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선언 >
얌전히 앉아 있던 미현이 기한을 보고 말했다.
“S대에 합격했다고 했지?”
“네. 세라프 어문 학과에요.”
“법학과도 괜찮은 것 같은데, 생각해 보지 그랬어.”
“보니까 요즘엔 세라프 어가 대세더라고요. 정 필요하면 나중에 복수 전공할 수도 있고요.”
“하긴 그렇지. 요즘엔 어딜 가나 세라프 어가 중요하니까.”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꽤 깊었다.
슬슬 파티를 끝내야 할 텐데, 명한이 묘하게 수한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뭐 할 말 있어?”
“응, 사실 형이랑 기한이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얘기해 봐. 나 언제 바빠질지 몰라.”
명한이 침을 삼켰다.
잠깐 입을 우물거리자, 옆에 앉아 있던 미현이 명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명한은 결심을 하듯 배에 힘을 주고 말했다.
“나, 결혼할래.”
“뭐?”
“형,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새미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명한의 나이는 이제 겨우 21살이었다. 결혼하기엔 너무 일렀다.
수한은 명한과 미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미현이 본능적으로 명한의 팔을 꽉 안았다. 그걸 느꼈는지, 명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일이란 건 나도 알아. 내가 결혼하기엔 좀 빠른 나이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굳이 미룰 필요는 없는 거잖아? 절대 간단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거 아니야. 내 인생이 걸린 문제라는 거 잘 이해하고 있어. 충분히 생각해보고 내린 결정이니까, 형도 우리 결혼을 축하해줬으면 좋겠
어.”
이미 결혼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해놓고 말하고 있었다.
수한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라고 축하해줘야 할까? 아니면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니 반대해야 할까?
수한은 결정을 내렸다.
명한의 인생이다.
자신이 비록 지난 10년 간 가장 노릇을 했지만, 동생의 인생까지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는 판단을 했다.
다만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좋겠지.
굳이 정면으로 반대할 것도 없다.
시간을 끌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까.
“군대는 어쩌고?”
“어?”
수한의 반문하자, 명한의 얼굴이 놀람으로 가득 찼다.
그걸 보고 수한을 혀를 끌끌 찼다.
“너 이제 스물한 살이잖아. 작년에 신체검사 받은 거 기억 안 나? 올해 영장 나올 텐데?”
“아……”
“어휴, 그 생각도 못 하고 결혼하겠다고 한 거야? 신혼기간을 너는 군대에서 보내고, 제수씨는 독수공방 시키려고? 그랬다가 아기라도 낳으면 어떻게 할 건데?”
미처 생각을 못 해 본 모양이었다.
수한은 고개를 흔들고는 미현을 보았다.
“제수씨, 이렇게 불러도 되지요? 저는 명한이와 제수씨가 사귀거나, 결혼하는 것에 대해 참견할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인생에 있어 큰 변곡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군대 역시 마찬가지고요.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법무관으로 대체복무를 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군대 먼저 해결하고 결혼을 하는 게 좋
다고 생각합니다. 제수씨 생각은 어떻습니까?”
미현은 신중한 기색을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버님 말씀대로 할게요. 사실 저도 너무 성급한 게 아닐까 싶었어요. 명한이랑 제가 만난 지 아직 1년도 안 됐으니까요. 하긴 결혼하고 2년 기다리는 것보다, 결혼 안 하고 2년 기다리는 게 더 쉽겠네요.”
“요즘은 21개월이랍니다. 길긴 하지만, 지나고 보면 짧은 시간이지요.”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명한이 딴 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군대 갔다 오거나 사법고시 합격하면 허락해 준다는 거지?”
“아니, 지금까지 뭘 들은 거니? 내가 허락하고 말고 할 것도 없잖아. 그냥 군대부터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거지.”
“나 올해 사법고시 접수했어. 합격하면 바로 결혼할 거야. 그때 가서 딴소리나 하지 마.”
