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여행 -1- >
비행기 안.
수한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139 레벨이 되어 있었다.
지구로 막 돌아왔을 때는 136 레벨이었는데?
더구나 체력과 위엄까지 1씩 상승을 해서, 이게 대체 뭔가 했다.
사실 짚이는 게 있었다.
수한은 자고 있는 새미를 훔쳐보다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영국 런던의 상공에 도착했다.
정확히 오후 3시 반.
새미가 눈을 반짝였다.
“어디부터 갈까? 템즈 강?”
“그게 좋을 것 같아. 볼 거 많다며. 타워브릿지도 보고, 빅벤이랑 대관람차 본 다음에 버킹엄 궁전까지 보면 저녁 시간 되겠다.”
“영국박물관은?”
“시간대가 애매하지 않을까? 내일 천천히 보자. 겨울이라 6시만 돼도 해 떨어지잖아.”
“아참, 맞아. 그 생각을 못 했어. 호텔에 짐도 풀고 하면 정말 시간 다 가겠다.”
“첫날은 그냥 쉬엄쉬엄 다니자.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응, 좋아.”
자유여행을 나온 참이었다.
비행기와 호텔만 예약해 놓고 발 닿는 대로 가는 여행.
“오빠! 저기 좀 봐!”
새미가 창밖을 가리켰다.
거대한 도시가 보였다. 회색 건물들이 빼곡히 차 있고, 커다란 강이 그 사이를 관통하여 굽이굽이 흘렀다.
런던.
수한은 고개를 삐죽 내밀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서울과는 다른 멋이 있었다.
곧 비행기가 런던 공항에 내려앉았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면서, 미리 맡겨두었던 무기를 돌려받았다.
“이능력자이십니까?”
심사대 요원이 서류를 보더니 눈을 깜빡였다.
“예. B급 이능력자입니다.”
“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영국에는 무슨 목적으로 오신 겁니까?”
“관광 목적입니다.”
“언제 돌아가시지요?”
“2월 4일에 프랑스로 떠납니다.”
요원은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수한은 능숙한 영어로 대답했다.
꽤 많은 질문을 한 요원이 호의어린 미소를 지었다.
“즐거운 여행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수한은 드워프 제 권총을 받아 허리춤에 찼다.
옆에서 심사를 받은 새미도 양 손에 장갑을 꼈다. 거의 24시간 갖고 다니던 물건이라 없으니 허전했던 것이다.
호텔에 짐을 풀었다.
여행은 즐거웠다.
약 2주 일정 중, 런던에서는 3박 4일을 보낼 예정이었다. 그 후 도버로 이동하여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간다.
처음에는 도버 해협 해저 터널을 이용해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새미가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보더니 반대했다. 해저 터널이어도 바다 속의 풍경은 볼 수 없으니, 그냥 배를 타고 가자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하자.”
3박 4일이 꿈결처럼 지나갔다.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알려진 곳은 거의 다 가본 것 같았다.
더구나 둘은 이능력자였다. 일반인에게는 개방이 안 되는 곳도 들어가 볼 수가 있었다. 수호자 연맹의 영국 지부나, 대전쟁 당시의 최대 격전지 같은 곳이 거기 해당했다.
마지막 날,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도버로 이동했다.
생각보다 멀었다.
버스를 탔는데 2시간 반이나 걸렸다.
새미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더니 수한에게 속삭였다.
“도버까지 120 킬로미터나 된대.”
“그래? 난 서울에서 인천 정도 거리인 줄 알았는데.”
120 킬로미터면 서울에서 세종시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고속 전철을 탈 걸 그랬을까? 유로스타를 이용했으면 런던에서 파리까지 고작 2시간이면 끝인데.
아냐, 그렇지 않다.
수한은 창밖의 이국적인 광경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같은 지구인인데도 서울과는 조금씩 다른 모습이었다. 옷, 생김새, 건축 양식 모두 그러했다. 당연히 비슷한 점이 훨씬 많지만, 세세히 뜯어보면 약간 달랐다.
이국적이다 못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외계 행성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낫지 싶었다.
