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뢰 완료 -1- >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검은 기계 괴수의 두부를 관통했다. 흉부까지 들어가, 그 안에 있던 어떤 존재의 심장에 박혔다.
기계 괴수의 움직임이 멎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검에서 거미줄처럼 끈끈한 힘이 퍼져 나왔다. 그 힘이 기계 괴수의 동력핵과, 기계 괴수 안에 있던 존재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웅웅웅웅.
동력핵은 지금도 힘이 넘쳤다.
대기 중에 나오자 강렬한 파장을 주변으로 퍼뜨렸다.
그러나 수한을 비롯한 원정팀의 시선은 동력핵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시체.
인간 형체였다.
흰색 민무늬 가면을 썼고, 은색의 보호복을 입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글자 같은 것들이 점점이 떠돌았다.
익숙한 모습이다.
예전에 개마고원에서 발견했던 제국인 시체와 꼭 닮았다.
수한은 침을 삼켰다.
외계 행성에서 발견된 제국인의 시체.
그런데 체형은 이곳 행성인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구인에 가까웠다.
베르나가 동력핵을 갈무리했다. 방금 전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기계 괴수가 푹 무릎을 꿇었다.
변이체들이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이겼다!]
[으흐흐, 별 거 아니네!]
원정팀은 시체 주변으로 모였다.
석구가 팀원들의 얼굴을 한 번씩 보았다.
“이거 그거 맞죠?”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걸 다 가져갈 수는 없고, 피를 좀 뽑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습니다.”
피만 아니라, 가면과 보호복도 챙기기로 했다.
지원 요원들이 앞으로 나섰다.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고, 모든 소지품을 확보했다.
그때, 수한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
왼쪽 손목에 있던 글자들이 희미해졌다. 약한 빛을 뿜더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수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게 뭔가 싶었다.
빛나는 글자들이 지원 요원들의 머리 위를 떠돌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변의 팀원 중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꼭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글자들이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그러더니 가장 먼저 시체에 손을 댔던 지원 요원에게 흘러가려고 했다.
수한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
왼손.
레벨 업 도우미가 깃든 손이었다.
그러자 글자들이 멈칫했다.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움찔거리더니, 방향을 바꾸어 수한에게 날아왔다.
글자들이 수한의 왼쪽 손목에 내려앉았다.
이상한 문양들이 마구 떠오르고 있었다.
“오빠, 뭐해?”
새미가 수한을 쳐다보았다.
수한은 대충 얼버무렸다.
“아무 것도 아냐. 좀 피곤해서.”
“고생했는데 좀 쉬지.”
글자가 날아오고, 수한의 손목에 이상한 문양이 나타나는 건 수한에게만 보였나 보다.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기계 괴수를 끝장낸 두 세라프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수한을 보고 있었다.
[마니엘라님께 들은 대로구나. 제국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능 진화를 걸면서 살펴봤는데, 살육 계열 8익(翼)이었어요.]
[살육 계열 8익? 거물급이로구나.]
[어떻게 보안을 뚫은 걸까요?]
[보안 기능이 망가진 무기를 얻은 거라고 봐야 타당하다. 아니면 학술원에서 추측한 게 맞거나.]
[어떻게 할까요?]
[보고서를 올린 후 지켜보도록 하자. 우리가 결정할 일은 아니다.]
수한은 두 세라프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몰랐다. 정신 계열 이능으로 얘기한 거였기 때문이다.
다만 둘이 심상치 않은 눈으로 자신을 본다는 사실만 눈치챘다.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레벨 업 도우미 때문이겠지.
마니엘라에게 언질을 받은 적이 있지 않나.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고도 했고.
여기에 대한 것은 베르나와 이시테도 알고 있을 테니, 시선을 받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전투를 치르는 동안 시간이 꽤 지났다.
벌써 점심시간이 넘었다. 붉은 태양이 하늘 높은 곳에 떠서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기계 괴수들의 시체를 옮겼다.
무려 세 마리.
그걸 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수한은 새에게 정신 감응을 날려 땅으로 내려갔다. 원정팀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수한에게 다가왔다.
“끝났네요. 고생하셨어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죠? 기계 괴수 잡았으니까 그냥 마을에 있어도 될까요?”
“세라프들이랑 얘기를 해봐야겠습니다.”
변이체들이 기계 괴수의 시체를 보고 침을 질질 흘렸다. 섣불리 집어먹지 못하게 잘 타일렀다.
이후 세라프들과 의논을 했다.
원정팀이 동석한 자리.
