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이체와 함께 -2- >
그냥 기계 괴수 세 마리라면 세라프 둘이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거대 광선검을 휘두르던 기계 괴수였다.
혼자서 베르나와 이시테 둘을 상대하는 위엄을 보이던 녀석이다. 나머지 네 마리를 타이탄 원정팀과 S급 변이체 다섯 마리로 해결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쿵. 쿵. 쿵. 쿵.
멀리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기계 괴수라고 하기엔 소리가 작았다. 더구나 변이체 탐지기에 선명한 녹색불이 들어왔다. 그것도 정확히 다섯 개가.
AA급 변이체.
이시테가 그것들을 끌고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새가 하늘을 날아 땅에 내려앉았다. 뱀이 나무를 무너뜨리며 기어 나왔다. 곰이 쿵쾅대며 걸음을 옮기고, 원숭이가 등에 단 추진 장치를 긁적였다. 살쾡이는 쥐도 새도 모르게 도착해서 한쪽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이시테가 변이체들에게 손짓을 했다.
변이체들이 침을 흘리며 기계 괴수 부품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 많던 부품들이 금방 사라졌다.
양껏 부품을 먹은 변이체들이 목청껏 울어 젖혔다.
“크아아앙!”
“끼이익!”
진화가 시작되었다.
변이체들의 몸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육체가 기계로 대치되었다.
눈은 렌즈로, 발톱은 쇠갈고리로, 근육은 금속 섬유로, 뼈는 금속 골조로, 신경은 전기 회로로 변한 것이다.
오직 뇌와 심장 등 핵심 장기만 원래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덕분에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이 작은 기계 괴수처럼 보였다.
변이체들이 진화하는 동안 시간이 꽤 지났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시테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남서쪽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오물거렸다.
[기계 괴수들의 수리가 끝났네요. 곧 공격해 오겠어요.]
베르나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붉은 검에서 진홍색의 불길이 뿜어졌다.
세라프의 적색 검.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봐야겠구나.]
검을 보며 내뱉는 말이 으스스하게 심장을 찔렀다. 검은 뜨거운데, 베르나의 눈은 칼날처럼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수한은 살짝 손을 들었다.
두 세라프가 자신을 보자,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싸우실 겁니까? 솔직히 우리 쪽이 열세인데, 마구잡이로 싸우면 필패입니다.]
세라프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베르나가 불타는 검신을 한번 쓰다듬더니 말했다.
[그도 그렇구나. 하지만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나는 한 마리를 상대하기도 벅차다. 여기 있는 자 중 나 말고는 그것을 상대할 자도 없어 보이는구나.]
이시테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베르나님을 지원해야 해요. 제 지원 없이는 베르나님이 오래 버틸 수 없어서요.]
[아, 그럼 이 변이체들은 어떻게 합니까?]
[저도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여러분 중 정신 계열 이능력자가 있으면 그 분이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대충 어떻게 공격하라고 지시만 해도 도움이 될 텐데요.]
수한이 이시테의 제안을 통역하자, 원정팀의 시선이 임여울 주임과 홍시예 주임에게 쏠렸다.
둘 다 C급 정신 계열 이능력자.
따라다니면서 통역만 하던 참이라 처음엔 좀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도 잠시, 이내 가슴을 펴며 소리쳤다.
“맡겨만 주시면 열심히 할게요!”
“잘 해낼 자신 있어요!”
여울과 시예가 기세 좋게 나섰는데, 뜻밖에도 이시테가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안 돼요. 능력이 너무 약합니다. 최소한 A급은 되어야 이 아이들을 부릴 수 있어요.]
이시테가 이미 변이체들을 제압했는데도 C급으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한다?
수한도 정신 감응 초능을 개발했지만, 힘의 결정이 모자라 아직 1차 진화도 못하고 있었다. 세라프의 이능 체계로 보면 D급 정도라는 얘기였다.
