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을 모르는 행성 -2- >
뭔가 위험한 것은 없었다. 개울이 한쪽을 흐르고, 식용으로 쓸 과실나무도 몇 개 보였다. 동굴은 제법 깊고 넓어서 보금자리로 써먹기 적당했다.
“진지를 여기로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물도 있고, 방어하기도 쉽고…… 여기가 좋겠네요. 그런데 짐을 어떻게 옮기죠?”
“아, 그 문제가 남아 있네요.”
“제가 ATV가 이동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없으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저희는 가져온 천막 치고 있겠습니다. 일단 여기를 우리 야영지로 삼지요.”
“좋습니다.”
지원 요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가져온 천막을 치고, 탐지기를 설치했다. 한 명은 무전기에다 대고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했다.
수한은 새미와 함께 계곡 밖으로 나갔다. 원래는 혼자 돌아보려 했는데, 위험하다며 부득불 따라붙은 것이다.
인근에는 신기할 정도로 변이체가 없었다.
아까는 왜 그런지 몰랐지만, 이제는 이유를 알았다.
계곡을 차지하고 있던 변이체들이 몽땅 몰아낸 모양이었다. 광선포도 있으니, A급이나 AA급 변이체도 함부로 다툴 엄두를 못 냈겠지.
광선포를 비롯한 기계 괴수 부품을 확인했다.
충전식이었다. 잔량이 꽤 남아 있었다. 여차하면 원정대도 써먹는 게 가능했다.
그 다음에는 지형을 살폈다.
“이거 ATV가 올라올 수 있을까?”
“모르겠어. 나무 몇 그루 베면 될 것 같은데……”
몇 번 돌아본 끝에, 적당한 길 하나를 찾았다.
일단 밤은 계곡에서 보냈다.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내려갔다. 원정팀과 함께 계곡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에는 사냥의 연속이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변이체를 잡았다. 계곡 한쪽에 변이체 시체와 심장이 그득하게 쌓였다. 하도 많이 잡아서, 가져온 차단막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번 원정은 대박이네요!”
“항상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수한도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
200레벨.
새로운 초능이 개발되는 것이다.
정확히 5번째였다. 그렇다면 8일이 지난 다음 개발이 완료될 가능성이 높았다.
수한은 벌써부터 새로운 초능을 고르기 위한 고민에 빠졌다.
뭘 고르지?
공격 쪽에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방어 능력도 이만하면 훌륭하다. 보조 능력도 초능 폭발이 있어서 지금 당장 다른 게 필요할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다.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수한이 200레벨이 되고 약 1주일이 지났다.
남서쪽 하늘에 연거푸 붉고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하루에 두세 번 정도 저런 현상이 벌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30분에 한번 꼴로 부딪치고 있었다. 더구나 거리도 가까워져서, 그 여파가 더 세게 밀려왔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석구가 그걸 보더니 말했다.
“오래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계 괴수들이 움막촌을 향해 접근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죠? 지금 바로 철수할까요?”
벌 만큼 벌었지만, 이걸로는 좀 미진한 감이 있었다.
이래서야 일반 원정대와 다를 게 없지 않나.
타이탄 공격대는 대한민국 최고의 공격대이고, 원정 1팀은 그 중에서도 최정예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돈은 많이 벌겠지만 선발대로서의 목적 달성에는 실패하는 셈.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라고 할까.
석구가 팀원들을 보고 말했다.
“일단 이곳을 전진기지 삼아 산 정상까지 올라가 봅시다. 변이체도 잡고, 기계 괴수 부품 남은 거 있으면 그것도 수거한 다음에 상황을 보도록 하지요.”
“남아 있는 게 있을까요?”
“동력핵은 세라프 종족이 빼갔겠지만 조금은 남았을 겁니다. 그러니 이 계곡에 있던 변이체들이 광선포도 들고 다녔겠지요.”
원정팀을 절반으로 쪼갰다.
소수 인원을 계곡 야영지에 남겼다. 이능력자도 좀 포함되어 있어서 변이체들로부터 충분히 야영지를 방어할 터였다.
도보로 산을 올랐다.
산 중턱을 넘어가자, 본격적으로 변이체들이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조심하세요!”
나무들이 가지를 휘둘렀다.
쇠갈고리처럼 끝이 변형되어 있었다. 거기다 중간은 낭창낭창해서 채찍처럼 현란하게 공격을 했다.
새처럼 생긴 변이체들이 날아들고, 땅 아래에서도 변이체들이 튀어나왔다.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해오니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한 가지 어이가 없는 것은, 일행을 공격하다 말고 자기들끼리도 싸움이 붙었다는 점이다. 서로를 잡아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죄다 머리에 바람구멍이 뚫렸다.
