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여행 -2- >
수한과 새미는 급히 헬기에 올라탔다.
오면서 상황에 대하여 들은 것인지, 헬기 조종사가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변이체가 세잔 호를 공격한 겁니까?”
“예. 일단 세잔 호 쪽으로 접근합시다. 저랑 제 여자 친구 모두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니까, 변이체부터 처리하고 세잔 호에 가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헬기가 높이 날아올랐다.
때마침, 세잔 호가 또 공격을 받았다. 기우뚱 넘어가다가 원래대로 복원되는데, 선체 아래쪽이 형편없이 우그러들었다. 몇 번만 더 공격을 당하면 아예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바깥에서 봐서는 모르지만, 사실 안에서는 벌써 침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선명한 그림자가 세잔 호 옆에서 보였다.
조종사가 그것을 보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저, 저거!”
새미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거야? 엄청 큰데?”
“길이 20미터는 넘는 것 같아. 무게도 상당한 것 같고.”
“20미터? 지가 무슨 고래야?”
헬기가 조심스럽게 세잔 호를 향해 접근했다.
다가오는 헬기를 본 사람들이 창밖으로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공격받는 중이라 갑판으로는 나오지는 못하고, 빨리 구해달라는 것이다.
수한은 총알을 점검했다.
기껏해야 탄창 2개. 총알로는 30발.
아껴 써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총알이 부족해서 제대로 공격을 못할 수도 있었다.
헬기가 세잔 호 주위를 선회했다.
수한과 새미는 허리에 줄을 감고 헬기 바깥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수한은 주시자의 눈을 끌어올려 변이체가 그리는 궤적을 쫓았다.
“3시 방향에서 접근 중! 새미야, 준비해!”
“알았어!”
신중하게 권총을 겨눴다.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수면 아래 깊은 곳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변이체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수한에게만 똑똑히 보였다.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변이된 괴물.
방아쇠를 당기려다 손가락에서 힘을 뺐다.
아직 아니다.
헬기는 수면에서 40미터 위에 떠 있었다. 더구나 변이체는 수면 한참 아래에 있어서,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권총 사격 기술을 20으로 올린 지금도 그랬다.
변이체가 세잔 호를 공격하는 순간을 노려야겠다.
수한이 옆에 있는 새미에게 속삭였다.
“내가 유도 속성으로 먼저 공격할게. 변이체 몸에서 빛이 나면 바로 공격해. 알았지?”
“응.”
새미도 긴장되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장갑에 박힌 수정에서 타닥타닥 번갯불이 타올랐다.
변이체가 빠르게 솟구쳤다.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급가속하더니, 공간을 관통하며 그대로 세잔 호를 들이받았다.
쿠구구구궁!
그게 치명타였다.
불길한 소리가 세상 전역으로 울려퍼졌다.
철판이 찢어졌다.
우그러들다 못해 완전히 구멍이 뚫렸다. 바닷물이 콸콸콸 선체 안으로 쏟아졌다. 세잔 호가 한쪽으로 천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재앙을 직감한 승객들이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신이시여!”
그때, 수면에 얼핏 검은 형체가 보였다.
세잔 호를 공격하느라 수면 가까이까지 변이체가 접근한 것이다.
수한의 눈이 빛났다.
방아쇠를 당기자, 총성이 세상을 관통했다.
단 한 발.
변이체의 방어막을 뚫고, 등에 박혔다.
총알에 부여된 힘이 활짝 피었다.
희끄무레한 빛이 변이체의 전신을 감쌌다. 그 빛 때문에, 수면 아래건 어디건 확 눈에 들어왔다.
새미가 두 손을 흔들었다.
천둥이 쳤다.
흰 번개가 수십 가닥이나 내리꽂혔다.
무차별적으로 번개를 떨어뜨리는데, 그 번개가 모조리 변이체를 직격했다.
방어막?
순식간에 으깨져버렸다.
전깃불이 변이체를 간단히 구워버렸다.
김이 모락모락났다.
변이체가 부들부들 떨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생명력이 질기긴 질겼다. 그 무시무시한 새미의 공격을 뒤집어쓰고도 아직 살아 있었다.
수한은 변이체의 머리에 겨눴다.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기자, 총알에 담긴 힘이 두개골을 산산조각내고 뇌를 엉망으로 휘저었다.
여기까지 오면 아무리 변이체라도 견딜 수 없다.
몇 번 더 퍼덕이더니, 완전히 축 늘어졌다. 배를 까뒤집은 채 둥둥 떠다녔다.
수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성공이다.
