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사 >
약속시간은 저녁 6시.
언젠가 간 적이 있던 한정식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수한은 아침부터 자꾸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머리도 만지고, 옷 매무새도 가다듬었다.
동생들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 어디 선 보러 나가? 아침부터 뭐해?”
“저녁에 새미 부모님 뵙기로 해서. 어때? 잘 어울려?”
“헐,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인사하러 가?”
“그냥 한 번 뵙는 거지 뭐.”
“그럼 정장 한 벌 빼입고 가. 단정한 게 최고야. 너무 멋 부리면 안 좋게 볼 지도 모르잖아.”
“그렇겠지?”
수한은 정장을 입고 보석 허리띠를 둘렀다. 허리띠에 권총과 단검을 꽂자, 제법 그럴 듯했다.
동생들이 박수를 쳤다.
“괜찮은데?”
“우리 형 아닌 것 같아!”
“키잉!”
기계용이 동의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어제까지는 시간이 무척 빨리 갔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지독히도 느렸다. 1시간쯤 지났겠거니 해서 시계를 보면 겨우 10분 정도 지난 상태였다.
5시쯤, 집을 나섰다.
동생들이 손을 흔들었다.
“잘 하고 와!”
한정식집까지는 30분 정도 걸렸다.
예약된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확히 약속시간이 되자 새미 가족이 도착했다.
예전에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노년의 신사와 곱게 늙은 부인.
수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오세요. 이수한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가워요. 저번에 한 번 본 적이 있지요?”
부인이 호의어린 얼굴로 수한을 보았다.
반면 신사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수한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여도 흥 하고 코웃음만 쳤다.
곱게 기른 딸을 왠 불한당 같은 녀석이 채가려고 하니 심통이 난 모양이다.
“그래, 지금은 타이탄 공격대에 있다고?”
일단 자리에 앉았다.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신사가 수한을 보고 물었다.
수한은 정중한 태도로 답변했다.
“예, 타이탄의 특수 원정 1팀에 있습니다. 새미와 같은 부서입니다.”
“그래, 그건 들었네. 가족들은 동생 둘이라고 전부라고 했지?”
“예.”
“친척은 없나?”
“대전쟁 때 모두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래…… 하긴 나도 동생 가족을 잃었지.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나?”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수한이 14살 되던 해 대전쟁이 발발했다.
당연히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결국 수한은 중학교 중퇴로 끝이 났다.
근근히 살아가던 중, 육군 부사관이 활로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육군 부사관의 자격 요건 중 고등학교 졸업이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고,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끝냈다.
그 얘기를 하자, 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학교를 다닐 상황이 아니었지. 그 와중에 검정고시까지 보다니, 대단하구먼.”
“병사로 가면 월급이 너무 적으니까요. 그 월급 가지고는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지요. 면제 받는 건 불가능하고, 연기도 한계가 있고요.”
“하긴 그렇지.”
“아빠, 지금 수한 오빠 동생들은 다 S대에 진학했어. 둘째는 법학과 다니고 막내는 세라프 어문 학과 다녀.”
“어쩜. 그 힘든 상황에서도 그렇게나…… 여보, 정말 듬직하지 않아요?”
“흠, 흠.”
신사는 헛기침만 몇 번 했다.
“자네, 술은 좀 하나?”
“예.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럼 술이나 한 잔 하세.”
그러더니 종업원을 불러 술을 시켰다.
안동 소주.
최고급품이었다. 도수도 굉장히 높아 보였다.
그걸 큰 잔이 넘치도록 콸콸 따라주었다.
“자, 쭉 마시게.”
“예, 아버님.”
술을 좋아하지 않는 수한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거절할 수는 없다.
한 번에 들이켰다.
쓰긴 했지만 마실 만 했다. 레벨 업 도우미로 강화된 체력이 주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몇 번 더 술을 따라준 다음에야 몇 가지를 더 묻는다.
“부사관 출신이면 담배를 많이 피우겠군. 그렇지 않나? 군대에 있는 내 친구한테 듣기로는 지금도 보급용 담배가 나온다던데.”
