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 충격 >
언제였더라?
미현의 손을 잡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큰 소리를 땅땅 친 게.
그때 그랬었지.
사법 고시에 합격할 테니 결혼 반대하지 말라고.
본인의 머리를 믿고 큰 소리를 쳤는데, 결과는 2차 시험에서 미끄러졌다.
사실 1차 시험이라도 통과한 게 용했다. 아무리 객관식 시험이라고 해도, 팔지선다에 난이도도 무척 높았으니까. 명한이 좀 맹한 구석이 있어도 공부 머리 하나는 상당했던 것이다.
수한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게 뭐? 어차피 갔다 와야 하는데, 영장 나온 김에 다녀오면 되지.”
“남 일처럼 말하지 마.”
“요새 군대가 군대냐? 21개월로 땡이라며. 나는 만 5년, 60개월을 꽉 채웠거든?”
“잘 났다.”
“왜, 너도 부사관 신청해 봐. 개마고원으로 가면 아주 화끈한 군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걸?”
“됐어.”
명한이 입술을 삐죽였다.
수한은 입영 통지서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시간이 꽤 촉박했다. 다음 달 초, 수한이 원정을 떠나기 전에는 훈련소에 들어가게 생겼다.
수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입영 통지서는 원래 입영 일자 몇 달 전에는 발송이 될 텐데? 이거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금방 원인을 깨달았다.
“너희들 우편함에 그냥 편지 꽂아뒀구나?”
“아, 그게……”
“이메일도 같이 왔을 텐데 확인 안 했어?”
“스팸인지 알았어.”
“어휴. 국방부 홈페이지 들어가서 확인이라도 해봤어야지. 다음달 초라고 했지? 그럼 나 원정가기 전에 훈련소는 따라갈 수 있겠다. 머리 삭발해 놓으면 볼만 하겠는데?”
“형!”
명한이 불만족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수한은 그저 껄껄 웃었다.
대한민국 국군 중 가장 힘든 곳에서 군 생활을 해서일까. 이제 갓 영장이 나온 동생이 귀엽게만 보였다.
기한도 자기 머리를 긁었다.
“나도 신검 받았는데.”
“1등급 나왔지?”
“응.”
“어디 아픈 곳도 없고, 눈이 나쁘거나 키나 몸무게에 문제 있는 것도 아닌데 1등급이 안 나올 리가 없지. 축하해. 1년 뒤에는 너도 군대 가겠구나.”
“쳇!”
기한이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한 대 쥐어박을까 생각했다가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바로 손위에 형은 영장이 나오고, 자신은 신검에서 현역 판정을 받았으니 싱숭생숭 할 터였다.
명한이 갑자기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콧소리를 내며 수한에게 달라붙었다.
“혀엉!”
“뭐야? 징그럽게 시리. 저리 안 가?”
“동생을 위해서 뭘 좀 해 줄 생각 없어?”
“뭘?”
“알아보니까 이능력자 가족들은 공익 근무 요원으로 빠질 수 있다더라. 수호자 연맹이면 수호자 연맹, 아니면 공격대에 근무하는 식으로 대체 복무할 수 있다고 하던데, 형이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산업 기능 요원과 같았다.
국가가 이능력자에게 주는 특혜 중 하나였다.
이능력자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대체 복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수한처럼 성인이 된 이후에 각성했다면 모를까, 그 외에는 이 방법으로 병역 의무를 다하곤 했다.
수한은 코웃음을 쳤다.
“그건 이능력자 양성 학교 때문에 만들어진 거잖아. 나한테는 해당사항 없어. 뭐, 내가 요청하면 들어줄 것 같긴 한데 괜히 꼼수 쓸 생각 없다. 군대 갔다 와. 국방은 국민의 의무야.”
“끄응.”
명한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수한의 뜻은 완고했다.
부사관 출신이라서 그럴까.
수한은 아무리 자기 가족이라고 해도 지킬 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동생들만이 아니고, 나중에 아들을 낳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군대 좀 미룰까?”
“왜?”
“그냥. 굳이 빨리 갈 이유는 없잖아? 학교도 다녀야 하고.”
명한은 S대학교 법학과 2학년이었다.
11월이면 한창 학교를 다닐 때.
대전쟁 전만 해도 대학교 재학 중이면 자동으로 입영이 연기되었다. 그러던 것이 대전쟁 중에는 학교와 상관 없이 징병되는 것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입영 통지 후 재학증명서를 보내는 것으로 연기가 가능해졌다.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미루려면 미룰 수는 있다.
