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89화 (90/254)

< 변이체와 함께 -1- >

두 세라프가 날개를 접었다.

원정팀의 결정을 기다리겠다는 듯 전당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 사이 석구는 세라프들의 부탁을 원정팀에게 알렸다.

세라프 어를 그럭저럭 하는 몇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잠시 회의가 벌어졌다.

“어쩌죠? 세라프들을 도와줄까요?”

“솔직히 위험한데요.”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위험해요.”

“세라프만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피난민들을 데려가야 되는 거잖아요. 언뜻 봐도 수백은 되는 것 같은데, 이 짐덩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먼 길을 가겠어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세라프들이 부탁한 거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세라프 종족 아니었으면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세라프들을 도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지구도 종족 연합 소속이니까 세라프 도와야 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조약 같은 것도 맺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수호자 연맹 소속 이능력자라면 모두 그 조약에 구속을 받아요. 모든 이능력자에겐 유사시 세라프 종족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 모두 헌신 서약서를 썼으니까요.”

듣고 있던 수한이 한 가지를 지적했다.

작년에 이능력자가 되어 수호자 연맹에 등록하면서 썼던 서류를 생각해 보라.

그 중 수호 서약서와 헌신 서약서가 있었다.

지구가 공격 받을 때 수호자 연맹의 징집령에 기꺼이 응하겠다는 수호 서약서. 세라프 종족이나 종족 연합의 요청이 있을 경우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헌신 서약서.

거부할 권리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능하면 돕는 게 원칙이었다.

수한은 말을 이었다.

“기계 괴수와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피난민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무료 봉사도 아니잖아요?”

세라프 종족은 뭔가 일을 맡기면 푸짐하게 보상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무엇으로든 보답을 하곤 했다.

금방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 얻은 전리품은 먼저 지구로 보내고, 세라프들을 호위하기로 한 것이다.

“기계 괴수 부품은 남기죠.”

전리품을 몽땅 다 보내려고 하자, 수한이 잠깐 제지했다.

다른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걸 왜요?”

“계곡에서 얻은 건 다 작동하잖아요. 우리가 씁시다.”

광선포나 미사일 같은 것은 충분히 강력했다. 기계 괴수를 상대하든, 고위 변이체를 상대로 하든 유용하게 써먹을 것이다.

모두 거기 찬성했다. 변이체의 시체와 심장만 지구로 보내기로 했다.

결정한 내용을 말해주자, 세라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지구로 통하는 차원문을 열어 전리품을 보내는 것을 도와주었다. 지원 요원 중 지구로 돌아가길 희망한 사람들만 전리품을 가지고 지구로 귀환했다.

그 후 세라프들은 마법진에 대고 힘을 흡수했다.

마법진이 빛을 잃었다. 박혀 있던 보석이 거무퇴퇴한 돌로 변하고, 금과 은도 진흙처럼 시꺼멓게 녹아내렸다.

전당이 무너졌다.

차원문이 완전히 봉쇄된 것.

힘을 흡수한 탓일까. 세라프들의 얼굴이 조금 폈다. 피도 멎었고, 날개에도 광택이 돌았다.

[어디까지 가면 됩니까?]

수한은 세라프들을 보며 물었다.

붉은 날개를 가진 세라프는 베르나, 흰 날개를 가진 세라프는 이시테라고 했다.

이시테가 대답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1시간만 가면 돼요.]

1시간?

그렇게 가까울 리가 없는데?

수한은 금방 이시테의 말뜻을 깨달았다.

자기 날개로 날아갔을 때 1시간 거리라는 얘기였다. 세라프는 개체마다 다르지만, 초음속 정도는 우습게 내니까 지금 수한의 입장에서 보면 까마득했다.

ATV 15대는 고스란히 남겨두었지만, 그게 어디 세라프의 기준에 차겠나.

가장 큰 문제는 움막촌의 피난민들.

한 번 세어보았는데 무려 3백 명에 달했다.

ATV에 실을 수도 없었다. ATV는 2인승이고, 천장 위까지 활용해서 네댓 명이 타는 게 고작이니까.

며칠을 가야 할까?

도보로 이동하면 얼마나 걸릴지 기약이 없었다. 피난민들 대부분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요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날 것이다.

난이도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이시테가 세라프의 전당을 지키던 행성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행성인이 급히 전당을 뛰쳐나갔다.

목조 건물 안에서 행성인들이 쏟아져나왔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축 늘어져 있던 행성인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수한은 그들이 뭔가 쓸모 있는 것을 갖고 있나 살폈다.