버스가 도버에 도착했다.
도버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상아처럼 하얀 절벽이 저 멀리 보였다. 푸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하늘과 맞닿았다.
마침 배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부리나케 수속을 마쳤다. 미리 예약을 해둔 터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배에 탑승했다.
여기서도 무기는 맡겨 두었다.
이능력자에겐 어디서나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러나 몇 번 이능력자 범죄자가 하이재킹을 벌인 후, 이능력자라 해도 비행기나 선박에선 무기를 맡겨놓게 되었다.
둘이 배에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출발했다.
배 전체가 진동하더니, 천천히 항구를 벗어났다. 그러자 도버 항 특유의 하얀 절벽이 활짝 피어났다.
“새미야! 여기 서 봐!”
“사진 찍게?”
수한과 새미는 나란히 자세를 잡았다.
셀카봉에 스마트폰을 끼우고, 멋지게 사진을 찍었다.
배경도 좋고, 날씨도 화창해서 사진이 아주 괜찮게 나왔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다 좋았다.
“좀 춥지 않아?”
새미가 몸을 떨었다.
바닷바람이 맹렬하게 불고 있었다. 2월 초순이라 날씨가 무척 추웠다. 그 둘이 합쳐지니, 이건 무슨 칼날이 날아와 피부를 헤집는 것 같았다.
따뜻하게 껴입었는데도 냉기가 파고들었다.
수한은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그러게. 안으로 들어갈까?”
“아니. 바다 보고 있을래.”
새미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수한은 금방 새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뒤에서 다가가 새미를 껴안았다. 그제야 새미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한은 새미의 볼에 쪽 하고 입술을 맞췄다.
“어휴, 우리 자기 너무 어리광 부리는 거 아냐?”
“어리광 아니거든?”
배는 빠르게 남동쪽을 향해 달렸다.
영국 도버에서 프랑스 칼레까지는 기껏해야 34 킬로미터.
1시간 반이면 충분히 도착한다. 칼바람이 매섭긴 해도 둘 다 이능력자이니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갑판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몸을 떨다 하나둘 배 안으로 들어왔다. 그만큼 새로운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서, 갑판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약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남동쪽에서 배 한 척이 다가왔다. 수한과 새미가 탄 배만큼이나 큰 배였다. 두 배가 살짝 방향을 틀더니, 적당히 거리를 두고 스쳐지나갔다.
수한은 배를 구경하다가 곧 흥미를 잃었다. 다시 새미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그그그긍!
뭔가 단단한 물체끼리 마찰하는 것 같은 소리.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뭐야?”
“무슨 소리지?”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수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최소한 지금 탄 배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새미가 수한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방금 뭐였어?”
“모르겠어. 처음 듣는 소리였는데……”
그때, 또 그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짐승이 상처 입고 울부짖는 듯한 소리.
그걸 듣고서야 눈치 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방금 지나간 배를 주시했다.
이상하다.
일직선으로 잘 달리던 배가 갑자기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에 받히기라도 한 듯, 선체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수한의 눈이 커졌다.
수면 아래로, 언뜻 시커먼 뭔가를 본 것이다.
“저거 왜 저래?”
“어디 부딪친 거 아냐?”
“이 근처에는 암초 같은 거 없어.”
“도대체 뭐지?”
수한은 그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거대한 물고기.
수면 아래를 헤엄치다가 갑자기 배를 들이받은 것이다.
배를 자기 적이라고 생각한 모양.
물고기가 바다 깊숙이 잠수했다. 몸을 돌려 다시 수면을 향해 질주하는 게, 또 배를 공격하려는 것 같았다.
물고기의 길이는 약 20미터 정도.
도버 해협을 오가는 배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지만, 통상적인 생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변이체.
그것도 최소한 B급 변이체였다.
수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배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가만 놔두면 배에 탄 사람들이 몰살당하게 생겼다. 아무리 가까운 칼레 항에서 구조대가 출발해도, 변이체가 배를 침몰시키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모르면 몰랐을까, 눈앞에서 이 광경을 본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조용히 새미의 손을 잡았다.
