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비 아이 -1- >
민종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기계 괴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가슴의 금속 장갑을 벗겨내고, 그 안의 동력핵을 꺼냈다.
동력핵이 힘차게 울부짖었다.
승리의 함성이 터졌다.
“이겼다!”
“성공이야!”
부상자부터 수습했다.
시종일관 유리하게 밀어붙였지만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유탄에 맞은 사람도 많았다. 그나마 죽은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대형 기계 괴수를 잡으면서 사망자가 없다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머리를 싸매가며 집단 의식을 발현한 보람이 있었다.
지상으로 내려오자, 새미가 수한을 보더니 급히 달려왔다.
“오빠, 괜찮아? 피투성이잖아!”
“응? 아, 코피 좀 흘려서 그래. 별 거 아냐.”
“별 거 아니긴! 얼굴에 피가 잔뜩 묻었는데?”
새미가 손수건을 들어 수한의 얼굴을 닦았다.
아까 닦는다고 닦았는데 덜 닦인 모양이다. 수한은 눈을 감고 새미의 손길을 즐겼다.
변이체들이 쿵쾅대며 다가왔다.
전투가 막 끝나서일까. 아직 흥분이 식지 않은 것 같았다. 후끈한 감정이 수한의 정신으로 파고들었다.
[정말 대단했어!]
[오늘처럼 짜릿한 경험은 처음이야!]
[또 언제 잡으러 갈 거야?]
[글쎄? 일단 이거부터 처리를 해야지. 다음 잡을 게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민종도 수한 쪽으로 다가왔다.
거대화를 해제하고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사람 크기의 동력핵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얼굴이 벌겠다.
오랜 숙원을 이뤄내서 그런가 보다.
민종은 감격에 젖은 얼굴로 수한과 변이체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자, 이제 계산해야지? 처음 약속했던 것처럼, 기계 괴수의 시체 절반은 너희 거다.]
[당연하지!]
[어떻게 나눌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좌우로 정확히 2개로 나누자. 좌반신은 우리가 가질 테니까, 너희가 우반신을 가지도록 해.]
[좋아.]
기계 괴수의 몸이 하도 단단해서 둘로 나누기도 힘들었다. 이능력자들까지 동원되어 두 조각을 냈다.
변이체들이 자기들 몫을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녀석들과는 집단 의식을 유지하고 있노라니, 포만감과 행복감이 가득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한편, 기계 괴수 시체를 해체하여 가져온 트럭에 실었다.
무게도 엄청나고, 부피도 엄청났다. 차곡차곡 눌러 담아 겨우 올려놓을 수 있었다. 어찌나 무거웠던지 트럭과 SUV, ATV의 바퀴가 땅으로 파고들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번에는 제국인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넌지시 민종에게 물어보니, 대형 기계 괴수 중 제국인이 조종하는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다고 했다.
어째 광선검 기계 괴수보다는 움직임이 굼뜨다 했더니, 무인 병기라 그런 모양이었다.
수한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전투 한 번으로 레벨이 많이 올랐다.
저번 원정에서보다는 못해도, 한 번 전투로 10레벨이 상승한 것이다.
거기다가 체력, 의지, 위엄이 1씩 올라갔다. 반면 작전 계획과 전투 지휘는 변동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요즘에는 능력치를 올리기 어려워진 참인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외계인 하나가 수한에게 다가왔다.
쥬페르 행성인, 페롱 이사.
겹눈동자에 초록색 피부, 머리의 작은 뿔이 특징적이었다.
타이탄 공격대에 처음 출근했던 날 잠깐 마주쳤었는데, 수한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AA급 이능력자라고 했던가.
수한은 가볍게 인사를 했다.
[과찬이십니다. 공격대 모두가 고생을 했지요.]
[대리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작전이었지요. 변이체들을 끌어들인 것도 그렇고, 집단 의식도 그렇고, 이번 원정은 대리님 공이 정말 큰 것 같습니다. 우리 행성 같았으면 신께서 직접 치하하셨을 겁니다.]
[신이요? 맞아, 쥬페르 행성에는 신들이 실존한다고 했지요?]
