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87화 (88/254)

< 이름을 모르는 행성 -1- >

차원문을 넘었다.

슬슬 익숙해지는 감각과 함께, 새로운 곳에서 눈을 떴다.

세라프의 전당은 지구와 똑같았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니,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움막촌이었다.

녹색 풀을 엮어 만든 허름한 움막이 세라프의 전당을 둘러싸고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고통스럽게 앓는 소리가 귀 안으로 파고들었다.

수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낯익은 장면이었다.

대전쟁 당시가 이러했다. 처음에는 체육관이나 학교 같은 시설에서 노숙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것도 없어 거적때기 하나만 덮고 자기도 했다.

새미가 수한의 손을 붙잡았다.

ATV에 탄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외계인들이 두려운 눈으로 원정대를 보았다.

초록색 피부에, 눈이 달걀처럼 컸다. 코는 구멍만 뚫렸고 벌어진 입 사이로 뾰족한 치아가 보였다. 손가락 발가락은 네 개였고, 귀 대신 더듬이처럼 보이는 게 몇 가닥 늘어져 있었다.

모두 헐벗은 상태. 잘 입고 있다고 해봐야 누더기 한 벌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세라프의 전당 옆에는 나무로 지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허름하긴 해도, 제법 크게 지어 놓은 건물이었다.

일단은 정보 수집이 먼저.

석구가 여울을 데리고 나무 건물로 다가갔다.

그러자 건물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둘을 경계하며 창을 내밀었다. 이능도 뭣도 깃들지 않은, 그냥 금속제 창이었다.

여울이 뭐라고 말을 걸자, 경비병들의 초록색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놀라서 허둥지둥 대다가, 한 명은 자리에 남고 한 명이 급히 안에 들어갔다.

새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지?”

“텔레파시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 이능에 대해 잘 모르면, 저럴 수도 있지.”

“하긴 우리 지구도 예전에는 그랬으니까.”

경비병이 곧 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둘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동안 원정대는 나무 건물 앞에서 기다렸다.

작은 공터가 있어 불편하진 않았다. 경비병이 할 말이 참 많은 얼굴로 원정대를 바라보았지만, 지레 겁을 먹고 제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석구와 여울이 돌아왔다.

그런데 표정이 좀 묘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흠, 이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안 좋다고 해야 할지…… 이 근처에 변이체가 아주 많다고 합니다. B급이나 C급은 널려 있고, A급과 AA급도 좀 있는 것 같아요.”

“그거 잘 됐네요.”

“우리 팀 전력이면 AA급도 충분히 잡잖아요. 오랜만에 돈 좀 만지겠는데요?”

“그런데 안 좋은 소식도 있어요. 기계 괴수도 몇 마리 있다고 합니다.”

“기계 괴수요?”

“예. 그것들 잡으려고 세라프 종족도 그것들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고요.”

원정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특수 원정팀의 전력은 아주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계 괴수를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잘못 하다가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질 수도 있는 일.

계장 하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최소한 허탕은 치지 않겠네요.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건진 것도 없이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겠습니다.”

“그야 그렇죠.”

“갑자기 작년에 예르니아 행성 갔던 일이 생각나네요.”

“듣기만 해도 끔찍하니까 그 얘긴 하지 마요.”

일단 진지를 꾸리기로 했다.

마을 밖으로 나왔다.

북동쪽.

마을의 남서쪽에 기계 괴수들이 몰려 있었다. 세라프 종족도 거기 머물면서, 일진일퇴 공방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그쪽에 기계 괴수 시체도 좀 있다는 정보는 얻었는데, 괜히 접근했다가 전투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조금 먼 곳에서 사냥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쿠웅! 쿵!

ATV를 타고 이동하는데, 멀리서 둔중한 폭음이 울렸다.

수한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 위로 청색과 적색의 빛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기계 괴수와 세라프 종족이 한 판 붙은 모양이다. 충격파가 날아들어 흰 구름을 찢고, 가끔 땅도 얕은 진동을 일으켰다.

잠깐 멈춰 서서 그걸 구경했다.

“심각하네.”

“저쪽으로는 발도 안 들여놔야 되겠어요.”

“모두 조심합시다.”

마을 주변은 낮은 구릉지로 이뤄져 있었다.

제법 큰 강이 인근을 흘렀다. 그 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그러자 윗부분이 싹둑 잘려나간 것 같이 보이는 산이 하나 나타났다.

바로 얼마 전 기계 괴수가 세라프 종족에게 당해 쓰러진 곳이었다. 자연히 막대한 양의 X-0가 흘러나왔고, 그로 인해 변이체들이 창궐하고 있었다.

산의 초입에 진지를 세웠다.