이시테가 원정팀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수한의 앞에서 정지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한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당신, 정신 계열 이능을 갖고 있네요? 뭔가 좀 특이한 느낌인데……]
[있긴 있는데, 이제 막 각성해서 E급 정도일 겁니다. 말씀하신 기준에 훨씬 못 미쳐요.]
[당신 정신 계열 잠재력도 상당하네요? 이 정도면 괜찮겠어요. 당신이 이 아이들을 부리는 걸로 하죠.]
[예? 어떻게요?]
수한의 반응에, 이시테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간단하죠. 이렇게 하면 돼요.]
이시테가 수한에게 다가왔다.
하얗게 빛나는 손을 들어, 수한의 이마에 얹었다.
“윽!”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엄청나게 뜨거웠다. 인두로 달구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강렬한 고통이 척추를 관통했다.
주먹을 쥐고 버텼다.
이를 꽉 깨물었다.
이시테가 손을 뗐다. 수한은 숨을 할딱였다. 마라톤을 뛰고 난 다음처럼, 전신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응?’
이상한 게 보였다.
접어두었던 초능창이 활성화되며 5번째 초능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초능]
(+++)정신 감응 300.
1차 진화도 못 했었는데, 3차 진화가 되어 있었다.
괄호 표시가 있는 게 특이했다.
아마 임시라는 뜻이겠지. 아무리 세라프 종족이라도 이렇게 간단히 초능을 진화시키지는 못할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이시테가 수한을 보고 말했다.
[당신은 이제 A급 정신 계열 이능력자에요. 하지만 영구적으로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저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능력이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이능의 등급 자체를 올리는 능력이라니……
수한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시테가 다섯 마리의 S급 변이체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변이체들이 각자 알겠다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더니 쿵쿵 걸음을 옮겨 수한의 앞으로 다가온다.
집채만큼 거대한 변이체들.
그것들이 뚱한 눈으로 수한을 살폈다.
[어째 믿음직스럽지가 않은데……]
[네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천사님의 말씀이 아니었으면 밟아 죽였을 거다!]
정신 감응이 강해져서일까.
변이체들의 생각이 수한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지능이 꽤 높았다. 추상적인 감정이나 심상이 아닌, 구체적인 언어의 형태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한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함께 잘 해보자.]
[흥! 약해빠진 놈이!]
[저거 그냥 콱 밟아버릴까?]
[안 돼. 천사님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
변이체들의 태도는 불퉁했다.
하기야 변이체들은 야성이 강했다. 수한이 자기들보다 강하다면 모를까, 훨씬 더 약하니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수한은 놈들을 살살 달랬다.
[그러지 말고. 곧 기계 괴수들이 올 건데 놈들을 잡아야 너희도 먹을 게 생기지 않겠니? 생각해 봐. 시체만 먹는 것보다 막 잡은 따끈따끈한 걸 먹는 게 더 맛있지 않겠어?]
그러면서 맛있는 고기의 육질을 연상했다.
변이체들이 입맛을 다셨다.
[우리한테도 나눠준다고?]
[당연한 거 아니냐?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너희도 얻는 게 있어야지.]
수한은 진심이었다.
원래는 이 다섯도 사냥할 생각이었는데, 놈들과 정신 감응을 해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 더 좋은 방법이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이시테에게 정신 제압을 당한 상태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이시테에 의해 억눌린 것이 풀리면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전리품을 나누어 주는 것이 필요했다. 단순히 명령자가 아니라, 동업자로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변이체들이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잠시 후, 거만한 태도로 수한의 제의를 수락했다.
[좋아. 네 말에 따르도록 하지.]
[네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다!]
변이체들을 달래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멀리 기계 괴수들이 보였다.
정확히 세 마리. 어제 봤던 것과 같았다.
수리가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세 마리 다 말끔했다. 타오르는 햇빛을 반사시켜, 은색 차가운 광택이 표면을 타고 흘렀다.
기계 괴수들이 멀찍이 정지했다. 탐지 장치를 가동시켜 이쪽을 훑더니, 천천히 접근해 왔다.
