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비 아이 -2- >
이시테가 마중을 나왔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네요.]
[잘 계셨지요?]
수한은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변이체들.
정신 제압을 당했던 기억 때문에, 지금도 감정이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수한은 부드럽게 그들을 달랬다.
기계 괴수들을 함께 잡던 기억을 상기시키자 그들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수한과 이시테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바깥으로 멀리 나가버렸다.
이시테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들을 잘 다루시네요. 일반적인 정신 계열 A급 이능력자라면 그게 힘들 텐데요.]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까요. 저들은 자기 의지로 제 말을 듣는 거지, 제게 제압된 게 아닙니다.]
[호호, 그야 그렇죠.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일까요?]
[예?]
뭔가 의미가 깃든 말에, 수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시테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돌렸다. 지금 있는 도시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었다.
매일 밤 기계 괴수가 공격해 온다고 했다.
공격에 나서는 기계 괴수만 무려 10마리.
세라프가 네 명이나 있는데도 방어하는 것으로 벅찬 이유가 있었다. 더구나 낙베일 대륙에서 기계 괴수들이 계속 건너오고 있다고 하니, 가면 갈수록 그 수가 불어날 것이다.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있었다.
카이저 공격대가 가져온 영상에서 본 기계 괴수.
그 기계 괴수가 이곳을 향해 천천히 진군해 오고 있다고 했다.
이시테가 타이탄 공격대에게 당부했다.
[저희는 도시 방어에 전념할 테니, 여러분이 기계 괴수의 수를 줄여주세요.]
[알겠습니다. 붉은 눈 기계 괴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요격할 인원이 곧 도착한다고 하네요. 그 분들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저도 언뜻 듣기만 했는데, 의회 의원님도 끼어 있다고 들었어요.]
[의회 의원님께서요? 그럼 걱정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세라프 종족의 의회 의원은 SSS급 이능을 가지고 있다.
그 위로는 오직 아홉 명의 최고 의원만 있다던가.
그들이 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형 기계 괴수도 혼자서 잡아 죽이는 괴물들이니까. 수한은 가벼운 마음을 한 채 그 내용을 타이탄 공격대에게 알렸다.
민종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세라프 종족까지 우리를 도와주네요. 그렇다면 그 놈은 걱정할 게 없겠습니다.”
“다른 공격대들도 좀 있으면 옮겨올 텐데, 그 전에 미리 많이 잡아두죠.”
“지금까지 한 것처럼 합시다. 소형부터 잡고, 대형이 남으면 대형을 잡는 게 좋겠습니다.”
“대형을 잡을 때 제국인이 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두는 게 어때요?”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요령은 전과 같았다.
기계 괴수 중 따로 떨어져 있는 녀석을 목표로 했다. 2마리씩 잡을 때도 있었고, 1마리만 잡을 때도 있었다. 가끔은 세라프들과 함께 작은 무리를 덮쳤다.
사냥은 순조로웠다.
시간이 지나자 타이탄 공격대 말고 다른 공격대도 합류했다. 그들도 모든 전력을 다 끌고 온 참이라, 해안 도시에 머무르는 전력이 엄청나게 불어났다.
국군도 도착했다.
국회에서 파병 결의가 드디어 통과된 것이다. 이능력자의 질은 떨어지지만, 수로는 공격대를 압도하는 집단이었다. 더구나 온갖 기갑 장비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걸로 중화 포탄이니 뭐니 물 쓰듯 폭격하면 기계 괴수도 쓰러뜨린다.
‘돈 엄청 썼겠네.’
공격대 같았으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저렇게 못 한다.
하긴 파병이니까. 종족 연합에게 그만한 보상은 받았을 것이다. 그게 재물인지, 기술 등 다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주둔 전력이 늘어나자 할 만 했다.
타이탄 공격대 말고 다른 공격대도 기계 괴수 사냥에서 성공하고 있었다. 변이체를 활용하는 공격대도 많았다. 도시 주위의 기계 괴수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우연히 알바트로스 공격대 사람들과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수한씨.”