의아해하는 새미에게 쉿! 하고 주의를 주었다. 새미는 영문도 모르고 입을 다물었다.
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사람들도 술렁이고 있었다. 소리가 들린 쪽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거나,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선원들이 심각한 얼굴로 무전기에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지만, 수한의 예민한 귀에는 모두 들렸다.
[세잔 호가 공격 받고 있답니다!]
[공격? 뭐한테? 레이더에는 아무 것도 안 잡혀!]
[모르겠습니다. 구조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도 알 수가 없답니다.]
[해경에는 연락했대?]
[칼레에서 이미 해경 헬기가 출발했는데,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답니다.]
자기들도 비상사태라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자세한 상황은 몰라도, 최소한 손 놓지는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 놓였다.
변이체 탐지기가 있다면 정체를 알아냈을 텐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오랜 평화 때문일까, 도버 해협은 변이체가 없는 지역이라 그런 걸까.
수한은 가장 가까이 보이는 승무원에게 다가갔다.
선원이 수한을 의식하고 무전기를 껐다. 친절한 미소가 잘생긴 얼굴에 떠올랐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방금 저 배가 세잔 호인가 보죠? 급합니다. 선장님 좀 뵙게 해주세요.”
수한은 속성 부여와 주시자의 눈을 동시에 발현했다.
선원만 볼 수 있게, 바싹 다가선 상태였다.
손에는 붉은 빛이 어리고 두 눈에서는 황금색 광채가 빛났다. 그걸 본 선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능력자십니까?”
“예. 저희 둘 다 이능력자입니다. 세잔 호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아, 예! 이쪽으로 오세요.”
선원이 둘을 데리고 날듯이 뛰었다.
선장실은 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가면서 무전기로 사정 설명을 한 터라, 선장과 일등 항해사 등 주요 요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그긍!
선장실에 들어가자, 또 아까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훨씬 더 커졌다.
창문을 통해 보니, 세잔 호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자칫하다간 이대로 침몰할 지도 몰랐다.
선장이 초조한 얼굴로 수한을 맞이했다.
“르누아르 호 선장 에드워드 로즐리입니다. 이능력자시라고요?”
“예.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지금 세잔 호는 변이체에게 공격 받고 있습니다.”
“변이체요?”
주위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선장이 곧 고개를 저었다.
“이 도버 해협에서는 변이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전쟁 때도 안전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변이체의 공격이라니요?”
“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새미가 갑자기 탄성을 터뜨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영어로 자기 생각을 설명했다.
“북해요. 도버 해협은 북해랑 연결되잖아요. 거기서 생긴 변이체가 여기까지 온 거 아닐까요?”
수한의 생각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그그긍.
또 그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수한은 다그치듯 말했다.
“일단 정체는 나중에 알아봐도 충분합니다. 지금은 저놈을 쫓아내거나, 잡는 게 우선입니다.”
“아, 그렇지요!”
어쩔 줄 모르던 선장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수한과 새미를 한 번씩 보더니,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등급이 어떻게 되시는 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전 B급 변조 계열 이능력자이고, 제 여자 친구는 A급 구현 계열 이능력자입니다.”
“A급!”
“세상에!”
대번에 둘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수한은 세잔 호를 힐끔 보고 말했다.
“일단 저희 무기 좀 찾아서 갖다 주세요. 맨손으로는 못 싸웁니다. 그리고 다른 이능력자 승객 있으면 그 분들에게도 연락을 하시고요.”
“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선장이 지시를 하자, 선원 중 한 명이 번개처럼 둘의 무기를 찾아 가져왔다.
드워프 제 권총과 푸른 수정이 박힌 흰 장갑.
수한은 권총과 총알을 챙기며 배 안에 실총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안타깝게도 가스총이 전부라고 해서 그만 두었지만.
그 잠깐 사이, 선장은 이리저리 전화를 했다.
아직 본인이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변이체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다면 해경에서 감당할 수가 없다.
투투투투투.
로터음과 함께, 프랑스 해경 헬기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