수한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야 한데 영장 나왔으면 그냥 가는 게 좋아. 나이 먹고 병사로 가면 정말 서럽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다녀와.”
“하아, 알았어.”
명한은 한숨을 폭 쉬었다.
다음 날부터, 명한은 거의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
걱정이 되어서 전화를 해보니 미현과 같이 있다고 했다. 그냥 데이트만 하는 게 아니라, 미현의 오피스텔에서 살다시피 했다.
군대 가기 전에 아주 끝장을 보려는 모양.
미현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한이는 잘 있어요. 지금 자고 있는데 바꿔 드릴까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가끔 집에도 좀 오라고 해주세요.]
[호호, 알았어요.]
동생들의 군대 문제 말고는 별 일이 없었다.
수한은 오랜만의 평온함을 즐겼다.
그러는 한 편 새미와 계속 데이트를 했다. 원정을 가면 항상 붙어 다녀서 그런지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가끔은 새미네 집에서 자고 와서, 홀로 남은 기한이 투덜거렸다.
“그럴 거면 아예 동거를 하지 그래?”
“동거는 좀 그렇잖아.”
“뭐 어때서? 내 친구들 중에 동거하는 애도 많아.”
“허, 대단하다 진짜.”
수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기껏 여섯 살 차이인데, 대전쟁 후 대호황을 몸으로 겪는 세대라 그런지 사고방식이 꽤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한편, 몰디브 여행 준비를 서둘렀다.
미드가르드 행성 연수 전에 갔다 오려면 얼른 출발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비행기 표도 구하고, 괜찮은 리조트를 하나 예약하는 것도 성공했다.
6번째 초능 개발이 끝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정확히 32일이 걸렸다.
수한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오래 걸리네.’
7번째는 64일이 걸릴 테고, 마지막 8번째는 128일이 걸리겠지. 1달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2달, 4달이라니……
초능창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누르자, 선택할 수 있는 항목들이 나타났다.
사실 지금 수한은 아쉬운 게 없었다.
속성 부여 덕에 공격력은 충분했다. 전신에 방어 장비를 착용한데다, 아음속과 초월자의 눈이 있으니 방어에도 충실했다. 정신 공격도 막아낼 수 있고, 아쉬우면 박명으로 자신을 강화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수한이 고른 초능과 중복되지 않는 계열을 꼽자면 총 일곱 가지.
거력, 강체, 감각, 구현, 영혼, 외능, 소환.
중복해서 고르면 손해다. 힘의 결정 흡수 효율 때문이었다. 같은 계열 같은 등급 힘의 결정을 흡수한다고 가정할 때, 처음에는 10점을 얻는다면 그 다음에는 2~3점을 얻으니 다양한 계열의 초능을 개발하는 게 좋았다.
일단 외능과 소환은 재꼈다. 동급의 이능에 비해 강하긴 하지만, 언제 외계의 힘에 오염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감각도 필요 없다. 초월자의 눈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까.
강체 계열을 선택할까?
일단 강체 계열을 A급까지 올리면 많은 이점이 있다. 특히 소총까지는 무시할 수 있다는 게 컸다. 저격당하더라도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일이 얼마나 있겠냐는 게 문제.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아.”
수한은 문득 탄성을 질렀다.
자신에게 약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다.
속성 부여는 기본적으로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오직 총알에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
수한이 소지한 마법 소총과 마법 권총은 총알 충전이 가능하지만, 총을 빼앗기거나 분실하면 어떻게 되나.
단검을 들고 신속 이능으로 저항은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수한의 전력이 10% 이하로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두 번째 공격용 초능이 필요한 시점이다.
수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동안 운이 좋았지 싶었다. 총 없이 적을 만났을 때가 없었으니까.
맨몸으로도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초능이 필요하다.
대표적이라면 역시 거력 계열과 구현 계열.
구현 계열을 골랐다.
물론 거력 계열도 매력적이다. 아음속과 함께 쓰면 상당히 재미를 볼 수 있었다. 문제는 근접전만 가능하다는 것.
이왕 고를 거, 기왕이면 원거리 공격도 가능하면 좋지 않겠나.
사실 수한이 노리는 건 한 가지 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 이야기.
수한은 염력 구현 항목을 선택했다.
역시나 무수히 많은 세부 항목들이 떠올랐다.
불, 바람, 얼음, 번개, 빛, 그림자, 힘, 나무 등등.