갈태수 사장도 있고, 서상군 팀장도 보였다.
“예, 오랜만입니다. 기계 괴수 사냥에 성공하셨다면서요?”
“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알바트로스 공격대원들도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자력으로 기계 괴수 사냥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약 1달.
해안 도시는 이제 완전히 안정되었다. 인근에서는 기계 괴수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가리오 대륙 전체에서 기계 괴수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가리오 대륙에 주로 건너왔기 때문이었다. 원체 많은 수가 파병 온 탓에 가브낙 행성인보다 지구인이 더 많은 것 같았다.
타이탄 공격대는 슬슬 귀환하는 것을 고려했다.
원정 온지 벌써 2달이 다 되었다. 전리품은 벌 만큼 벌었다. 지구에서 힘의 결정 추출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했다. 이젠 돌아가서 재정비해야 할 때였다.
“낙베일 대륙이 문제네요.”
민종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가리오 대륙만이 아니라, 브뮤 대륙도 기계 괴수를 모두 잡아 죽였다. 지금은 기계 괴수가 남긴 X-0로 인한 변이체들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낙베일 대륙은 사정이 달랐다.
여전히 기계 괴수들이 득실거렸다. 처음 낙베일 대륙에 갔던 세라프 종족 중 절반은 죽고, 절반은 간신히 도망쳤다. 다른 것보다도 딱 한 존재가 문제였다.
카이저 공격대의 생존자들이 가져왔던 영상 속의 기계 괴수.
녀석이 접근해 오고 있었다.
변이체들과 어울려 기계 괴수를 잡느라 정보가 늦었던 최 이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놈은 세라프 종족이 맡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의원들도 왔다고 들었는데요.”
“의원 두 명과 단장급 세 명, 일반 세라프 여섯 명이 왔습니다. 그렇게 열한 명이 동시에 그 놈을 요격했는데, 도리어 반격당해 두 명이 죽었습니다.”
“예? 말도 안 됩니다!”
최 이사가 놀라 입을 떡 벌렸다.
하긴 수한도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일반 세라프도 수한의 입장에서 보면 무시무시한 존재다. SS급 이능을 몇 개나 가지고 있으니까. 단장급이면 많은 경험을 쌓고, 여러 직무를 두루 거쳐야 오를 수 있는 지위고.
거기다 의원이면 SSS급. 그렇게 11명이면 지구 전체와 맞서 싸울 수도 있는 전력이었다.
그걸 간단히 패퇴시키다니……
민종이 자신의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는 없었습니까?”
“예. 살아남은 아홉 명은 도시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다 나았을 겁니다. 어쨌든 기계 괴수가 진군하는 속도도 느려졌고요.”
“놈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귀환해야겠습니다. 낙베일 대륙을 공격하는 것은 포기해야겠고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사실 타이탄 공격대는 낙베일 대륙을 공격할 계획이 있었다. 단독 원정을 힘들겠지만, 세라프 종족에게 지원을 받는다면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 계획을 완전히 백지화했다.
자칫 잘못 걸렸다간 공격대 전체가 소멸할 판이었다. 아무리 S급 전력이 일곱이나 된다고 해도, 섣불리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회의 끝에, 민종이 결정을 내렸다.
“지구로 돌아갑시다.”
수호자 연맹을 찾아가 귀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수호자 연맹의 대표로 파견을 온 AA급 수호자가 난색을 표명했다.
“벌써 돌아가시게요?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습니다.”
“이미 주변 기계 괴수는 다 잡았는데 여기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낙베일 대륙 수복도 힘들 것 같은데요.”
“으음.”
타이탄 공격대가 그렇게 돌아가겠다고 하자, 다른 공격대들도 귀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졸지에 해안 도시의 핵심 전력이 빠지게 생겼다.