혼돈의 도가니를 헤쳐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
커다란 분화구처럼 생긴 지형이 나타났다.
멀리서 보면 완만한 U자 형태로 파인 상태. 기계 괴수와 세라프 종족이 싸우면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던 곳이었다.
수한은 고글을 매만졌다.
미약하게 X-0가 검출되고 있었다.
석구가 손짓을 했다. 몇 명은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몇 명은 특수 장신구를 작동시켰다. 수한과 새미도 노르헤임 행성에서 얻은 정화석과 정화 망토를 사용했다.
수한은 군림자의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눈을 감싸고 있는 수정 렌즈와 공명하여, 땅속에 있는 물건들의 형체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수한은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금속이 좀 묻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수한씨 이능은 참 다방면으로 쓰이네요.”
일행은 수한이 가리킨 쪽으로 움직였다.
야삽으로 땅을 팠다.
과연 기계 괴수의 부품이 꽤 나왔다. 대부분이 그저 금속 조각이어서 기대만큼 값어치가 있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수한을 채근했다.
“수한씨, 뭐 없어요?”
“잠깐만요. 좀 찾아볼게요.”
“투시 계열 이능력자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네요.”
산 정상에는 기계 괴수의 부품이 얼마 없었다. 수한이 발견한 곳을 몽땅 팠지만, 기껏해야 ATV 반 대 분량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쳤다.
차라리 계곡에서 얻었던 광선포 1문이 더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 부산을 떨며 돌아다녀서일까.
분화구 외곽에 거대한 변이체들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멀리 자리를 잡고 분화구를 헤집고 다니던 일행을 관찰했다.
AA급 변이체들이었다.
무려 다섯 마리.
종류도 다양했다.
뱀, 새, 곰, 원숭이, 살쾡이.
지금까지 원정팀은 AA급 변이체를 세 마리나 잡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이 남아 있던 것이다.
새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내 눈이 잘못된 거 아니지?”
“응. 아냐. 신기하네. 저런 식으로 변이할 수도 있나……”
다섯 마리 변이체의 몸이 좀 희한했다.
다른 변이체들처럼 육체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기계 괴수의 부품이 몇 개씩 끼어 있었다.
눈 사이에 광선포가 박혀 있거나, 등에 미사일 발사대를 달고 있고, 숨을 쉴 때마다 독가스가 살포되는 식이었다.
이제 보니 저것들이 기계 괴수 부품을 가져갔나 보다.
석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돌아갑시다. 1마리씩이라면 모를까, 5마리 전부는 상대할 수 없어요.”
일반적인 변이체와 다른 것으로 보아 더 강할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S급 변이체가 되기 전 단계일 지도 모르고.
일행은 한데 뭉쳐 천천히 물러났다.
“캬악!”
새를 닮은 변이체가 위협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 눈이 일행이 챙긴 금속 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건 놔두고 가라는 것 같다.
돈으로 얼마 하지도 않을 터. 미련 없이 내버렸다. 그리고 변이체들을 경계하며 올라왔던 길로 향했다.
변이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금속 조각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간다.
못 참겠다는 듯 새를 닮은 변이체가 몸을 날렸다. 그러자 뱀을 닮은 변이체가 눈 사이의 광선포를 쏘았다.
슈웅, 쾅!
변이체들끼리 싸움이 붙었다.
원정팀은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괜히 근처에 있다가 휘말리면 골치 아팠다.
“저거 어떻게 어부지리를 노릴 수 없을까요?”
팀원 중 한 명이 미련을 못 버리고 말했다.
석구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보셨죠? 변이체들이 저희 경계하는 거. 저희가 물러난 다음에야 자기들끼리 싸우잖아요. 우리가 공격하면 다시 뭉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 변이체들은 어째 지능이 다 높네요.”
“이곳 행성에 사는 생물들 대부분이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 쯤 지나면 이행성도 볼 만 하겠어요.”
계곡으로 내려왔다.
다섯 마리의 변이체가 기계 괴수 부품을 탐낸다는 것을 안 이상, 이곳에서 더 볼 일은 없었다.
이만 철수하기로 했다.
계곡 야영지를 철거했다. ATV에 최대한 짐을 실었는데, AA급 변이체를 3마리나 잡은 상태다 보니 A급 변이체에게서 심장만 뽑고 나머지는 불태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B급도 아니고, A급 변이체 시체를 버리게 될 줄이야.
그렇게 한 다음에야 겨우 출발했다. 하도 많은 짐을 실어서 ATV들이 계속 흔들렸다.
돌아가는 길에는 변이체들이 꽤 덤벼들었다.
원정팀이 계곡을 차지하고 얼마나 지났다고 변이체들의 영역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좋았다.
수한은 초능창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드디어 개발이 끝났다.