[예. 상급신은 신계에 머무르며 행성의 생태계를 지키고, 하급신은 지상에 머물러 지방 하나를 자기 영지로 삼아 그곳의 종족들을 수호하지요. 그 분들 덕분에 기계 괴수들이 공격해 왔을 때도 막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신기하네요.]
여유가 생긴 김에 쥬페르 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신들이 지상을 활보하는 세상이라, 그들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했다.
그들의 보호를 받는 만큼 식량과 자원이 풍부했다. 대신 단점도 있었다. 신들의 전쟁에 쥬페르 행성인들이 병졸 노릇을 하곤 했던 것이다.
페롱 이사가 고개를 저었다.
[지구에 오기 전까진 몰랐습니다. 신께서 우리를 보살피니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가끔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게 지나쳐, 사람들끼리 서로를 증오하고 전쟁을 일으켜 죽고 죽이기도 하거든요.]
[뭐든지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페롱 이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민종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여기 계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사장님이야말로 고생하셨습니다. 다친 곳은 괜찮으세요?”
“이 정도야 견딜 수 있습니다. 분해 광선에 직격당한 것도 아닌데요. 뭔가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 보죠?”
“아, 예. 쥬페르 행성에 대해 듣고 있었습니다.”
“쥬페르 행성이라…… 아름다운 곳이죠. 변이체도 적당히 남아 있고요.”
민종은 수한을 몇 번이나 치하했다.
최 이사, 전술 이사, 특수 원정팀의 팀장들, 각 부서의 부장과 과장들이 저마다 수한에게 한 마디씩을 던졌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수한이 있어서 이번 작전을 죽은 사람 없이 끝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누군가 노골적으로 부럽다고 했다. 원정 끝나고 지급될 포상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는 것이다.
수한도 사실 기대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뭐 얼마나 되겠느냐며 웃어 넘겼지만.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기계 괴수 해체가 끝났다. 그걸 어떻게 트럭과 SUV, ATV에 나눠 실었는데, 그걸 차원문까지 가져가는 것도 힘들었다.
당장 강을 건너는 게 문제가 되었다.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공격대가 끙끙대고 있자 변이체들이 도움을 주었다. 트럭이나 SUV는 그냥 건넜지만, ATV를 등에 올리거나 하여 도강하게 해 준 것이다.
[고맙다.]
[뭘! 얼른 돌아가야 또 다른 녀석 잡으러 가지. 안 그래?]
[맞아, 맞아.]
수한이 고맙다고 하자 변이체들이 가볍게 대답했다.
벌써부터 새 변이체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다른 대형 기계 괴수가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사흘 뒤, 차원문이 있는 도시로 돌아왔다.
1주일 사이 주둔하고 있는 병력의 규모가 꽤 늘었다.
도시가 지구인들로 완전히 감싸여 있다시피 했다. 수천은 훌쩍 넘는 것 같았다. 듬성듬성 몰려 있는 기갑 장비의 수도 상당했다.
지구인들은 놀란 눈으로 타이탄 공격대를 보았다.
각종 차에 실린 기계 괴수의 시체가 무척 컸기 때문이다. 해체해 놓은 상태라 정확히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소형 기계 괴수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중형 기계 괴수를 잡았나 본데?”
“그런 것 치고는 부품이 크지 않아?”
“대형 기계 괴수다! 대형 기계 괴수의 절반만 쪼개서 가지고 온 거야!”
“뭐? 대형?”
대한민국 공격대 중에서는 처음으로 달성한 쾌거.
백호 공격대의 안경미 사장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타이탄 공격대를 따라오는 S급 변이체들과, 민종의 바로 옆에 있는 수한을 보고 있었다.
‘그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어야 했는데……’
몇 달 전의 영입 경쟁에서 이겼다면 대형 기계 괴수를 잡는 것은 타이탄 공격대가 아니라 백호 공격대가 됐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저절로 이가 갈렸다.
대형 기계 괴수 사냥 성공 소식은 지구인들만이 아니라 가브낙 행성인들, 그리고 하티아의 귀까지 들어갔다.
