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몰디브 -2- >
말레 공항이 위치한 곳은 훌루레 섬.
말레 섬과의 해상 교통도, 훌루말레 섬과의 육상 교통도 완전히 봉쇄되었다. 용이로 돌아보니, 바다는 구현 계열 이능력자가 막고 있고 길쭉한 도로는 강체 계열 이능력자가 막고 있었다.
좀 더 들어갔다.
용이가 저절로 색깔을 바꿨다. 은색에서 검은색 무광으로 바뀌자, 여간해선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눈에 띄지 않게 저공비행하며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초월자의 눈을 발현했다.
그러자 물체 투시 능력이 발휘되며 장애물 너머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뒤에는 쉬웠다.
슬금슬금 공항 안을 다 돌아보았다. 들킬 것 같으면 숨고,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주의하며 날았다.
그러다 총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이능력자가 아니었다.
험상궂은 얼굴, 두툼한 근육에서 백전용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경계가 삼엄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대신 바깥에서 초월자의 눈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안이 보였다.
민간인 열 명 정도가 붙잡힌 채, 한 군데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딱 한 명, 수한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존재했다.
화사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 우윳빛 피부가 매력적인 여인.
프랑스 대통령궁에서 만난 적이 있는 메리 공주였다.
영국 왕실은 권력을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 명목상이나마 영연방의 수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백 년 간 쌓은 인맥은 여전히 공고하기 짝이 없었다.
가브낙 행성에서 돌아온 날 봤던 뉴스가 생각났다.
메리 공주가 흥분하여 테러 사건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할 거라고 인터뷰하고 있었지.
아마 그때 사건과 연관이 있는 모양.
메리 공주 말고 다른 인질들도 좋은 옷에 좋은 장신구를 갖고 있는 게 보통 사람은 아닌 듯했다.
이만큼 확인했으면 됐다.
그 다음으로는 이능력자들의 정체를 확인했다.
얼굴은 어차피 봐도 몰랐다. 하지만 그 등급과 수는 초월자의 눈으로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수십 명이 몰려왔지만, 그들의 머리 역할을 하는 것은 세 명의 AA급 이능력자.
각각 정신, 구현, 강체 계열.
용이에게 돌아오라는 생각을 전달하자, 용이가 조용히 공항을 빠져나왔다.
눈을 뜨니 새미의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알아냈어.”
“뭔데?”
“저번에 프랑스에서 메리 공주님 만났던 거 기억나?”
“아, 그 영국 공주님? 꽤 예뻤던 것 같은데.”
“그 공주님이 몰디브에 와 있어. 용이로 정찰했는데, 테러범들한테 잡혀 있더라.”
“뭐?”
새미가 눈을 크게 떴다.
수한은 자신이 알아낸 것을 모두 알려주었다.
얘기를 들은 새미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그 공주님이면 우리가 구해줘야 하는 거 아냐? 받은 것도 있잖아.”
도버 해협 사건 당시, 수한과 새미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마법 소총과 천지격변 장신구를 받았다.
시가로 수십, 수백억씩 하는 물건들.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하긴 했지만, 그 덕에 퍽 좋은 감정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을 몰랐으면 모를까, 메리 공주가 잡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은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둘 다 강력한 이능력자 아닌가.
수한은 허리에 찬 단검을 쓰다듬었다.
“내가 가서 처리할게. 자기는 여기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가야지!”
“너무 위험해.”
“흥, 그러는 오빠는 안 위험하고? 나도 방어막 기능 물품은 있어. 멀리서 번개만 쏘면 돼. 정 위험할 것 같으면 아까 프랑스 인들한테도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그게 좋겠다.”
끌로에는 강체 계열 이능력자였다. 그녀 새미를 호위해준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엔조와 끌로에만 불러 사정 설명을 했다.
“메리 공주라고요? 맙소사!”
“왜 그러십니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메리 공주는 루브르 공격대장과 연인 사이입니다. 루브르 공격대장의 동생이 수호자 연맹 프랑스 지부장이고요. 그녀만 납치해도 영국과 프랑스, 양국을 협박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보다 사정이 급했다.
수한이 도움을 청하자 둘은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브르 공격대장에게 신세진 적도 몇 번 있어서, 빠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리조트의 지배인을 불러내어 수상비행기를 한 대 빌렸다. 이 와중에도 상당한 돈을 요구했는데, 두 말 하지 않고 지불했다. 괜히 사실을 얘기하는 것보다는 돈으로 처리하는 게 쉬웠다.
