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둑 -1- >
여덟 종족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기나리아.
의구심이 가득 맺힌 눈길이 쏟아지자, 기나리아는 살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후계자 수업의 일환으로 나온 참이다.
어렵지 않게 끝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암초에 부딪혔다.
기나리아는 다시 전리품의 목록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근처에 있던 시종을 불렀다.
[타이호크님을 불러오세요, 지금 당장.]
[예!]
시종이 얼른 밖으로 튀어나갔다.
여덟 종족들이 기나리아를 압박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뒤로 빼돌린 것은 아니겠지요?]
[뭐라고 말씀을 해보세요!]
기나리아는 어금니를 한 번 꽉 깨문 뒤 말했다.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저희의 책임입니다. 여러분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타이호크님은 저희 도시의 A급 투시 계열 이능력자이니, 그 분이 도착하시면 금방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흠, 그렇다면 기다려보지요.]
[우리 공격대는 지금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질병 면역 축복이 다 끝났어요. 이러다 사망자라도 나오면 책임질 겁니까?]
항의가 빗발쳤다.
수한은 주시자의 눈을 활성화시켜 창고를 둘러보았다.
워낙 많은 흔적이 있어 범인의 것을 찾아내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다른 공격대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었고.
새미가 옆에서 속삭였다.
“누가 그런 걸까?”
“우리 공격대는 아니니까, 다른 공격대나 쿠시아르 중에 하나겠지.”
“쿠시아르는 아니지 않을까? 인도하기 전에 도둑맞은 거니까, 다 물어줘야 되잖아.”
“내 생각에도 그렇긴 한데, 장담할 수는 없는 거니까. 기계 괴수의 시체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어. 금이나 보석으로 배상해도, 훔쳐간 쪽이 이익이지.”
쿠시아르에서는 분명 최선을 다해 창고를 지켰을 것이다. 경비병을 세우는 것은 물론, 이능도 동원을 했겠지.
그런데 밤 동안 창고가 털렸다? 아무도 모르게?
정말 이상했다.
당연히 쿠시아르 측이 가장 수상했다.
다른 공격대들은 그게 불가능하니까. 최소한 단독으로 창고를 털 수 있는 공격대는 없었다.
문제는 쿠시아르 측에서 그랬을 경우 잃는 게 너무 많다는 점.
그렇게 배신하면 누가 쿠시아르로 원정을 오겠나. 이제 막 기계 괴수를 쓰러뜨려서, 앞으로 다른 행성 공격대의 도움이 절실한 참인데.
지금까지 케르베스 행성인들을 겪으면서 느낀 바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그들이 어리석어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다.
단독으로 불가능하다면 합동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언뜻 보기에도 2개 공격대만 뭉치면 범행이 가능해 보이는 조합이 몇 개 있는데.
모든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둬야겠다. 아직 정확한 사실을 알 수가 없으니까.
이윽고 시종이 하얀 고양이 인간을 데리고 왔다.
무척 늙은 케르베스 인이었다. 거동이 불편한지 가마를 탔다.
타이호크는 짓무른 눈을 끔뻑였다.
[이 늙은이를 부르시다니, 무슨 일입니까?]
기나리아는 빠르게 사정을 설명했다.
타이호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일이…… 알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아가씨의 심려를 덜어드리겠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타이호크는 느릿한 걸음으로 전리품을 향해 다가갔다.
두 눈에서 옅은 금색 광채가 뻗어 나왔다. 황금색 빛줄기가 창고 안을 샅샅이 훑었다.
[으음!]
타이호크가 턱을 쓰다듬었다.
창고 안을 한 번 둘러보고, 전리품을 손으로 한번씩 더듬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바닥의 흙을 집어 냄새를 맡기도 했다.
기나리아가 안달을 냈다.
[뭐 찾은 거 있나요?]
[용의주도한 놈들입니다. 어젯밤의 상황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보이지가 않는다?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능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투시가 불가능하도록 수를 써놓았습니다.]
