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저런 일들 >
비행시간은 정확히 9시간이 걸렸다.
공항의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자,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까맣게 몰려들었다.
둘은 아주 질색을 했다.
몇 달 전 도버 해협 때 보다 더 극성이었다. 마이크와 카메라를 코앞까지 갖다 댔다. 입에 거품을 물고 둘을 향해 질문을 퍼부었다.
“수한씨! 새미씨! 한 마디 부탁합니다!”
“몰디브에서 테러범들을 제압하셨다면서요?”
“메리 공주를 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테러범들의 정체가 뭐였습니까?”
“제압 과정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겨우 그들을 헤집고 빠져나왔다.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한이 몰디브에 가 있는 동안, 차는 동생들이 몰았다. 그것을 미리 공항에 대놓고 있다가, 둘이 차에 타자 얼른 출발시켰다.
기자들이 좀비처럼 쫓아왔다.
수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죽는 줄 알았네.”
공항에 내릴 때만 해도 단정하던 옷이 흐트러져 있었다. 단추가 떨어진 곳도 몇 군데 보였다.
옆에 앉은 새미는 그나마 큰 차이가 없었다. 수한이 앞장서서 기자들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새미도 수한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새미가 수한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그래도 빨리 빠져나와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오늘 집에 못 갈 뻔 했어.”
“그러게 말이야. 어째 저번에 유럽 갔다 왔을 때보다 더 심해진 것 같지 않아?”
“그런 것 같아.”
새미를 먼저 집에 데려다 주었다. 집으로 가면서, 운전 중인 명한을 쳐다보았다.
“모레 입대랬지?”
“응. 내일 머리 깎으려고.”
“너도 군대에 가는 구나…… 선임들 좋은 사람 만나야 할 텐데 걱정이다.”
“모르겠어. 요샌 그냥 싱숭생숭해. 개마고원만 아니면 좋겠어. 거긴 아직도 D급 나온다며.”
명한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입대 이틀 전.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
가족의 곁을 떠나 전장으로 가는 거니까. 가능성은 낮지만, D급 변이체와 싸워야 할 수도 있었다.
수한은 집에 돌아가 푹 쉬었다.
쉰다고 몰디브에 간 것인데, 갑자기 테러범들과 얽혀 정신적인 피로가 좀 쌓인 것이다. 육체적인 피로야 융숭하게 대접을 받으며 다 풀었지만, 정신적인 면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내리 이틀을 집에서 뒹굴었다. 새미와 통화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명한의 입대 날이 되었다.
요 근래 계속 미현의 집에서 잤지만, 오늘만은 집에서 잔 터였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났는지 명한의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논산으로 1시 반까지 가야 된 댔지?”
“응. 미현이 누나도 올 거래.”
“제수씨 오피스텔에 들렀다 가야겠네.”
수한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째 날이 좀 어둑어둑했다.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되어 있었다.
“비 올지도 모르겠다는데?”
“비 오면 안 좋아?”
“좋을 건 없지.”
아침은 명한이 좋아하는 반찬으로 채웠다.
입맛이 없는지 젓가락으로 깨작거리기만 했다. 결국 공기를 반도 비우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수한은 혀를 찼다.
“더 먹지 왜?”
“그냥 입맛이 없어서.”
“훈련소 들어가면 제대로 못 먹을 텐데, 지금 많이 먹어두는 게 좋아.”
“그건 알지만……”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벌써 9시.
서울에서 논산까지는 2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미현까지 데려가려면 시간을 더 넉넉히 잡아야 했다.
미현을 태우고 하염없이 남쪽으로 달렸다.
양재, 성남, 수원, 오산, 평택, 천안, 공주……
오전 11시 반, 드디어 논산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명한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대문짝처럼 커다랗게 걸린 육군훈련소 방향 표지판을 본 것이다.
수한은 시계를 확인한 뒤 말했다.
“점심 먹고 들어가야겠는데?”
“여기 식당들 별로라던데?”