용이가 돌아왔다.
수상비행기에 결합시켜 조종하게 했다. 몸체가 까맣게 물들고, 용의 비늘 같은 문양이 표면에 생겼다. 비행기 앞쪽이 용의 머리처럼 변하는 것을 프랑스 인들이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신기하네요. 단순히 정찰용이 아니었나 봅니다.”
“괜히 제 비밀무기가 아니지요.”
바람이 꽤 잦아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거센 편이었다. 일반적인 수상비행기라면 이륙하기 어려웠다.
수한은 차라리 보트를 타려고 했는데, 용이가 그럴 필요 없다고 해서 수상비행기를 빌린 거였다. 자신이 제어하면 충분히 날아갈 수 있다고 해서 그 말을 믿기로 했다.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휘청거리면서도 어쨌든 날기는 날았다. 속도도 빨랐다. 섬으로 올 때의 속도 보다 조금 더 빠른 것 같았다.
30분 후 말레 섬 인근에 도착했다.
전신을 까맣게 물들인 채, 세 섬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내려앉았다. 더 이상은 소음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육지가 고작 2, 300미터 앞에 있었다.
수한은 셋을 돌아보았다.
“헤엄칠 줄 아세요? 새미야, 자기는 어때?”
“걱정 마. 나 수영 잘 해.”
“저도 이 정도는 가능합니다.”
“파도가 거치네요. 그래도 저기까진 어떻게 갈 것 같습니다.”
이능력자들이 훌루레 섬을 보면서 말했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동 작전으로 갑시다. 메리 공주를 납치할 정도의 세력이면, 우리들 얼굴을 알아볼 겁니다. 세 분은 훌루말레 섬과 훌루레 섬을 잇는 도로를 탈환해 주세요. 거기엔 AA급 강체 계열 이능력자가 있으니 쉽지 않을 겁니다. 시선만 끌어줘도 되요. 그 사이 제가 인질들을 구출하겠습니다.”
“혼자서 가능하시겠습니까? 너무 위험한데요.”
수한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새미도 염려하는 기색이긴 했지만, 많이 걱정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자신 있으니까 하는 거죠. 제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일을 벌인 게 놈들의 실수입니다.”
“오빠, 그래도 조심해. 방심하지 말고.”
“걱정 마.”
바다로 뛰어들었다.
파도가 거칠었지만 특유의 근력을 발휘해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해안에 도착했다.
새미를 비롯한 세 명은 북동쪽으로 움직였다. 여전히 총 소리가 울리는 게, 지금도 전투가 벌어지는 듯했다.
수한은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단검을 한 번 가볍게 만졌다. 그림자 칼날이 뿌연 회색빛을 토하더니 수한을 뒤덮었다. 수한의 몸이 번들거리다가 밤의 어둠 속에 묻혔다.
기계 괴수조차 파악하기 어렵다는 은신 능력.
의식적으로 몸을 굽히고 걸었다. 장애물을 최대한 활용했다. 조심스럽게 공항을 향해 접근했다.
메리 공주가 붙잡힌 곳은 공항 북쪽의 한 건물.
아까 용이를 통해 보았을 때 남쪽은 불바다가 되었고, 북쪽은 그나마 좀 멀쩡했다. 인질만이 아니라 테러범들도 그곳에 모여 있었다.
섬의 절반을 가로질렀다.
총을 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공항에 집중되어 있는 듯했다. 하기야 테러범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수백 명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윽고 공항에 도착했다.
활주로와, 공항에 정지해 있는 비행기들이 보였다. 비행기 중 상당수가 불타고 있어 상당히 안타까웠다.
이제 허허벌판.
더 몸을 낮췄다. 걸리지 않게 주의하며 접근했다.
때마침 북동쪽에서 하얀 번개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쿠르릉, 쾅쾅!
눈에 익은 색채였다.
새미가 강체 계열 이능력자와 맞붙은 것.
1대 1의 결투라면 누가 승리할지 알 수 없다. 새미의 이능이 테러범의 이능을 찢어놓을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테러범이 새미의 공격을 견딜 수도 있는 거니까.