석구가 수한에게 말했다.
“우리가 상대할 기계 괴수가 두 마리이니, 1마리 먼저 죽이는 게 좋겠습니다.”
“변이체 중에 곰의 방어력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제가 곰과 새만 데리고 기계 괴수 한 마리를 잡고 있겠습니다. 유 계장님이 절 도와주세요”
“알았어요.”
기계 괴수는 세 마리 모두 종류가 달랐다.
원정팀과 변이체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지네 형태의 기계 괴수와 도마뱀 형태의 기계 괴수.
둘 다 소형이었다. 어렵긴 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수한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막중한 책임감이 들었다.
5마리의 S급 변이체를 수한이 얼마나 잘 통솔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 때문이었다.
이시테가 사람들에게 가볍게 축복을 걸었다. X-0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종류의 이능이었다.
그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도마뱀이 멀리서 입을 벌렸다.
시꺼먼 포신이 회전하며 튀어나왔다. 그 입구에 빛이 모이더니, 시퍼런 광선이 쭉 뿜어졌다.
이시테가 손을 쳐냈다.
그 가벼운 손짓에 빛의 방패가 생겼다. 살짝 기울어진 채 광선을 막자, 거울에 반사되듯 허공으로 날아갔다.
지네의 등껍질이 열렸다.
미사일 발사대가 우스스 튀어나왔다. 불꽃을 뿜으며 수백 개의 미사일이 솟구쳤다.
이번에는 베르나가 처리했다. 적색의 검을 던지자 거대한 불의 장벽이 생겼다. 미사일들이 불의 장벽에 휩싸여, 모조리 폭발해 버렸다.
역시 장거리 공격으로는 두 세라프를 어쩔 수 없었다.
기계 괴수들이 접근해 왔다.
수한은 새 변이체의 등에 탔다. 새가 신경질을 냈지만 잘 다독이자, 툴툴 거리면서도 태워준 것이다.
하늘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다섯 변이체와 정신을 연결했다.
수한의 통제에 따라 변이체들이 진형을 갖추었다.
곰만 따로 떨어졌다. 나머지 세 마리는 한 군데 뭉쳐 있었다. 세라프들도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원정팀은 살짝 뒤에 위치했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다.
2백 미터 정도.
기계 괴수들만이 아니라 세라프의 변이체, 원정 팀까지 공격이 가능한 거리였다.
“키이이이잉!”
기계 괴수들이 묘한 소리를 질렀다.
몸을 격하게 진동시키더니,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 커다란 덩치들이 내달리자,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하!”
베르나가 기합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적색 검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검에서 흘러나온 빛이 베르나의 전신을 감쌌다.
붉은 혜성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정확히 광선검 기계 괴수를 향하고 있었다.
기계 괴수가 다리 부분에 달린 광선포를 난사했다. 미사일도 수도 없이 뿌렸다. 몸통에서 작은 공 같은 게 튀어나가더니, 빛의 그물로 변해 베르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베르나가 살짝 몸을 틀었다. 기계 괴수 앞을 비껴 지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순간 수십 미터까지 늘어난 검이 기계 괴수의 방어막을 훑었다.
기계 괴수가 괴성을 질렀다.
광선검을 휘두르며 덤볐다. 베르나가 아슬아슬하게 그걸 피하자, 남은 기계 괴수들도 거기 자극 받아 베르나를 공격했다.
그때, 수한이 공격을 시작했다.
첫 목표는 도마뱀.
예전에 케르베스 행성에서 상대했던 기계 괴수와 비슷하게,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개체였다. 근접 공격은 지네와 비교하면 좀 취약했다. 따라서 그 놈부터 해결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총알이 도마뱀의 방어막을 뚫었다. 그러면서 거의 모든 힘을 소진했지만, 금속 장갑까지 도달하여 자신의 임무를 끝마쳤다.
하얀 빛이 기계 괴수의 표면에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