“아주버님, 훈련소 앞에 말고 시청 근처가 괜찮대요.”
“그래요?”
시청 근처에서 소고기를 먹었다.
식당은 괜찮았다. 반찬도 푸짐하게 나오고, 고기는 사르륵 녹았다. 수한은 오랜만에 허리띠를 풀고 포식을 했다.
명한도 열심히 고기를 먹었다.
입맛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미현이 옆에서 젓가락으로 집어주자 곧잘 받아먹는 것이다.
주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시간에 맞추어 논산 훈련소 입소대대로 갔다.
거의 시간이 다 되었다.
연병장에 벌써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걸 보자 명한이 심란한지 한숨을 폭폭 쉬었다. 옆에서 미현이 명한의 팔을 잡고 위로해주었다.
한 차례 예행 연습 끝에, 입대식이 시작되었다.
줄 맞춰서 서고, 선서를 하고, 인사를 하고,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았다.
기껏해야 20분.
옆에서 미현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수한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할까.
‘별 일 없어야 할 텐데……’
지금도 전시는 전시.
왕왕 변이체에게 당해 순직하는 이가 나오곤 했다. 그밖에도 알려지지 않은 사건사고가 상당히 많았다.
수한은 부디 몸 성히 돌아오기만을 빌었다.
이윽고 입대하는 청년들이 모두 연병장을 벗어났다.
당분간은 입소 대대에 있다가, 며칠 후 훈련소로 옮겨갈 것이다. 그 다음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하겠지.
원정을 다녀온 다음에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터.
훌쩍이는 미현을 위로하며 서울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이었다.
갑자기 스마트폰이 울음을 터뜨렸다.
새미인가 싶어 확인하니 다름 아닌 민종의 전화번호였다.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 수한씨. 몰디브는 잘 다녀왔어요? TV에서 봤습니다. 테러범들을 잡았다면서요?]
[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어째 수한씨가 가는 곳은 사건이 끊이질 않네요. 인터넷에서 수한씨한테 별명이 몇 개 붙었는데, 혹시 알고 있습니까?]
[아, 예. 저도 봤습니다. 일본 탐정 만화 주인공들 이름이 별명으로 붙었던데요?]
[알고 계셨네요. 아, 이것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닙니다. 실은 청와대에서 수한씨와 새미씨를 한 번 보자고 하는데, 시간이 괜찮은지 싶어 전화한 겁니다.]
[청와대에서요?]
[예. 저번 도버 해협 때도 그렇고, 이번 몰디브 건도 그렇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수한씨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 덕분에 외교 분야에서 분위기도 좋고, 최근에 몇 가지 성과도 있었다고 하네요. 대통령님이 그걸 치하하려는 것 같습니다.]
[청와대라……]
나쁘지 않은 얘기다.
지금부터 미리 안면을 익혀 두면, 나중에 수한이 하려는 일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어렵지 않게 승낙했다.
[저는 좋습니다. 새미도 같이 가야 하는 거죠?]
[그렇지요. 오찬 때가 좋겠다는데, 언제가 편합니까?]
[전 아무 때나 좋습니다. 연수 전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요.]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내일로 약속을 잡겠습니다.]
[좋습니다.]
대통령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둘을 맞이했다.
이능력자는 아니지만, 대전쟁 당시 상당한 활약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쯤 없었을 지도 몰랐다. 그 업적을 발판 삼아, 2012년의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두 분께서 이번에 큰일을 하셨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덕분에 우리나라가 정말 많은 이익을 보고 있습니다. 벌써 대영, 대불 수출이 전에 비해 20%가 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EU 전체에서 수출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거기까진 몰랐습니다. 우리나라에 저희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오찬 시간 동안 적당히 한담을 나눴다.
별 내용은 없었다. 그저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거였으니까.
하지만 수한에게는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대통령과 안면을 텄고, 비서실장과 연락처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편의를 봐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수한이 공격대를 만들 때 도움이 되겠지.
오후에는 청와대를 한 번 쭉 돌아보았다.