엔조와 끌로에가 따라붙었으니 충분히 이길 거라고 봤다.
혹시라도 그 둘이 테러범의 끄나풀일까 싶어, 몰래 그들의 마음을 훔쳐보았다. 다행히 메리 공주에 대한 걱정과 테러범들에 대한 분노가 그들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어, 걱정하지 않고 셋을 보냈다.
“퀘스기스배스?”
“어전스! 에터다키!”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수한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 특유의 억양을 들으니 어느 나라 말인지는 알아냈다.
프랑스 어.
뭔가 정치적인 문제가 끼어 있는 모양이었다.
차 몇 대가 수한이 숨어 있는 곳을 지나갔다.
힐끗 보니, 자동소총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용병들이 잔뜩 타 있었다. 그만큼 공항을 지키는 전력이 약해진 것이다.
깨진 창문을 통해 잠입했다.
지금도 용이가 활발하게 공항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한이 잠입할 경로를 정찰하기 위해서였다. 용이의 도움 덕에, 수한은 공항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한동안은 수월했는데, 절반쯤 가자 CCTV의 기능이 살아있는 곳이 나왔다.
은신 상태라 여간해서는 들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용이에게 생각을 전달했다.
[해킹해.]
[나한테 맡겨!]
지휘 장갑차와 융합하면서 전자 장비를 다루는 모습을 본 뒤였다. 써먹지 않는 게 이상했다.
CCTV가 보내는 화면을 살짝 왜곡했다.
상황실도 이미 테러범들이 점거한지 오래지만, 이래서야 수한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경비병이 있으면 돌아가고, 가끔은 용이로 소리를 내게 해 시선을 분산시킨 후 지나갔다. 그렇게 해서 금방 인질들이 잡혀 있는 방 앞에 도달했다.
이곳만은 경계가 철통같았다.
총을 든 자들이 사방을 돌아다녔다. 통로란 통로는 모두 감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능력자도 몇 명 보였다.
수를 세 보았다.
정확히 서른 명. 이능력자도 B급, C급은 되어 보이는데 여섯 명이나 되었다.
‘어쩐다?’
조용히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은 물론, 창문까지 물 샐 틈 없이 경비하고 있으니까.
집단 의식이 아니라 세뇌 계통으로 초능을 진화시켰으면 유용하게 써먹을 텐데, 조금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수한은 조용히 권총에 속성을 부여했다.
마비 속성.
테러범들의 위치는 용이와 초월자의 눈을 통해 파악해 놓은 뒤였다. 그들 외에는 위협적인 존재가 보이지도 않았다. 이들을 제압하고 인질들을 확보하면, 밖에 있는 자들이 뭘 어쩔 것인가.
다 죽이는 것은 피하기로 했다.
그러나 죽여야 하는 순간이 오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몰디브의 군경과 시민들을 학살한 테러범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정도로 수한의 마음이 여리지는 않았다.
수한은 권총과 단검을 강하게 쥐었다.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셋, 둘, 하나.
가볍게 몸을 날렸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테러범의 뒷목을 단검 자루로 세게 후려쳤다. 테러범이 끽 소리도 못하고 허물어졌다.
그러느라 수한의 모습이 드러났다.
옆에 있던 테러범이 놀란 눈으로 수한을 보았다.
급히 들고 있던 소총을 들었다. 그걸 수한에게 겨누려고 하지만, 수한이 몇 배는 더 빨랐다.
왼손에 든 권총을 쏘았다.
탕!
묵직한 총성과 함께, 마비 속성이 부여된 총알이 테러범의 허벅지에 꽂혔다.
“커헉!”
테러범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총소리를 들은 테러범들이 깜짝 놀랐다. 수한이 있는 쪽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몇 명은 총을 들고 뛰어왔다.
쌍권총을 난사했다.
인근의 테러범들이 몽땅 쓰러졌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팔과 다리를 맞췄지만, AA급 이능력자의 마비 속성을 견디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쀠땅 메흐드!”
이능력자 하나가 달려들었다.
전신에 황동색 기운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강체 계열 이능력자였다.
그래봐야 B급, 수한에겐 가소롭기만 한 존재.
천공 속성을 부여한 뒤 왼쪽 허벅지에 대고 탕 쏘았다. 이능의 방어막이 뚫리고 허벅지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테러범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다가 쿵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