수한은 정신 감응을 골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울과 시예를 보니 정신 계열 초능의 필요성이 느껴졌던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와 대화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매력적인 점은, 나중에 진화시켰을 때 즉각적인 의사 교환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었다.
수한은 정신 공격에 대해선 방비가 안 되어 있는데, 그에 대한 방어 능력이 생긴다는 점도 좋고.
아직 레벨이 낮고 진화도 못 시켜서 근거리에서 의사소통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나중에 힘의 결정으로 진화시키면 쓸 만 해질 것이다.
움막촌으로 돌아왔다.
이 행성의 시간으로 약 열흘만의 귀환.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묘하다.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애가 우는 소리, 악다구니를 부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는데 이젠 그마저도 없었다.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행성인들도 퀭한 눈을 하고 멀거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행성인들의 수도 상당히 줄었다. 열흘 전과 비교하면 삼분지일도 안 되는 듯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꾸웅, 쾅!
번개가 쳤다.
남서쪽 하늘에서 푸르고 붉은 빛이 번뜩였다. 서로 엉겨붙었다가 떨어지고, 다시 마주치며 섬광을 줄기줄기 뿜었다.
그걸 보자 알 수 있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전투의 여파가 움막촌까지 영향을 미쳤다. 움막 하나가 흔들리다 주저앉아 버리고, 한쪽에 쌓아둔 장작더미가 요란한 소릴 내며 무너졌다.
행성인들이 원독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
“%^$^%*&!”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 안에 서린 비탄과 절망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기계 괴수에게 삶의 터전을 잃고, 도망치고도 도망쳤건만 코앞까지 쫓아온 상황.
이제는 달아날 기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수한은 안타까운 눈으로 행성인들을 바라보았다.
10년 전의 자신과 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절망뿐이던 그때.
세라프 종족의 개입과 종족 연합의 원조가 아니었다면 진작 굶어죽었겠지.
수한만이 아니라, 지구 인류 중 상당수가.
“세라프 종족이 밀리나 봅니다.”
석구가 남서쪽을 보며 말했다.
전투가 격렬해지고 있었다.
벌써 수십 분이 넘어갔다. 섬광이 번뜩이고 폭음이 터졌다. 지금껏 이랬던 적은 없어서, 주변 행성인들이 불안에 떨었다.
심지어 기계 괴수들과 세라프 종족의 모습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세라프 종족은 둘.
기계 괴수는 셋.
중앙에 선 기계 괴수가 유독 컸다. 움직이는 산을 보는 것 같았다. 네 개의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두 개의 팔을 휘둘렀다. 팔 끝에 달린 거대한 광선 칼날이 쉬지 않고 허공을 난도질했다.
세라프 종족은 어지간한 공격은 그냥 무시했다. 그러나 광선 칼날 공격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큰 기계 괴수에게 계속 밀렸다.
대형 기계 괴수.
석구가 그걸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가 낄 싸움이 아닙니다. 물러납시다.”
세라프의 전당으로 이동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S급 이능력자가 몇 명 포함되어 있다면 모를까, 현재 전력으로 저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니까.
다행히 차원문은 잘 작동하고 있었다.
세라프의 전당을 지키던 행성인이 부들부들 떨면서도 차원문을 작동시켰다. 지구의 차원문과 소식이 오가고, 곧 차원문 개방 시간이 전해졌다.
그때였다.
쉬지 않고 울리던 폭음이 뚝 그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기계 괴수들이 물러나고 있었다.
대형 기계 괴수의 팔 하나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세라프 종족들이 회심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한숨 돌린 셈.
세라프 종족들이 기계 괴수를 경계하며 하늘 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더니 날개를 떨쳐 움막촌으로 날아왔다.
행성인들이 두려운 시선으로 세라프 종족을 보았다. 그것을 무시하고, 세라프 종족 둘이 세라프의 전당 앞에 내려앉았다.
자연히 앞에서 대기하던 원정팀과 마주쳤다.
붉은 날개를 가진 세라프가 하나, 그리고 흰 날개를 가진 세라프가 하나.
둘 다 지친 기색이었다.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흰 날개의 세라프가 영롱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꾀꼬리가 지저귀는 듯 맑은 목소리였다.
팀장인 석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수한만은 못하지만, 제법 능숙한 세라프 어가 흘러나왔다.
[행성 지구 태생, 타이탄 공격대 소속 원정대입니다. 새로운 행성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조사차 왔습니다.]
[잘 됐네요. 우리를 좀 도와주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는 이곳에서 더 버틸 수가 없어요. 이번 기계 괴수들의 공격을 막기는 했는데 힘을 모두 소진했어요. 더 이상은 싸우는 게 불가능해요. 이 근처에 저희 단장님이 계신데, 그곳까지 저희와 이곳의 피난민들을 호위해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부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