대통령에게 초청 받은 것이어서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구역도 구경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싶어 타이탄 공격대에 전화를 해보았는데, 전리품 집계가 거의 끝나간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입금은 좀 늦게 될 것 같아요.]
[왜요?]
[한꺼번에 입금을 해드리면 공격대가 파산할 지경이에요. 정산해야 하는 금액이 너무 많아서요.]
[그게 얼마나 되는데요?]
[이번 원정에서 우리 공격대가 번 게 30조가 넘어요. 그럼 15조 원이 배당금으로 나가야 된다는 뜻인데, 그만큼 현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서요.]
총무부 직원의 말에 수한은 깜짝 놀랐다.
하긴 기계 괴수를 10마리가 훨씬 넘게 잡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체는 변이체들에게 많이 넘겼지만, 동력핵은 모조리 거둬왔으니까.
잠깐, 그럼 수한에게 떨어지는 게 얼마나 되는 거지?
원정 당시 수한의 배당은 200몫이었다. 당시 워낙 많은 사람이 참가했으니 배당율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상당할 것이다.
그걸 묻자, 총무부 직원이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대리님 배당은 1668억 원이네요. 연수 다녀와서 조금씩 입금되기 시작할 거예요.]
상당하다.
저번 원정 배당이 340억 원이었으니, 거의 그 다섯 배에 가까웠다. 여기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포상금 같은 것까지 생각하면 초대박이라고 할 만 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었다.
1668억이라?
그거면 다섯 개의 초능 모두를 AA급으로 올릴 수가 있었다.
잠깐.
어쩌면 S급 힘의 결정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긴 S급 힘의 결정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공급이 문제였다. 워낙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마침내 연수를 떠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수한은 짐을 챙기고 새미를 데리러 갔다. 새미도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왔다.
“자기 뭘 그렇게 많이 챙겼어?”
수한은 캐리어 하나가 전부인데, 새미는 캐리어 두 개로도 모자라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새미가 가슴을 쭉 내밀었다.
“여자는 원래 짐이 많은 법이야!”
“하하, 알았어.”
하나둘 타이탄 공격대 사옥에 모여 들었다.
개인당 허용된 짐은 딱 50킬로그램.
커 보이지만 사실 넉넉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공항에서 수하물 처리해주는 무게가 23킬로그램 내외니까. 수한의 경우엔 총 세 자루에 단검만 더해도 무게가 15킬로그램이 넘어갔다.
“여, 수한씨!”
특수 원정 1팀의 팀장인 석구가 손을 흔들었다.
몇 달에 걸친 원정으로 사이가 꽤 돈독해진 참이었다.
수한은 석구가 입은 옷을 보고는 픽 웃었다.
“팀장님, 옷을 멋진 놈으로 입으셨네요?”
“하하, 말이 연수지 사실 단체로 놀러가는 거 아닙니까? 관광 가는 거니까, 옷도 그렇게 맞춰 입어야죠.”
석구가 낄낄 대며 웃었다.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티셔츠에 털이 복슬복슬한 다리를 내놓은 반바지를 입었다. 어디 하와이라도 가는 건지 밀짚모자를 쓰고 파란색 패션 시계를 찼다.
다른 사람들도 참 각양각색이었다.
파티 드레스를 입은 사람, 등산복을 입은 사람, 원정 나갈 때처럼 완전 무장한 사람……
오전 10시가 되었다.
출발하기 위해 모이라고 했던 시간.
민종이 격려 차 잠깐 훈시를 했다. 저번 원정에서 모두 수고했다며 치하하고, 연수 후 더 힘을 내서 공격대를 발전시키자는 골자의 내용이었다.
“출발 합시다!”
3천 명이 동시에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세라프의 전당도 수용 용적이라는 게 있으니까.
10개 조로 나뉘었다.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이동했다. 수한과 새미는 다행히도 가장 처음으로 세라프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새미가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새미를 한 팔로 살짝 끌어안자, 붉은 빛이 둘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