평소에는 똑똑하던 녀석이 시야가 좁아져서 그런지, 영 헛물만 켜고 있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될 대로 되라고 말을 내뱉었다.
“그래, 사법고시 합격하면 둘이 결혼을 하든 뭘 하든 아무 말도 안 한다. 합격만 해.”
“자기도 들었지? 내가 올해 꼭 사법고시 합격할 테니까, 내년에는 결혼하는 거다?”
“하아, 알았어.”
미현도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법고시를 무슨 초등학교 받아쓰기 시험 정도로 생각하는 걸까.
겨우 학부 2년생, 처음 사법고시에 응시하면서 벌써부터 합격을 운운하다니……
물론 그 나이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사람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쉽게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한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합격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1차 시험 합격 발표는 4월 중순이고, 2차 시험 합격 발표는 10월 초순이니 떨어지면 바로 군대를 보내버려야겠다.
군대를 다녀오면 철이 좀 들겠지.
그 다음에도 결혼하겠다고 하면 결혼시키면 그만이고.
“제수씨가 고생 좀 하겠습니다.”
수한이 미현을 보며 말하자, 미현이 살짝 웃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다음에야 진정이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수한과 새미의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 하면서도, 단 둘이 여행을 간다고 놀려댔다.
그러다 기한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영국 쪽이면 변이체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왠 변이체?”
“형이 저번에 그랬잖아. 마라도에서 C급 변이체 나타나서 해치웠다고. 오늘 아침에 인터넷 뉴스에서 봤는데, 그게 마라도만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그렇다고 하던데?”
“진짜?”
“TV 한 번 틀어보자.”
수한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밤 뉴스가 흘러나왔다.
[마라도 근처에서 나타나는 변이체들의 수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B급 물고기 변이체가 나타나서, 인근에서 조업을 하던 어선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민우 기자가 현장에 나가 있습니다. 이민우 기자?]
[예, 이민우입니다. 2016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나타난 마라도의 변이체들이 계속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은 인명 피해까지 발생했습니다. 자료 화면을 보시겠습니다.]
수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작은 어선 하나가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 영상이 비춰졌다.
지금 마라도는 조업 금지령이 내려진 상태.
어선은 그곳을 멀리 비껴가서 조업을 했다. 그런데도 변을 당한 것이다.
기자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만이 아닙니다. 제주도 남쪽 바다에 항해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해외 무역에 막대한 장애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변이체들이 출현하는 지역이 매일 넓어진다는 게 가장 큰 위협인데요, 해당 해역에서 검출되는 X-0 수치가 점차 높아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수호자 연맹에서는 그 원인을 밝
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계 괴수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요?]
[수호자 연맹에서는 기계 괴수의 출현은 아니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X-0 수치 상승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겁니다. 더구나 제국의 차원문은 지금까지 하늘 높은 곳에서만 열렸는데, 해당 해역의 상공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인양하지 못한 기계 괴수의 부품에서 X-0가 새어나온 것으
로 추정했지만, 다른 해역에서도 같은 상황이 보고되면서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마라도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북해, 쿠릴 열도, 산호해 제도, 베링 해, 허드슨 만, 포클랜드 제도, 마다가스카르, 몰디브 등 세계의 곳곳에서 변이체들이 새로이 출몰하고 있었다.
어째 불길하다.
케르베스 행성에서 들은 내용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전방위적으로 기계 괴수가 공격해왔다고 하지 않았나. 활동성을 잃고 자기 영역만 지키던 기존 기계 괴수들도 활동을 재개했다고 하고.
하지만 뉴스에 나온 얘기대로라면 기계 괴수의 공격은 확실히 아니다.
알 수 없는 일.
새미가 한 마디를 했다.
“북해면 영국에 있는 바다 아냐? 설날에 괜히 변이체랑 마주치고 그러진 않겠지?”
“변이체들은 북해 동쪽에서 주로 나타난대. 영국은 북해 서쪽에 있으니 별 일 없을 거야.”
명한이 불퉁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흥, 변이체 나타나서 통행 금지령이나 떨어져 버려라!”