뭘 고를까 하다가 번개를 골랐다.
새미가 뇌전 생성 이능을 가지고 있어서 익숙했기 때문이다. 또 나중에 새미와 함께 사용하면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얻은 초능이 전기 충격.
몰래 한 번 써보았는데, 호신용 전기 충격기 정도의 화력은 나왔다. 사거리가 없다시피 해서 지금 당장은 써먹기 힘들지만, 힘의 결정을 흡수하면 쭉쭉 성장할 것이다.
남겨 놓은 초능 점수를 쓰면 바로 진화시킬 수 있지만 좀 아깝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힘의 결정을 쓰는 게 더 낫겠지.
막 이것저것 실험을 해보고 있는데, 용이가 눈을 빤히 뜨고 수한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해.]
[응? 왜?]
[모르겠어. 입이 간질간질해.]
수한은 초월자의 눈으로 용이를 살폈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해하는데, 용이가 수한을 툭툭 건드렸다.
[아까 그거 다시 해 봐.]
[아까 그거?]
[전기 충격 말이야.]
수한은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전깃불이 허공으로 뛰쳐나갔다. 용이가 그 광경을 홀린 듯한 눈으로 보았다.
뭘 하려는 건지, 작은 입을 오물거린다.
혹시? 하는 생각이 수한의 머리를 스쳤다.
용이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집단 의식이 활성화되며, 수한이 보는 세상 위에 용이가 보는 세상이 덧씌워졌다.
그 상태에서 전기 충격을 썼다.
파직!
[우왓!]
용이가 깜짝 놀랐다.
제 주둥이에서 작은 번개가 튀어나갔기 때문이었다.
수한은 몇 번이나 전기 충격을 사용했다. 그때마다 용이의 입에서 전기가 발사되었다.
내친 김에 초월자의 눈, 아음속, 박명, 속성 부여 모두 써 보았다.
모두 쓸 수 있었다. 속성 부여는 용이가 자기 몸보다 큰 권총을 들어야 하니 힘들지만, 나머지는 어렵지 않게 시전이 가능했다.
용이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내가 이능력자가 됐어! 우와, 이능력자 용이다!]
[하하하, 그래그래.]
수한은 수호자 연맹의 차원 백화점을 방문하여 구현 계열 힘의 결정을 구입했다.
아직 배당금이 입금된 건 아니지만, E급과 D급 힘의 결정을 살 돈은 있었다. 그걸 구입하여 흡수한 뒤, 새미에게 자랑을 했다.
새미가 수한을 축하해 주었다.
“축하해, 오빠. 이러다 12 계열 다 각성하는 거 아냐? 세라프 종족들처럼.”
“에이, 설마.”
내친 김에 용이의 새로운 능력도 보여주었다.
용이가 재주를 넘으며 허공에 전기를 토하자, 새미가 신기하다고 박수를 쳤다.
“우리 용이 대단한데? 이런 거 처음 봐!”
용이는 으스대며 황금색 눈을 빛냈다. 괜히 아음속을 써서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수한은 쓰게 웃었다.
용이의 새로운 능력을 확인한 건 좋은데 좀 귀찮긴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수한에게 초능을 사용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저렇게 좋아하니 귀찮음을 감수하는 보람이 있었다.
새미가 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유, 우리 용이. 원반던지기 놀이할까?”
[좋아! 좋아!]
새미가 힘껏 원반을 던졌다.
구현 계열 능력자여도 일반인보다는 근력과 체력이 월등했다. 그러다 보니 원반이 경쾌하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팡!
용이가 날개를 떨쳤다.
아음속을 쓰니 비행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간단히 원반을 낚아챘다. 그걸 물고 돌아와 강아지처럼 새미를 올려다보았다.
새미가 활짝 웃었다.
“잘 했어! 한 번 더 할까?”
[응응!]
수한은 느긋하게 둘이 노는 것을 지켜보았다.
반려동물 기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용이로 대리만족을 할 모양이었다.
하긴 이능력자는 혼자 살면 반려동물을 기르기가 힘들다. 원정 한 번 나가면 한 달 넘게 집을 비우는 게 허다하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어느덧 10월 말이 다가왔다.
몰디브로 떠나는 날.
돌아오고 나면 명한의 입대일이 되고, 훈련소에 데려다주고 나면 미드가르드 연수가 시작되겠지.
둘은 인천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몰디브로 향하는 비행기가 활주로 위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