더구나 바로 근처에 세잔 호가 있는데 그곳으로 흘러들어가지도 않았다. 유도 속성이 박힌 변이체만 타격하고, 새미가 손을 젓자 그 힘이 다해 저절로 소멸되었다.
공격력과 정확도 모두 만족스러웠다.
이능 인증을 받고 새미와 다니면서 구상했던 합동 공격이 훌륭하게 통한 것이다.
오래 기뻐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헬기가 빠르게 세잔 호를 향해 접근했다. 세잔 호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더니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수한과 새미는 허리의 줄을 풀고 갑판 위로 뛰어내렸다.
사람들이 둘에게 몰려들었다.
배 안에 갇혀서 죽음의 공포를 맛봤던 사람들이었다. 둘을 둘러싸고 뭐라고 말하는데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수한이 박수를 쳐 시선을 집중시켰다.
“잠시만 조용히 해주세요! 여러분을 공격하던 변이체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젠 안전합니다!”
“변이체? 이게 무슨 말이야?”
“변이체가 공격한 거였어?”
“저기 봐! 변이체 시체가 있어!”
세잔 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변이체 시체가 떠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겨우 침착해졌다. 맥이 풀렸는지 제자리에 주저앉는 사람도 보였다.
수한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다친 분 없습니까? 곧 구조선이 도착하겠지만, 응급 환자 있으면 먼저 보내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때, 갑판의 문으로 선원들이 승객 몇 명을 부축하고 나왔다.
선원들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 부상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부터 얼른 태워 보냅시다.”
헬기에 타고 있던 구조대원들이 그들을 헬기에 실었다. 일단 급한 부상자만 데리고 헬기가 먼저 떠났다.
다른 사람들은 세잔 호에 있던 구명보트를 폈다. 고정시킨 것을 풀고 발로 차자, 보트가 바닷물 속에서 저절로 펴졌다. 선원들의 인도에 따라, 수백 명의 승객들이 보트에 탔다.
근처에 있던 르누아르 호가 천천히 다가왔다. 멀찍이에서도 군함과 해경 순찰선이 달려오는 게, 이제 한 시름 놔도 되지 싶었다.
배가 침몰 중이긴 하나, 제대로 서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덕에 구조와 탈출 모두 순조롭게 이뤄진 것이다.
세잔 호의 선장이 수한과 새미에게 악수를 청했다.
“감사합니다. 두 분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세잔 호의 선장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뭘요. 빠진 사람은 없습니까?”
“예. 저희가 전부 확인했습니다. 세잔 호에 탑승했던 203명 모두 무사합니다.”
“휴, 다행입니다.”
“제가 이 해협을 오간 지가 20년이 넘는데,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변이체가 출현할 줄은 몰랐습니다.”
“점쟁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래도 선장님께서 대처를 잘 하셔서 피해가 이 정도에서 그친 것 같습니다.”
“두 분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 어디 제가 잘 해서 그렇겠습니까?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윽고 모두 세잔 호를 탈출했다.
수한과 새미, 선장이 가장 마지막에 나왔다. 해경 순찰선에 옮겨 탔는데, 해경들이 사정을 듣더니 수한과 새미 앞에 절도 있게 정렬했다.
“일동 차렷, 경례!”
해경들이 일사불란하게 경례를 올려붙인다.
수한과 새미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두 분 덕분에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꼭 저희만이 아니라, 누구든 그때 저희 같은 상황이었으면 저희와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목숨을 거는 일인데, 그게 쉽겠습니까? 프랑스 전 국민과 유럽 연합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지휘관이 다가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하도 금칠을 해서,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나 보다.
갑자기 경보음이 울렸다.
왜애애애앵!
든든하게 서 있던 프랑스 해경들의 얼굴에 얼핏 당황한 빛이 스쳤다.
수한이 고개를 홱 돌렸다.
불길한 느낌이 수한을 자극하고 있었다.
주시자의 눈을 최대한으로 사용하자, 먼 곳에서 시꺼먼 것들이 헤엄쳐 오는 것이 보였다.
변이체들.
그것도 B와 C급의 변이체들이었다. 몸을 감싼 방어막 때문에, 현대 병기만으로는 효율적인 대처가 불가능하다.
수한이 그들을 보는 것과 동시에 경고 방송이 나왔다.
[3시 방향에서 다수 변이체 출현! 3시 방향에서 다수 변이체 출현! 곧 조우합니다!]
“뭐? 이런, 모두 전투 준비!”