대전쟁이 없었다면 군용 보급 담배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전쟁이 끝나고 겨우 10여 년이 지난 상태였다. 몇 년은 더 지나야 군대 내에서의 금연 운동이 시작될 듯했다.
수한은 고개를 저었다.
“전 술은 마셔도 담배는 안 피웁니다. 변이체들은 후각이 발달되어 있어서, 가끔 담배 냄새 맡고 공격해 오는 경우가 있어서요.”
“그래? 하긴 개마고원에서 5년 간 있었다고 했지. 가만, 개마고원에 카지노도 있다고 하던데?”
“강계시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임이랑 후임이 얘기는 하던데, 가본 적은 없습니다.”
“흠, 스트레스 풀러 많이 간다고 들었는데.”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니까요. 그리고 군인은 카지노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긴 그렇지.”
신사는 수한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자꾸 술을 권했는데, 그 독한 술을 마시면서도 수한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졌다. 새미의 부모님 앞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신사가 질문하는 것은 교우 관계, 여자 관계, 술과 담배, 취미, 특기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이 정도는 물어보겠지 하고 예측했던 질문들.
막힘 없이 술술 대답했다. 사실 수한은 외적으로는 약점이 좀 있어도, 내실이 꽉 찬 남자였으니까.
더구나 약점이라고 해봐야 부모님이 없고 학력이 짧다는 것 정도인데, 이 정도는 아무래도 좋은 세상 아닌가.
A급 이능력자.
이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얘기가 길어질수록, 처음에는 딱딱했던 신사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앞으로는 어쩔 생각인가? 자네의 인생 목표를 듣고 싶네.”
인생 목표라……
수한은 목을 가다듬었다.
“우선은 S급 이능력자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그리고?”
“타이탄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공격대를 창설할 겁니다.”
“새로운 공격대? 허어, 원대한 꿈이군. 하긴 S급 이능력자면 공격대를 창설한 자격이 충분하지. 하지만 자네가 정말 S급 이능력자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하나?”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저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지요. 설령 여기서 제 성장이 멈춘다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 저는 A급 이능력자이고, 공격대의 지원 요원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공격대를 가든 적지 않은 대우를 받을 겁니다. 아무
리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가족들을 건사할 자신이 있습니다.”
“흠!”
신사는 시퍼렇게 면도한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얼굴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수한은 새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저는 새미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평생 새미만을 사랑하고, 새미만을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아버님께서 보시기에 제가 부족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새미를 향한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부디 어여삐 봐주셨으면 합니다.”
“순서가 틀렸어.”
“예?”
“S급 이능력자나 공격대 창설 말고, 그 얘기부터 했어야지. 학벌? 재산? 이능?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지. 경제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 함께 걸어가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믿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닐세. 요즘 세태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앞으로는 지금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네.”
“예, 알겠습니다.”
실질적으로 허락을 맡자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신사는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많이 마신 참이었다. 수한도 슬슬 술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얼굴이 불콰하니 달아오르고 괜히 기분이 들떴다. 레벨 업 도우미를 얻은 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래, 식은 언제 올릴 생각인가?”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수한과 새미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습니다. 저도 새미도 어리지 않습니까? 2년에서 3년 후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수한은 26살. 새미는 23살.
결혼하기엔 일렀다. 수한의 말대로 2, 3년 정도가 지나면 딱 결혼 적령기가 되지만.
새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빠. 지금은 너무 빨라. 나도 결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걸?”
“흠, 그럼 둘이 알아서 해라. 하지만 내 생각에는 너무 늦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결혼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알았어, 아빠. 우리가 알아서 할게.”
“둘 다 똑똑하니까 둘이 잘 할 거예요.”
얼마간 얘기하다가 자리를 파했다.
새미는 데이트 좀 하고 가겠다며 수한에게 들러붙었다.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지만, 어머니가 옆구리를 꼬집어 가며 억지로 끌고 갔다.
수한의 차에 탔다.
술을 꽤 마신 터라 수한은 조수석에 탑승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새미가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운전할래!]