[그 정도는 예상했던 범위에요. 무슨 계열 어떤 등급인가요? 그것만 알아내도 범인을 잡아낼 수 있어요.]
[시간이 좀 걸립니다.]
타이호크가 품에서 작은 렌즈를 꺼냈다. 그걸 자기 눈에 붙이더니, 정좌하고 눈을 감았다.
털이 듬성듬성 빠진 머리에서, 황금색의 파동이 서서히 번져 나왔다. 파동은 주변을 차근차근 휩쓸고, 종국에는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여덟 종족 모두 이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타이호크가 눈을 떴다.
그런데 얼굴이 좋지가 않았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자신만만한 태도였는데, 그 기색이 모조리 사라졌다.
[찾아내는데 실패했습니다.]
[뭐라고요?]
[제가 비록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은 크게 재주가 없지만, 이 정도로 막막한 것은 생전 처음입니다.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 A급, 어쩌면 AA급이나 S급 이능력자가 개입되었다는 이야기.
투시 계열 이능을 방해할 수 있는 이능은 많았다.
구현, 의지, 정신, 영혼, 외능, 소환 계통 이능 중 종류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여덟 종족이 분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지금 우리랑 장난하는 거요?]
[도시 방어에 협력한 것을, 이렇게 되갚긴가!]
[은혜를 원수로 갚아?]
[우리 부족의 전사가 일곱이나 목숨을 잃었다. 그 목숨 값을 도둑질하려 하다니!]
[잠시, 잠시만요!]
기라니아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저희가 경계를 미흡하게 한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결코 저희가 전리품을 빼돌린 건 아닙니다. 앞으로 종족 연합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많은데, 그런 일이 발생하면 누가 저희를 도우려고 하겠습니까? 반드시 범인을 색출할 테니, 조금만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어디, 두고 봅시다.]
[흥, 빨리 범인을 찾아내야 할 거요.]
[제길.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지?]
기라니아가 간절히 말하자, 여덟 종족은 두고 보자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지구인들은 아직 예방 접종 시간이 충분히 남아 괜찮은데, 다른 종족 중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하는 종족이 몇 있었던 것이다.
늦출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하루.
그 안에 범인을 잡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쿠시아르는 치명적인 불명예를 안게 될 것이다.
왕국 시절의 영광을 기억하는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일.
기라니아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시종과 병사들을 불러 이것저것을 지시했다. 이내 시청은 물론 쿠시아르 전체가 번잡해졌다.
각종 보고가 들어오는데, 좋은 소식은 없었다.
전부 다 오리무중.
전리품의 2할이면 무게와 부피 모두 엄청나다. 인력으로 가져가기는 어려웠다. 그 흔적이라도 발견해야 할 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었다.
수한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한 가지 전제를 두고 머리를 굴렸다.
쿠시아르 인은 분명히 끼어 있을 거라고.
여덟 종족 중 누군가가 전리품을 훔친 거라고 가정해 보자. 그걸 들고 차원문을 넘을 수가 있나? 무게 때문에 다 들통 날 텐데?
그렇다면 여기서 처분을 하고 갈 것이다. 힘의 결정이나 기타 진귀한 물건으로 바꿔서 가려고 하겠지.
미이바 행성에서 알바트로스 원정대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꼭 그렇지는 않겠다.
만약 후속 원정대가 도착했다면 어떨까? 그들이 기계 괴수가 쓰러진 자리에서 생기는 변이체들을 잡으면서, 전리품을 보관하고 있다가 변이체 시체에 섞어 조금씩 가져간다면?
수한은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나리아를 쳐다보았다.
주시자의 눈으로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최근 며칠 겪어본 바로는 시장도 멍청한 것 같지는 않으니, 뒤로 빼돌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저것들이 가장 수상한데……’
얼른 돌아가야 한다고 방방 뛰고 있는 두 종족.
오르페 행성인과 야토브 행성인.
전리품 협상 당시 가장 격렬하게 반응했던 종족이었다. A급 정신 계열, 영혼 계열, 소환 계열, 구현 계열 이능력자가 섞여 있어 둘이 힘을 합치기만 하면 창고를 터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증거가 없으니까.