수한이 주도했다. 세라프 어로 통역도 하고,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기계 괴수도 죽었으니 마을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단장님께 문의했는데, 가능하면 데리고 오라고 하시네요. 어차피 전당을 유지할 정도의 인구가 안 되니, 본인이 지키는 곳과 합치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단장님이 계신 곳에도 기계 괴수들이 많아서, 잠깐 자리를 비울 수도 없나 봐요.]
[왜 단장님이 직접 안 오고 피난민들을 데려오라고 했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 때문이었나 봅니다.]
기계 괴수를 처단한 이상, 방법은 널려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세라프들이 들고 데려다 주면 된다. 과연 그 방법을 수락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목적지를 향해 계속 간다.
그걸 머리에 새기고, 한 가지 사항을 더 협의했다.
[기계 괴수 시체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희는 동력핵만 가져가면 되요. 나머지는 여러분이 가지세요.]
[감사합니다. 유용하게 쓰겠습니다.]
동력핵이 기계 괴수의 핵심인 것은 사실이다. 그것 하나가 최소 30%의 가치는 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동력핵을 주고 나머지를 독점한다면 엄청나게 남는 장사였다. 베르나를 몰아붙였던 광선검만 해도 지구로 가져가면 막대한 돈을 벌 것이다.
수한은 문득 변이체들을 보았다.
저것들에게도 한몫 챙겨줘야 한다.
아깝지 않느냐고?
그만큼 뽑아 먹으면 된다. 지금도 충분히 이득을 봤지만, 앞으로도 그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 저희가 기계 괴수의 시체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참,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뭔데요?]
[저 기계 괴수 시체, 혹시 두 분께서 움직일 수 있습니까? 전투는 못 해도 좋고, 그냥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데요.]
수한은 광선검 기계 괴수의 시체를 가리켰다.
이시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아요. 왜요?]
[피난민들을 저기에 태워가려고 합니다. 다른 기계 괴수 시체도 가져가고요.]
[그런 방법이 있네요. 좋아요. 그렇게 해요.]
이시테가 기계 괴수 시체를 정화했다.
제법 힘을 쏟자, 뭉클뭉클 쏟아지던 X-0가 모두 제거되었다. 이제 별도의 축복이나 보호 장비 없이 기계 괴수 옆에 서 있어도 괜찮았다.
원정팀 중 일부가 피난민들을 데리러 떠났다.
이시테는 광선검 기계 괴수의 시체로 날아갔다. 동력핵이 있는 부위를 들여다보며, 뭔가 작업을 했다.
이제 한 가지 일만 남았다.
석구가 변이체들을 힐끔거리며 속삭였다.
“저것들한테까지 전리품을 나눠주는 건 아깝지 않습니까?”
“이미 약속을 했으니까요. 약속을 안 지켰다가 공격당하면 우린 다 죽어요.”
“어차피 저놈들도 죽여야 하지 않습니까? 저놈들도 다 돈인데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를 필요가 있나요? 제 생각에는 이 녀석들과 친분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행성에는 기계 괴수가 넘쳐나는데, 이 변이체들과 함께 하면 우리 팀만으로 기계 괴수를 잡을 수가 있어요. 나중에 행성이 안정된 다음 우리 공격대 지사를 설립하는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때
쯤 되면 이 행성 자체를 우리 공격대가 독점하는 것도 가능하지 싶습니다. S급 이능력자 다섯이 우리 편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수한씨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것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을까요?”
“통제는 불가능할 겁니다. 어디까지나 공생 관계죠. 아니, 동맹 관계라고 할까요?”
“동맹이라…… 으으음……”
석구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해봅시다. 어차피 기계 괴수 시체 하나만 가져가도 대박이니까. 대신, 저 시체는 절대 넘겨줘선 안 됩니다.”
손가락으로 광선검 기계 괴수를 가리켰다.
당연한 말이다.
남은 두 기계 괴수의 시체를 다 합쳐도 광선검 기계 괴수의 가치는 따라갈 수가 없으니까.
수한은 힘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몸을 돌려, 변이체들에게 다가갔다.
변이체들이 카메라 렌즈 같은 눈으로 수한을 쳐다보았다. 기괴하다면 기괴한 광경인데, 함께 전투를 치러서인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너희들한테는 저걸 주기로 했어.]
그들에게 정신 감응을 보냈다.
두 시체 중 좀 더 상태가 괜찮은 전갈 형태의 기계 괴수를 주겠다고 한 것이다.
변이체들이 위협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뭐야, 겨우 저거?]