“이 녀석이 악담을 하네.”
“흥!”
수한은 어이가 없어 머리를 흔들었다.
둘이 설날을 이용해서 가기로 했던 여행.
처음에는 설날을 끼워서 동남아나 중국, 일본 중 한 곳을 다녀오려고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특별 휴가를 받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유럽 여행이었다.
2주로 계획하자 제법 괜찮은 일정이 나왔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까지 3개국을 돌아보기로 했다.
“비행기랑 호텔은 예약했어?”
새미가 소파에 기댄 채 묻자, 수한은 얼른 얼굴을 풀었다.
“다 예약했지. 참, 내가 아직 말 안 했지? 다음 주 월요일 오전 9시에 출발이야. 그때까지 인천국제공항으로 가야 돼.”
“응. 기대 된다! 유럽은 나도 처음이야.”
“자기는 북미쪽이랑 중국에 많이 다녔다고 했지?”
“아빠는 미국에 있고, 엄마는 중국에 있으니까. 같이 한국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새미가 잔뜩 들뜬 표정을 지었다.
유럽 여행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새미만이 아니었다. 수한도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요즘 그걸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왔다.
해외로 나가는 것은 생전 처음이니까.
뉴스를 보고 시계를 봤는데, 벌써 시간이 많이 늦은 뒤였다.
미현이 그만 들어가야겠다고 하자, 새미도 몸을 일으켰다. 수한과 명한도 자리를 떴다.
"난 누나 데려다 주고 올게."
"그래. 나도 새미 데려다 줘야겠다."
"쳇, 나도 얼른 여자친구 만들든지 해야지. 나 혼자 집 지키게 생겼네. 외박은 안 돼! 알았지?"
"하하, 알았어."
막내 기한만 남겨두고 집 밖으로 나왔다.
미현이 수한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주버님, 전 이제 가볼게요."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또 봐요."
"새미씨도 안녕히 들어가요."
"네, 미현씨도요."
명한은 미현의 차에 타고 먼저 출발했다.
어째 분위기가 묘하다.
다음날 아침, 집에서 명한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수한이 미현의 차를 보고 있자, 옆에 서 있던 새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씨가 싸늘한데 가볍게 입고 와서 그런 것 같았다.
“춥지?”
수한은 새미를 뒤쪽에서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새미가 수한을 돌아보더니 픽 웃었다.
“하여간 기회만 있으면……”
“이게 다 자기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건데? 내 잘못이 아니라구.”
“어휴, 억지 좀 부리지 마.”
새미가 깔깔거렸다.
차를 주차시켜 놓은 곳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수한은 명한이 그랬던 것처럼 은근슬쩍 새미의 차에 탔다. 막 시동을 걸던 새미가 수한에게 눈을 흘겼다.
기왕 이미 탄 뒤였다.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겼다.
밤이 늦은 뒤라 도로는 한적했다. 새미의 앙증맞은 스포츠카가 으르렁대며 질주했다.
새미는 운전대를 잡은 채 재잘거렸다.
“아깐 깜짝 놀랐어.”
“왜? 아, 명한이 녀석 때문에?”
“응. 갑자기 결혼 얘기를 할 줄은 몰랐어.”
“나도. 미현씨가 나이가 있으니 결혼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아직 먼 얘기라고 생각했거든.”
“결혼이라니…… 나한텐 너무 먼 이야기야.”
새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새 새미의 집 앞에 도착했다. 새미가 수한을 돌아보았다.
“집에는 어떻게 갈 거야? 밤도 늦었는데.”
“택시 타면 돼. 금방 가.”
“응……”
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수한을 외면하며 말했다.
“피곤할 텐데, 커피 마시고 갈래?”
갑자기 웬 커피?
수한은 새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옅은 홍조가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뭘 생각했는지,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럴까?”
“응.”
둘은 손을 잡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건 묻지 않기로 하자.
시간이 지나 2016년 2월 1일 월요일.
런던행 비행기가 둘을 태우고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