일단 숙소로 돌아갔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기나리아도 내일 아침에 다시 와 달라고 했다.
미행이 따라붙었다.
지구인만이 아니라, 여덟 종족 모두에게 그런 것 같았다. 뒤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며 실랑이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상군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지구로 돌아가나 했더니, 갑자기 일이 생겼네요.”
“동감입니다. 이번 원정은 좀 빨리 끝날 줄 알았는데……”
알바트로스 원정대도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쿠시아르 측에서는 그냥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고.
수한은 먼저 세라프의 전당으로 가 최근 차원문을 넘었던 이들의 목록을 요구했다.
단번에 거절당했다. 기밀사항이라는 것이다.
별 수 없이 조금 우회해서 할리온을 찾아갔다.
[차원문 통과한 자들의 목록이 필요하다고요?]
[예. 기계 괴수 사냥 후 원정을 온 종족이 있다면, 그 종족이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대부분의 원정대는 탈것을 많이 가지고 옵니다. 원정에 필요한 물건도 많고, 무엇보다도 전리품을 최대한 가져가기 위해서지요. 그게 꼭 자기들이 사냥한 전리품일 거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아!]
할리온이 탄성을 질렀다.
머릿속이 환하게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세라프의 전당에서 시청은 바로 지척이었다.
원정대가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시청에 접근하고, 그 근처에 탈것을 놔둔 뒤 부품을 빼돌린다면 어떨까?
경비병들이야 고위 이능력자들이 제압하면 그만. 이후 투시 계열 이능력자가 사실을 읽지 못하게 흔적만 지우면 모든 일이 끝난다.
원정대가 밤 동안 쿠시아르를 벗어난다면 그 다음은 뭐 어쩌겠나. 1달 정도 변이체들을 잡다가 돌아오면 이미 상황이 다 종료된 뒤일 텐데.
할리온이 눈을 빛냈다.
[일리가 있소. 당장 시장님한테 갑시다.]
시장은 수한의 생각을 듣더니 당장 열람 허가서를 내주었다. 그걸 들이밀자, 세라프의 전당을 관리하던 이들이 장부를 보여주었다.
과연 있었다.
오르페 행성인과 슈뒤 행성인.
행성만 아니라 공격대도 같았다. 심지어 두 원정대가 거의 같은 시간에 차원문을 넘었다.
새벽 3시, 만물이 잠든 시간.
사실 야토브 행성인을 의심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할리온이 코를 벌름거렸다.
[이 작자들이었군! 이것들을 당장에……]
수한이 급히 제지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충분히 증거가 되지 않아요. 몇 가지 더 확인해봐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쿠시아르와 지상이 연결되는 통로로 갔다.
파수병들에게 밤 동안 밖으로 나간 원정대가 있느냐고 물었다.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원정대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밤도 아니고 새벽이었어요. 겨우 몇 시간 전이었습니다.]
[짐은 얼마나 싣고 있었습니까?]
[생전 처음 보는 동물들을 잔뜩 데리고 왔는데, 그 위에 짐을 많이 실었더라고요. 무게가 꽤 무거운지 동물들이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이거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지금까지 상황만 보고한 뒤, 수한과 할리온만 통로를 나섰다. 기계 괴수를 유인하던 때처럼, 할리온은 수한을 업고 네 발로 달려 나갔다.
둘 사이의 거리는 기껏해야 수십 킬로미터.
겨우 1시간도 되지 않아 따라잡았다. 두 원정대가 조금 거리를 둔 채, 기계 괴수가 쓰러진 곳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놈들이 보입니다.]
수한은 주시자의 눈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멀찍이 수십 마리의 동물을 끌고 이동하는 원정대가 보였다. 짐을 실은 동물들이 혀를 빼물고 땀을 뻘뻘 흘렸다.
할리온이 수한을 보고 말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이오?]
[제 능력으로 물체 투시는 힘듭니다. 그리고 물건을 감싼 천이 일반적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