[목숨 걸고 싸운 대가가 이거 하나 뿐이야?]
[콱 죽여 버린다!]
예측한 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하긴 수한이 변이체들 입장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군침이 나는 광선검 기계 괴수 시체가 눈앞에 있는데 셋 중 하나만 준다고 하면 당연히 화를 내겠지.
수한은 손을 들어 진정하라는 시늉을 했다.
[쯧쯧, 진정해. 내 말 끝난 거 아냐. 지금부터 우리가 뭘 할 줄 알아?]
[뭘 할 건데?]
[300명 정도 사람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할 거야. 상당히 오랫동안 가야 돼. 그 동안 좀 위험할 것 같은데, 너희들이 같이 가주면서 우릴 도와준다면 다른 시체도 너희한테 줄게. 어때?]
[큰 놈으로 줄 거야? 작은 놈으로 줄 거야?]
[큰 놈은 못 줘. 사람들이 거기 타야 되거든. 그리고 우리도 가져가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싫으면 작은 놈만 하나 먹고 집에 가던가. 우리도 할 만큼은 했다.]
변이체들이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쳤다.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잠깐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더니, 수한을 보며 그러자고 했다.
[좋아. 두 마리면 적당한 것 같아. 딴 말 하기 없기다?]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
변이체들이 기계 괴수 시체 두 개를 한쪽으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서로 견제해가며 뜯어먹었다.
광선검 기계 괴수를 달라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뜻밖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들의 감정을 읽었는데, 소형 기계 괴수 두 마리를 합친 분량이 광선검 기계 괴수 보다 더 많다는 점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질보다 양이 먼저.
그렇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그 생각에, 수한의 마음이 푸근해졌다.
‘어디 보자.’
변이체들이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며 레벨을 확인했다.
정확히 225레벨.
계곡에서 1주일 간 올린 레벨이 정확히 5였다. 그런데 오늘 하루 만에 20레벨이 추가로 상승했다. 뿐만 아니라 탑승 기술 1, 전투 지휘 기술이 2, 위엄 능력치도 1 올랐다.
다섯 변이체를 지휘하여 기계 괴수를 잡은 게 주효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손목을 확인해 봤는데, 몇 가지 글귀가 떠올라 있었다.
[이종의 레벨 업 도우미 흡수 완료.]
[레벨 10 상승.]
[모든 능력치 1 상승.]
[초능 여유 점수 10 확보.]
[시민 계급으로 진급.]
레벨 업 도우미의 정보창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수한은 235레벨이었다.
기분 좋은 일이다.
그와는 별개로, 수한의 얼굴은 미미하게 굳어 있었다.
이종의 레벨 업 도우미? 시민 계급?
이건 도대체 뭔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응? 뭐가?”
새미가 걱정스럽게 수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수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래. 익숙하지 않은 정신 계열 능력을 써서 그런가 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쟤들 귀엽지 않아?”
“응?”
“덩치는 큰데 꼭 애완동물 같아.”
새미가 변이체들을 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제 기력을 차린 듯했다. 아까만 해도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죽어서 수한에게 기대어 있었는데, 지금은 웃기도 하고 주변도 살피고 있던 것이다.
수한은 새미의 말에 한쪽 뺨을 긁적였다.
귀엽다고?
몸집이 최소한 코끼리만 한데?
이해할 수 없는 얘기지만, 일단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살쾡이가 가장 귀엽지 않아? 꼭 고양이 같아.”
“맞아! 한번 안아 주고 싶어.”
“그건 위험하니까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변이체들이 식사를 끝냈다.
포만감이 드는지 배를 두드렸다. 겉모습이 좀 변하긴 했는데,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단지 표면에 광택이 진해지고, 몇 가지 무기가 새롭게 생긴 것에서 끝이 났다.
하긴 여지껏 SS급 변이체가 나타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S급 변이체는 그나마 풍문으로 좀 들었지만.
피난민들이 줄을 지어 내려왔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득한 피로감이 여전히 그들의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이시테도 기계 괴수의 수리를 끝냈다.
기계 괴수가 눈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군데를 개조한 덕에 3백 명 정도는 기계 괴수에 타서 갈 수 있었다. 승차감은 좋지 못하겠지만, 걸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출발하죠.]
피난민들을 기계 괴수에 태우고 출발했다.
세라프들도 지쳤는지 기계 괴수 한쪽에 탔다. 심지어 변이체들도 들러붙었다. 원정팀만 ATV에 타고 기계 괴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수한만 땀을 뻘뻘 흘렸다.
‘뭐가 이리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