지휘관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해경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줄을 지어 무기고로 뛰어갔다. 권총 정도는 장비하고 있지만, 비상시를 대비한 중화기는 무기고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하여 해군 군함이 앞으로 나섰다.
포탑이 돌아가며 대포가 3시 방향을 조준했다. 미사일 발사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능력자들도 있었다. 특유의 화려한 무기를 찬 채 헬기에 탑승했다. 정확히 네 명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수한이 보기에 C급과 D급 정도에 불과했다.
저들만으로는 변이체 떼를 막을 수 없다.
해경의 지휘관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탐지기에 나타나는 변이체들의 등급이 이능력자들과 비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수한과 새미를 찾아왔다.
“면목이 없습니다만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만으로는 대처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죠. 소총 1정만 내주세요.”
“소총이요?”
“예. 전 속성 부여 능력을 갖고 있어서 일반 소총으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드리겠습니다.”
해군 헬기가 해경 순찰선으로 날아왔다.
길게 줄사다리를 늘어뜨리자, 수한은 새미를 안고 사다리를 올랐다. 헬기 안으로 들어가자 프랑스 인 이능력자들이 둘을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C급 이능력자 가브리엘 뒤퐁입니다.”
“조에 마르텡이라고 해요. 얘기는 들었어요. 감사해요.”
헬기가 변이체 떼를 향해 움직였다.
수한은 프랑스 인 이능력자들을 살폈다.
넷 중 셋은 근접 무기를 들고 있었다. 겨우 한 명만 활을 들었는데, 수한이 보기엔 D급 정도인 것 같았다.
“혹시 원거리 공격 가능하신 분 계십니까?”
프랑스 인 이능력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활을 든 이능력자만 손을 들었다.
그러더니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얼음 화살 생성 이능을 가지고 있어요. 이능 등급은 D급이지만, 도움이 될 거예요.”
아하.
얼음 화살을 생성시켜 그걸 이능력자 전용 활로 날리는 모양이다. 그럼 D급이긴 해도, C급 이능력자 못지않은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해야 한다.
수한은 이능력자들에게 말했다.
“저는 B급 변조 계열 이능력자이고, 제 여자 친구는 A급 구현 계열 이능력자입니다. 저희가 일을 주도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변이체의 수가 많고, 등급도 높으니 원거리에서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방식은 간단했다.
수한이 유도 속성으로 변이체를 표시하면 새미와 활을 든 이능력자가 공격하기로 했다.
육지였다면 다른 세 이능력자도 할 일이 있었겠지만 이곳은 바다 위였다. 괜히 바다에 빠져 위험을 자초하느니 헬기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게 나았다.
변이체들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 세잔 호를 공격했던 변이체와 비슷하게 생겼다. 크기도 그러했다. 큰 놈은 20미터가 넘어가고, 작은 놈도 15미터 정도는 되었다.
“뿌우우!”
한 녀석이 수면 위를 달리다 머리의 구멍으로 기묘한 소리를 냈다.
물줄기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돌고래나 범고래에서 변이된 모양.
수한은 소총을 겨눴다.
프랑스 제식 소총. 급탄과 격발이 총의 뒤쪽에서 이뤄지는 불펍 방식으로 만들어진 소총이었다.
그 형태가 다소 생소하긴 하지만, 부사관 시절 불펍 방식 총을 몇 번 다뤄본 적이 있었다. 손에 익은 대한민국 제식 소총만큼은 아니어도, 저렇게 큰 변이체를 명중시키는 것은 쉬웠다.
충분히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사격을 개시했다.
탕! 타탕! 탕!
단발로 끊어 쐈다.
변이체 중 절반 이상이 수한의 사격에 맞았다. 옅은 빛이 그들을 감싸자, 변이체들의 위치가 훤하게 드러났다.
다음은 새미 차례.
새미의 손에서 발현된 번개 폭풍이 변이체들을 강타했다.
A급에 오른 뒤 부쩍 강해진 새미였다. 말 그대로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그 막강한 위력을, 프랑스 인 이능력자들도 공격을 하다 말고 멍하니 보고 있었다.
변이체 십여 마리가 일격에 무력화되었다.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며 수면으로 떠오르는데, 개중 운 좋게 새미의 공격을 피한 몇 마리가 있었다.
“쿠으으!”
놈들이 세찬 기성을 질렀다.
수면을 박차고 헬기를 향해 뛰어올랐다.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수면에서 적어도 50미터는 넘게 떨어져 있는데, 그 높이를 무시하고 순식간에 다가온 것이다.
짧은 비명이 터지지만, 수한은 코웃음을 쳤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