고위 변이체가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온갖 안전 장비는 다 설치했다. 초소도 높게 설치하고, 기관총도 거치해 놓았다.

정찰을 할 것도 없었다.

멀찍이 B급 변이체 한 마리가 진지를 살펴보고 갔다.

오랑우탄을 닮은 변이체였다. 그런데 덩치가 불곰보다 컸다. 언뜻 눈이 마주쳤는데, 교활한 빛이 눈동자에 감돌고 있었다.

“곧 공격해 올 것 같네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수한씨가요? 괜찮겠습니까?”

“저 정도 변이체 처리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죠. 저한테 맡기세요.”

수한은 초소 위로 올라갔다.

둘러메고 온 저격총은 초소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초소에 거치된 기관총을 잡았다.

탄띠를 연결시켜놓고 변이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산 초입에 무수히 돋은 수풀들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지만, 수한의 예리한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군림자의 눈을 사용하여 수풀 안쪽을 살폈다.

아까 그 변이체였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조용히 접근하고 있었다. 덩치는 큰데, 바닥을 벅벅 기고 있어 우스우면서도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그만큼 지능이 높다는 소리니까.

수한은 짐짓 딴청을 부렸다. 모든 정신을 놈들에게 쏟고 있으면서도 다른 곳을 보는 척 했다.

변이체들이 진지 근처까지 접근했다.

더 이상은 몸을 숨길 곳이 없다.

진지의 동태를 살피더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크아앙!”

“크아!”

쓸데없는 짓.

수한은 기관총을 겨누고 총알을 쏟아 부었다.

B급 이능력자일 때도 동급의 변이체들은 마음껏 학살했던 수한이었다. A급 이능력자가 된 지금은 정말 쉬웠다. 관통 속성과 파괴 속성을 조합하고 방아쇠를 당기자, 변이체들이 폭풍 앞의 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수한은 초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몇 마리는 용케 살아 있었다. 어기적대며 산을 향해 도망쳤다. 덩치가 덩치인지라, 속도가 제법 빨랐다.

그래 봤자 독사 앞의 생쥐 신세다.

기관총을 정조준하고 단발로 쏘았다.

붕괴 속성을 부여한 상태. 도망치던 놈들의 몸이 간단하게 허물어졌다.

옆에 놔둔 저격총을 집어 들었다.

유난히 무성하게 수풀이 우거진 곳을 향해 한 발을 쏘았다.

“키아악!”

비명이 울렸다.

아까 원정팀 진지를 정찰하고 갔던 변이체.

그놈이 숨어서 수한에게 변이체들이 학살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그걸 놓치지 않은 것이다.

수한은 주변을 샅샅이 살핀 후 저격총을 내려놓았다.

혹시나 해서 밖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화력이 장난 아니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대단하네요.”

“수한씨만 그런 게 아니라 속성 부여 이능력자는 거의 다 저래요. 총알만 있으면 무시무시합니다.”

원정팀의 지원 요원들이 달려가 심장을 적출했다.

정확히 35마리.

이번 한 건으로 수백억의 매출을 올린 것이다.

수한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새 같은 것들이 원정팀 진지 상공을 오락가락 날아다니고 있었다.

시체 냄새를 맡고 온 듯했다.

지원 요원들이 시체를 한 곳에 모아 태웠다. 몇 마리가 접근하려고 하자, 수한이 기관총을 쏘아 떨어뜨렸다. 하잘 것 없는 D급 변이체라 심장도 꺼내지 않고 그냥 불살라 없앴다.

“변이체가 많긴 많네요.”

“고위 변이체는 대부분 산 정상에 있지만, 가끔 산 아래까지 내려오기도 합니다. A급 변이체가 출현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며칠 동안은 진지에 머물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구역을 침범 당했다고 생각한 변이체들이 계속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오랑우탄을 닮은 변이체가 아주 기승을 부렸다.

처음에 학살한 것은 좋았는데, 그 이후에는 은밀하게 공격을 했다.

달이 없어 칠흑 같은 밤에 몰래 독을 품은 하급 변이체를 풀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시끄러운 악기를 연주해 잠을 못 자게 만들었다.

보이는 족족 이마에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뭔가 수를 내야 되겠는데요?”

“이것들은 무리 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거의 백 마리는 잡은 것 같은데.”

드론을 날려 놈들의 소굴을 찾으려고 했다.

실패했다. 하늘을 날던 비행형 변이체가 드론을 부숴버렸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숲이 울창해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

탐사대 겸 변이체 토벌대로 작은 팀을 꾸렸다.

AA급 이능력자 1명, A급 이능력자 3명, 지원 요원 5명이 포함된 팀.

