 들지 않아요?”

[체류비는 제가 직접 벌었지만 차원문 여는 건 가문에서 도와줬죠. 안 그랬으면 그렇게 많이는 못 돌아다녔을 거예요. 또 세라프 어만으로는 부족해서, 통역 이능이 걸린 목걸이도 지원을 받았고요.]

“그렇겠네요. 참, 헤븐에는 혹시 가보셨어요?”

[가봤어요. 정말 천국 같더라고요. 제가 가본 곳 중에서는 헤븐이랑 미드가르드가 가장 좋았어요. 수중 호흡 문제만 해결하면, 아틀란티스도 그 정도쯤 되고요.]

“부러워요. 저희는 가는 곳이 정해져 있는데……”

신기하게도 새미와 기나리아의 죽이 잘 맞았다.

수한은 둘을 위해 열심히 통역을 했다.

기나리아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어서일까. 다른 케르베스 인들이 주변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시종들이 눈치껏 긴 의자를 옮겨왔다.

수한을 중심으로 해서, 커다란 대화의 장이 열렸다. 케르베스 인만이 아니라 다른 외계 종족도 꽤 많이 자리를 잡았다.

새미 혼자 세라프 어를 몰랐다. 덕분에 따돌림 당할까 봐 수한이 계속 챙겨주었다. 기나리아도 알게 모르게 신경을 써서,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시장이 멀찍이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아예 자리를 뜨자, 케르베스 인들이 대부분 이쪽으로 몰려왔다.

쿠시아르의 S급 이능력자 3명, 주요 군대 지휘관, 시청의 고위 관리들까지.

지위가 지위이다 보니,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중 특히 수한의 주의를 끈 항목이 있었다.

[잿빛 학살자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야.]

[또? 야단났군.]

[아마 이번 제국의 공격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 그나마 이번에는 모두 소형 기계 괴수만 나타나서 다행이었지. 백 년 전처럼 대형 기계 괴수들이 공격했으면 큰일 났을 거야.]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어쨌든 그 동안 조용했었는데 다시 난리가 나게 생겼어. 잿빛 학살자만이 아니라 청염의 마룡과 하늘 대왕, 지옥 공포 모두 움직이고 있다고 하니까.]

[말세야, 말세.]

잿빛 학살자.

익숙한 이름이다.

수한이 알바트로스 공격대 면접을 볼 때 써먹었던 기계 괴수가 아닌가.

잿빛 학살자가 활동을 재개했다.

그 말이 유독 강하게 수한의 뇌리에 박혔다.

이것 말고도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과연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차곡차곡 기억 한 편에 쌓아두었다.

수한은 그들과 잘 어울렸지만, 대부분의 지구인들은 멀뚱멀뚱 외계 종족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었다.

세라프 어 때문이었다.

상군과 지원 14과 과장 정도만 어설픈 세라프 어로 한담을 나눴다. 그 외엔 흡사 꿀 먹은 벙어리를 보는 듯했다.

기나리아가 그들을 보더니 수한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구인들은 이상하게도 세라프 어에 적응을 제대로 못 하네요.]

[지구인만이 아니죠. 펠류 행성인도 그렇고, 씨어스 행성인도 그렇고 세라프 어를 잘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만난 지구인 중 이수한님이 가장 세라프 어를 능숙하게 하는 것 같아요. 예전엔 제 목걸이로 의사 소통을 했던 것 같은데, 실력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하하, 그때도 세라프 어는 어느 정도 할 줄 알았습니다. 지금만큼은 아니었지만요.]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몇몇은 노래를 부르고, 간단한 기예를 선보이기도 했다.

연회가 끝나도록 별 일이 없었다.

수한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바트로스의 원정대를 보는 다른 공격대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는데, 별 일 없이 넘어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다음날 이른 아침.

아홉 종족이 모인 자리에서 쿠사아르 측이 전리품의 봉인을 풀었다. 미리 작성해 두었던 목록과 비교해가며 부품을 확인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쿠시아르로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양이 줄었는데요?]

목록에 비해 부품의 수가 확연히 모자랐다.

최소한 2할.

족히 수천 억의 가치가 있는 전리품이 통째로 증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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