수호자 연맹과 국군은 그걸 반대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식을 들은 세라프 종족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다. 대신 그대들의 장비를 우리에게 주지 않겠느냐? 해안가에 요새를 세우려고 한다.]
[좋습니다.]
지휘 장갑차, 무반동총, 휴대용 미사일, 박격포 등 여러 장비를 세라프 종족에게 넘겼다. 그러자 세라프 종족은 피난민들을 동원하여 돌을 쌓아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구의 장비를 손보는 게, 겉보기에는 어설퍼 보여도 내용은 전혀 다를 것 같았다. 기계 괴수들을 겨냥하고 만들어지는 만큼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낭보도 전해졌다.
헤븐 행성에서 추가 전력이 당도했는데, 그들과 힘을 합쳐 진군해오던 기계 괴수를 돈좌시킨 것이다. 다리를 절반 넘게 부수고,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고 하니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무시무시했다.
세라프 종족이 스무 명이나 달려들었다. 그런데도 죽이기는커녕 돈좌시킨 게 최선이었다. 조금만 욕심을 부렸어도 세라프 종족이 전멸 당했을 거라고 하니, 기계 괴수의 위력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타나던 소형, 중형, 대형, 거대급의 체계에서 동떨어진 존재.
새로운 등급이 명명되었다.
왕(王)급.
별명도 붙었다.
왕관형의 몸체 위에 달린 거대한 눈 모양의 구조물이 특징적인 기계 괴수.
루비 아이.
해안 도시에서 낙베일 대륙 쪽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적색 광선이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하늘 위의 구름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난민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이제 타이탄 공격대가 가브낙 행성에서 할 일은 끝났다.
지구로 귀환했다.
워낙 전리품도 많고, 돌아갈 사람도 많아 며칠에 걸쳐 돌아가야 했다. 민종 및 이사들이 가장 먼저 떠나고, 변이체를 관리해야 하는 수한은 늦게 귀환하기로 했다.
변이체들이 섭섭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이제 간다고?]
[다음에 또 언제 와?]
[글쎄. 못 올 가능성이 높아. 다른 행성에도 가봐야지]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
[하하, 그건 안 돼.]
수한은 변이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새미는 아예 눈물을 글썽였다. 집단 의식으로 얘기도 많이 했고, 다섯 변이체를 무척 귀엽게 생각했던 터라 더 그런 모양이었다.
여전히 변이체들은 세라프 종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만약 피난민들이 변이체들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사단이 벌어졌을 것이다.
[꼬맹이, 너도 잘 가라.]
[너도 잘 있어.]
용이도 변이체들과 인사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티격태격 싸웠지만 그새 정이 든 모양이었다. 하긴 기계 괴수를 잡을 때마다 지휘 장갑차와 융합한 용이의 도움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세라프들도 찾아왔다.
베르나와 이시테.
바빠서 얼굴을 보지 못했었는데,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조심히 가라. 그 동안 고마웠다.]
[고마웠어요.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거예요.]
[저도 감사했습니다.]
[이름을 용이라고 지었다고 했죠? 용이를 잘 돌봐주세요. 용이는 많은 것을 경험하면 더 크게 자라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둘은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곤 돌아갔다.
세라프의 전당으로 들어가기 전, 수한은 낙베일 대륙 방향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루비 아이가 또 적색 광선을 뿜고 있었다.
그 광선을 보며 생각했다.
과연 가브낙 행성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
루비 아이를 잡으려면 SSS급 이능력자 서넛에, SS급 이능력자도 수십 명이 있어야 가능할 텐데……
수한은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언젠가는 내 공격대로 루비 아이를 사냥해야지.’
지구의 모든 공격대가 달려들어도 잡기 힘들 거라고 예측되는 루비 아이.
그런데 수한은 언젠가 루비 아이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예감을 느꼈다.
붉은 빛이 수한을 감싸안았다.
2달 만의 귀환.
습관처럼 레벨 업 도우미를 확인했다.
정확히 300레벨.
아울러 여섯 번째 초능이 한참 개발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