기계용이 짧게 울더니 센터페시아 위로 올라갔다. 자동차와 융합되어, 제멋대로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수한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휴, 긴장돼 죽는 줄 알았어.”
“우리 아빠 무서운 사람 아닌데 너무 긴장한 거 아냐?”
“에이, 자기한테나 그렇겠지. 근엄하시던데?”
“그래? 난 잘 모르겠어.”
“그래도 좋은 분 같아. 앞으로 자주 뵀으면 좋겠다.”
“항상 외국에 나가 있으니까…… 나중에 미국 한 번 가자. 찾아오면 엄청 좋아하실 거야.”
“그래, 그러자.”
자동차가 어두운 도로를 달렸다.
어느새 시간이 꽤 늦어서 강변 도로에는 차가 얼마 없었다. 오붓하게 드라이브를 즐겼다.
“너무 늦게 들어가면 두 분이 걱정하시겠지?”
“이미 허락도 얻었는데 뭐 어때?”
“에이, 그게 아니지. 두 분 계신 동안은 빨리 들어가는 게 좋겠다. 이제 자기 집으로 가자.”
“칫, 더 같이 있고 싶은데.”
“허락 받은 첫날부터 걱정시켜 드릴 수는 없잖아.”
“오빠는 어떻게 돌아가려고? 술 마셨잖아. 무인 주행은 아직 하면 안 된다고 하던데.”
“대리 부르면 돼. 걱정 마.”
“알았어.”
기계용이 자동차를 새미의 집까지 운전했다.
헤어지기 직전, 가볍게 입을 맞췄다.
벌써 수백 번은 넘게 키스한 것 같은데 새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수한은 새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내일 시간 어때?”
“저녁은 엄마랑 쇼핑 가기로 했어. 오후에 볼까?”
“좋아. 점심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
“응. 그럼 내일 봐.”
허락까지 얻었겠다,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1주일 내내 붙어 다녔다.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흘렀다.
꿈결 같은 휴가가 순식간에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8월 15일 광복절.
집집마다 태극기가 걸리고, 온갖 행사가 벌어지는 날.
타이탄 공격대의 대규모 원정일이 다가왔다.
다른 공격대도 준비를 하는데로 출발한다고 했다. 그 규모도 상당해서, 요 며칠 간 세라프의 전당은 가브낙 행성으로 통하는 차원문만 연다고 했다.
국군은 아직.
대통령의 긴급 지시가 떨어졌지만, 의회에서는 여전히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다른 공격대들이 거의 다 원정대를 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선발대가 출발할 것 같았다.
수한은 중무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마법 소총, 두 자루의 권총, 음울한 회색 단검, 화려한 보호복과 보석 허리띠.
보호복은 보호색 기능이 붙어 있었다. 보석 허리띠는 방어막 생성 기능이 있어, 둘 다 수한의 생존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단검의 능력까지 발휘하면 더욱 그렇고.
현재 수한의 레벨은 241 레벨.
새미의 부모님과 대면하면서 레벨이 1 올랐다.
이번 원정에서는 과연 얼마나 올릴 수가 있을까?
저번에는 겨우 3주 남짓한 기간 동안 40 레벨을 올렸으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한 편, 기계 괴수 전리품은 아직 정산이 되지 않고 있었다. 원정을 갖다 온 다음에야 그 결과를 알 듯했다.
금액이 하다 크다 보니 시간이 걸리는 모양.
수한은 마음을 비웠다.
3백 억만 넘으면 된다. 그래야 AA급 힘의 결정을 구입할 수가 있으니까.
최소한 변이체 시체 보다 5배는 더 넘게 받을 터.
기계용을 거느린 채 타이탄 공격대에 도착했다.
사옥 앞에서, 한민종 사장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연설을 했다.
이제 세계 10위권 공격대 진입이 눈앞에 있다는 내용.
간단히 행사를 끝내고 출발했다.
1천 명이 훌쩍 넘어가는 원정대.
SUV, ATV, 트럭들이 여의도의 도로 한편을 점거했다. 그 규모에 지나가던 시민들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이윽고 세라프의 전당을 통해 차원을 넘었다.
가브낙 행성.
이제 2차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