수한과 새미도 그 팀에 속했다.

산에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ATV를 몰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보급품을 짊어지고 들어갔다.

수한은 산을 보며 말했다.

“식물형 변이체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조심하세요.”

“식물형이라……”

“오랜만이네요. 식물형은 보기 힘든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숲이 아주 울창했다. 하늘에 해가 높이 떠있는데도, 하도 수풀이 우거져 있어 좀 어두컴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얼마간 걷자, 정체 모를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새미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몸을 움찔거렸다.

수한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변이체들이에요.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언제쯤 공격할 것 같습니까?”

“아직은 그런 기색이 안 보이네요. 공격할 것 같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한은 황금색 눈을 번뜩였다.

군림자의 눈 덕에 변이체들의 위치가 훤히 보였다. 자기들 딴에는 숨었다고 숨었지만, 2차 진화를 끝낸 군림자의 눈 앞에선 무력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변이체들의 소굴.

수한은 강을 따라 올라갔다. 무리 생활을 하는 변이체니, 물 근처에 소굴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변이체들의 시선이 집요해졌다.

방향이 맞은 모양이다.

수한은 변이체들에게 느껴지는 기운을 가늠해 보았다.

“곧 공격해 올 것 같습니다. 모두 준비하세요.”

“예.”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강은 어느새 시냇물이 되어 있었다.

변이체들이 일행을 둘러싼 까닭에, 다른 하급 변이체들은 공격해오지 않았다. A급 변이체를 만날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여태까지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고.

산 중턱, 작은 계곡이 하나 나왔다.

입구가 좁고 안은 넓었다. 커다란 동굴도 몇 개 보였다.

동굴 앞을 변이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원정팀을 공격했던 덩치 큰 녀석과 덩치가 좀 작은 녀석이 섞였다. 어떤 변이체는 외모가 확연히 다르기도 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이 변이체들이 같은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변이체의 소굴.

수한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여길 박살내 버리면 더 이상 귀찮게 못하겠지.

“크아앙!”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변이체들이 달려들었다.

부질없는 짓.

수한 혼자서도 학살하는 게 가능한 터였다. 다른 이능력자들까지 힘을 합치니,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이것들의 심장을 빼낸 후 불을 붙였다.

계곡 안 소굴에서도 변고를 알아차렸다.

칵칵거리며 부산을 떨더니, 우락부락한 변이체들이 계곡 입구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변이체들이 뭔가 이상한 것을 들고 왔다.

커다란 원통형의 무엇.

그 정체를 알아본 수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새미가 깜짝 놀라 손가락질을 했다.

“오빠, 저거 봐!”

“맙소사, 광선포잖아?”

“피해요!”

원통형 물체의 앞에 청색 빛이 맺혔다.

모두 혼비백산하여 몸을 피할 때, 수한은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변이체 중간에서 터졌다. 강하게 폭발하며, 화염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 바람에 변이체들이 광선포를 놓쳤다.

때마침 푸른 빛줄기가 튀어나갔다.

형편없이 빗나갔다. 계곡 옆의 나무들만 으스러뜨리며 지면에 처박혔다.

변이체들이 허겁지겁 광선포를 들었다.

너무 늦었다. 이미 총알이 그들의 머리를 관통한 뒤였다.

수한은 느긋하게 탄창을 갈았다.

다른 사람들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수한씨 배짱이 좋네요.”

“피하는 것보다 맞춰서 떨어뜨리는 게 쉬우니까요. 모두 조심하세요. 여기 변이체들은 어떻게 된 게 기계 괴수 부품도 써먹나 보네요.”

“동력원이 남아 있었던 걸까요? 어떻게 작동한 건지 모르겠네요.”

“일단 저놈들부터 잡고 생각합시다.”

주위를 경계하며 접근했다.

변이체들이 기계 괴수 부품을 이용해 응전했다.

미사일 탄두를 끝에 매단 창을 투창처럼 던졌다. 폭탄 꾸러미를 묻어 두었다가 폭발시키기도 했다.

몇 번 위험한 상황이 있었지만 다들 잘 넘겼다.

동굴 앞까지 도착했다.

“크아악!”

안에 숨어 있던 변이체들이 바들바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이미 전투력을 가진 고위 변이체는 모두 죽었다. 남은 것은 방어막도 없는 D급, E급 변이체들뿐이었다.

덩치가 작은 게 모두 새끼들 같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베풀 자비 같은 것은 없었다.

지능이 높은 변이체였다. 살려줘 봐야 나중에 복수하겠다고 찾아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지원 요원들이 나섰다. 총을 들어 모조리 쏴 죽였다.

시체들을 몽땅 불사른 뒤, 계곡 안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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