타고 갈 것은 거의 없었다. 소를 닮은 가축 열 몇 마리가 전부였다. 수레라고 가져온 게 아주 어설퍼서, 속도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원정팀이 그걸 보고 웅성거렸다.

“미치겠네. 혹을 달고 어떻게 수천 킬로미터를 가죠?”

“중간에 변이체도 많을 텐데요.”

“으윽, 그냥 무시하고 지구로 돌아갈 걸.”

이미 늦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피난민들을 데리고 도망쳐야 했다.

이시테가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집중하여 남서쪽을 보더니, 원정팀에게 내려왔다.

[12시간 뒤면 기계 괴수들의 수리가 끝날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출발해야 해요.]

[12시간이라, 알겠습니다.]

다행이라면 아직 오전 시간이라, 해가 질 때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다는 것이다.

밤이 되면 꼼짝 없이 쉬어야 했다. 지금 행성인들 상태를 보니, 밤을 도와 도망치다간 최소 절반은 죽게 생겼다.

노약자들을 수레에 태웠다. 대부분은 그냥 도보로 이동했다. 일단 출발은 했는데 너무 느렸다. 기껏해야 시속 2 킬로미터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래서야 하루 종일 걸어도 두 달 가까이 걸리겠다.

지구에서 맞고 온 예방 접종 효력도 다 할 터. 두 세라프에게 축복을 받아가며 진행해야 할 것이다.

“오빠, 뭐 좋은 방법 없어?”

새미가 수한의 옆구리를 찔렀다.

수한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

“뭔데?”

“아까 산에서 본 변이체 다섯 마리 있잖아. 그걸 이용하는 거야.”

“기계 괴수랑 싸움 붙이게? 그것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아무리 AA급 변이체가 다섯 마리나 있어도 기계 괴수 한 마리도 못 당할 텐데.”

“변이체들을 강하게 만들면 돼.”

“뭐?”

수한의 생각은 간단했다.

변이체들에게 기계 괴수의 부품을 공급한다. 그래서 S급 변이체까지 진화시킨다. 그 후 기계 괴수와의 싸움을 유도해서, 피해를 가중시킨 다음 때려잡는다.

어느새 다른 팀원들도 모여들었다.

석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밖에 없겠지요?”

“팀장님도 같은 생각을 하셨나 봅니다.”

“사실 방법이 그것 밖에 없으니까요. 이대로 다른 세라프가 있다는 곳까지 가는 건 미친 짓입니다. 그 전에 모두 다 죽을 거예요.”

“그렇지요.”

“관건은 기계 괴수 부품을 얻는 거네요. 그게 있어야 진화를 시키든 어쩌든 할 테니까.”

“우리한테 이미 있잖아요?”

“아, 맞다!”

팀원들의 시선이 ATV 위로 쏠렸다.

각 ATV마다 광선포며 미사일, 방어막 생성기 같은 각종 부품을 놔둔 상태였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아예 거치를 했다. 그렇지 않은 물건은 한 군데 모아 단단히 봉해 놓았고.

“저것들로 그 변이체들을 S급으로 진화시킬 수가 있을까요?”

“부족할 것 같습니다.”

“한 마리도 진화 못할 것 같은데……”

“더구나 저거 던져 놓으면 변이체들끼리 싸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할 거예요.”

“그럼 더 모아야겠네요.”

두 세라프에게 원정팀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이시테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곧 눈을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말씀대로네요. 북동쪽 산에 곧 S 등급으로 진화할 변이체들이 정확히 다섯 마리 있어요. 기계 괴수 시체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기계 형태로 진화할 것 같고요.]

[얼마나 부품이 있으면 진화하겠습니까?]

[최소한 소형 기계 괴수 한 마리 정도는 있어야 되겠어요.]

마침 최근에 기계 괴수는 많이 잡은 참이었다.

이시테는 남서쪽에 기계 괴수 시체가 널려 있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거대 광선검을 휘두르는 기계 괴수 때문에 밀리긴 했지만, 그 전만 해도 기계 괴수 여럿을 쓰러뜨렸으니까.

세라프들은 피난민들을 지키고, 원정팀이 ATV를 끌고 기계 괴수 시체를 가져오기로 했다. 아직 세라프들에겐 휴식이 필요했으니까.

이시테가 작은 빛을 하나 소환해서 내밀었다.

[이걸 따라가세요. 가까운 기계 괴수 시체로 안내해 줄 거예요. 빨간색으로 변하면 살아있는 기계 괴수가 접근하고 있다는 거니까 조심하고요.]

[감사합니다.]

ATV 15대가 남서쪽을 향해 달려갔다.