하티아가 당장 찾아왔다.
언제나 냉막하던 얼굴에 놀라움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대형 기계 괴수의 시체를 확인한 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단하구나. 대형 기계 괴수를 잡으려면 나도 다른 단원과 힘을 합쳐야 되는데. 소형 기계 괴수야 그렇다 쳐도, 대형까지 잡을 줄은 몰랐다.]
[과찬이십니다.]
수한의 통역을 들은 민종이 싱글벙글 웃었다.
내일부터 기계 괴수 시체를 지구에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계속 지원군이 몰려오는 까닭에, 시체를 보내는 데만 시간이 며칠은 걸릴 터였다.
하티아가 수한과 민종을 쳐다보았다.
[대형 기계 괴수를 사냥한 것을 보니, 그대들의 실력이 빼어나다는 것을 알 만하다. 그대들에게 제의할 것이 있는데, 들어보겠느냐?]
[말씀해 보세요.]
[얼마 전에 이 도시에 머물던 베르나와 이시테가 다른 도시로 이동한 것은 알고 있겠지? 이 근처에는 그대들의 활약 덕분에 더 이상 기계 괴수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그 둘이 이동한 도시 주변에는 꽤 많다. 그곳에 세라프 넷이 파견되어 있지만, 그들만으로는 대처가 힘들 정도다.]
[저희보고 거기로 가라는 겁니까?]
[그렇다. 거리가 머니 차원문을 통해 이동시켜주겠다.]
[저희끼리 의논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티아의 제안을 듣고, 모두들 고심에 빠졌다.
이미 원정의 목적은 차고 넘칠 정도로 달성했다. 소형 기계 괴수 네 마리에, 대형 기계 괴수 한 마리를 잡았으니까.
지구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기계 괴수를 더 잡아야 하나?
기왕 원정 온 김에 기계 괴수를 더 잡기로 중지를 모았다.
S급 변이체 다섯 마리의 존재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도 있지 않은가. 다른 행성에 원정을 가서 이렇게 성공적으로 기계 괴수를 잡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지금 최대한 사냥을 하려는 것이다.
대신 정보를 요청했다.
이동하게 되는 도시와 그 주위에 있다는 기계 괴수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이동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대들이 갈 도시는 가리오 대륙 북서쪽 끝에 있다.]
해안 도시.
낙베일 대륙과 가리오 대륙을 구분짓는 해협에 위치한 곳이라고 했다.
두 대륙의 무역으로 번성했던 곳. 처음 전쟁이 시작될 때는 기계 괴수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인근의 대도시들을 몰살시킨 후 이곳으로 몰려왔다. 더구나 낙베일 대륙에서도 가리오 대륙으로 기계 괴수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라프가 넷이나 파견되었지만, 그들로서도 방어에 급급한 상황. 반격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런 상태이니 타이탄 공격대가 도착하면 숨통이 트일 터.
타이탄 공격대는 부상자들과 기계 괴수 시체, 그리고 소수의 지원 요원을 남겼다. 그들이 부상자들과 기계 괴수 시체를 가지고 지구로 돌아갈 것이다.
아울러 하티아에게 예방 접종 역할을 하는 축복을 받았다. 가브낙 행성에 온지도 벌써 3주가 다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투를 비네.]
하티아가 손을 흔들었다.
붉은 빛이 타이탄 공격대와 다섯 변이체를 감쌌다.
세라프의 전당 밖으로 나오자, 바다 특유의 짠 내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수한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심각한데?”
“그러게.”
보이는 것은 잿더미와 허름한 천막 밖에 없었다.
본래 도시를 감싸고 있었을 성벽은 흔적만 남았다. 온전한 건물이라고는 보이지가 않았다. 오직 세라프의 전당만 잿더미 위에 외롭게 서 있었다.
천막 안에 쪼그리고 앉은 피난민들이 퀭한 눈으로 타이탄 공격대를 쳐다보았다.
변이체를 보고 놀랄 만도 한데, 그럴 기력도 없는지 앉아 있기만 했다. 지금까지 봤던 피난민들 중 가장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