드론을 몇 대 날려 주변을 살피면서 질주했다. 멀찍이 다섯 기계 괴수가 자가 수리 중인 것을 발견하고 그곳은 피했다. 괜히 접근했다가 광선포라도 얻어맞으면 요단강 직행이니까.

작은 빛이 날아가는 방향과, 드론의 모니터를 번갈아 살피던 지원 요원 하나가 소리쳤다.

“기계 괴수 시체가 보입니다! 꽤 큽니다!”

“변이체들도 탐지됩니다! 시체 주변에 모여 있어요!”

변이체가 없을 리 없지.

수한은 몸을 풀었다.

진작 ATV 위에 올라간 상태였다. 기관총을 거치해 두었는데, 이것만 있으면 변이체들을 학살해 버릴 수 있었다.

“AA급이나 A급은 없나요?”

“예. 대부분 C나 D 등급이고, B급만 가끔 보입니다.”

“그럼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수한이 탄 ATV가 쌩하고 앞질러 나갔다.

구릉지에 소 형태 기계 괴수가 조각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변이체들이 그 주위를 돌아다니며 서로를 잡아먹었다. 몇 마리는 새롭게 진화하는 놈도 보였다.

타타타탕!

수한이 그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기분 좋게 레벨도 하나 올랐다. 그것을 확인하고 싱긋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X-0는 검출되지 않고 있었다.

기계 괴수 시체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ATV로 옮기기도 빠듯하겠는데요?”

“일단 최대한 잘라봅시다.”

장갑은 몽땅 들어냈다. 핵심 부품만 챙겼다.

동력핵은 없었다.

가장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보니 세라프 종족이 빼간 모양.

대신 다른 것들, 이를 테면 각종 무기, 구동 장치, 탐색 장치, 인공지능 부위 위주로 가져왔다.

그것만으로도 ATV의 짐칸이 가득 찼다. 지붕 위까지 잔뜩 올려놓아서, 돌아갈려고 하자 불안하게 덜컹거렸다.

“갑시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어요.”

“얼마나 남았죠?”

“대충 8시간 정도 남았어요.”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기상 현상은 지구와 흡사했다. 서쪽 하늘이 장엄한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어두워지는 것을, ATV의 전조등을 켜고 달렸다. 중간에 완전히 어두워져서, 수한이 조명 속성 총알을 몇 번 하늘을 향해 쏘았다.

피난민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섯 AA급 변이체가 있는 산에서 가까운 지점.

해가 떠오르면 기계 괴수의 수리도 끝날 것이다. 땅을 쿵쿵 울리며 공격해오겠지.

도망치기만 해서는 금방 따라잡힌다. 아예 죽여 버리던가, 아니면 어느 정도 상처라도 입혀야 했다.

수한은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산 위에 올라가 변이체들을 진화시키고, 그것들을 끌고 내려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지금 당장 산 위로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변이체들을 어떻게 유인할 거예요? 시간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다른 방법을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어떻게요?”

“이시테님한테 부탁하려고요. 잘 하면 변이체들을 정신 제압해서 데리고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맞아. 그런 방법이 있네요!”

이시테는 흔쾌히 그 방법을 수락했다.

알고 보니 이시테는 의지, 투시, 정신 계열에 능통했다. 그래서 후방 지원에 특화되어 있었다. 반면 베르나는 거력, 신속, 구현 계열에 일가견이 있어 직접 전투에 나섰다.

전장을 설정했다.

변이체들이 있는 산 바로 앞.

피난민들은 산의 계곡, 즉 전진기지로 써먹었던 곳에 몰아넣기로 했다. 방어도 쉽고, 동굴도 있으니 결계만 좀 치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ATV에서 기계 괴수의 부품을 내렸다. 적당히 다섯 개로 분류하여 한쪽에 쌓아놓았다.

밤이었지만 피난민들을 쉬게 할 수가 없었다. 수한이 앞장 서서 산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변이체들이 활개를 치고 있고, 그것들을 죽이며 계곡으로 인도했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계곡에 도착했다. 피난민들은 동굴로 들어가 지친 몸을 뉘였다.

이시테가 그걸 확인하고 날개를 폈다.

[변이체들을 데려갈게요. 산 아래로 데려가면 되죠?]

[부탁드립니다.]

이시테가 가볍게 날아올랐다.

수한은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시테가 동굴 입구에 결계를 쳐놓은 상태라, 모든 이능력자가 자리를 옮겼다. 이번 한 판 전투에 모든 것을 걸려는 것이다.

가만히 양측의 전력을 비교해 보았다.

아슬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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