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수 첫 날 -2- >
민종이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박수가 잦아들자 말을 이어나갔다.
“특히, 이번 원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공격대도 기계 괴수를 몇 번 잡은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적지 않은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모두 여러분이 분전하신 덕분입니다.”
한참이나 뻔한 말을 늘어놓았다.
우렁차던 박수 소리가 차차 약해지자, 사원들이 집중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다음 부분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번 원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아마 그 분들이 아니었으면, 이 정도 대성공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 순간, 좌중의 시선이 수한에게 집중되었다.
수한은 짐짓 딴청을 피웠다.
새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말 하나 봐!”
“모르지. 나 말고도 활약한 사람은 많잖아.”
민종이 허공에 손짓을 했다.
홀로그램들이 변화했다.
가브낙 행성에서 촬영한 장면이 나왔다.
기계 괴수와 싸울 때, 변이체를 사냥할 때, 각종 사고가 발생했을 때 등등.
민종이 하나하나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읊었다.
“지원 9과의 한시영 대리님은 변이체들의 갑작스런 습격을 일찍 눈치채서 대원들을 일찍 대피시켰습니다. 특수 원정 2팀의 김다영 주임님은 가브낙 행성인들에게서 기계 괴수의 약점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여 공략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전투 1과의……”
그들을 앞에 불러다 포상까지 주었다.
품목은 다양했다.
힘의 결정, 이능 장비, 금일봉.
그렇게 불려나간 사람만 100명이 넘어갔다. 사람들 모두 혹시라도 자기 이름이 불릴까봐 귀를 쫑긋 세웠다.
“특수 원정 1팀의 윤새미 주임님…… 최 이사님……”
새미가 받은 것은 흰 날개가 달린 앙증맞은 구두.
보기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AA급 장비였다. 저걸 신고 있으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던가.
이제 수한만 빼고 불릴 사람은 다 불렸다.
수한은 가슴이 가볍게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민종이 수한의 이름을 불렀다.
“특수 원정 1팀의 이수한 대리님. 다들 아시지요? 이번 원정을 도와줬던 S급 변이체들을 끌어들인 게 바로 이수한 대리님입니다. 정신 계열 이능으로 기계 괴수 공략에 결정적인 역할도 했고요.”
수한은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포상들도 엄청났다. 과연 수한은 뭘 받을지, 모두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수한이 단상 앞에 서자, 민종이 손뼉을 한 번 쳤다.
바람 엘프들이 까불거리며 큰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큰 연회장을 장난스럽게 한 번 크게 돌더니, 수한이 답답하여 가슴을 칠 무렵에야 그걸 민종에게 가져왔다.
민종이 상자를 수한에게 건넸다.
“풀어보세요. 깜짝 놀랄 겁니다.”
도대체 뭔데 저렇게 호언장담을 하는 걸까?
상자를 열었다.
흰색의 날렵한 옷 한 벌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쪽이 새의 깃털 같은 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단추는 오묘한 빛깔의 보석으로 만들었다. 은실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겨 놓았는데, 백색 바탕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을 본 순간, 수한은 숨을 멈췄다.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세라프 날개 장식 전투복.
S급 장비.
레벨 업 도우미로 따지면 전설 등급.
방어력이 탁월한 물건이었다. 물리 공격, 이능 공격, 광학 공격 모두에 대해 강력한 방어력을 제공했다. 옷의 색을 바꿀 수도 있고, 짧은 시간 동안 빛의 날개를 소환해 하늘을 나는 것도 가능했다.
수한의 표정을 보고 민종이 씩 웃었다.
“진짜는 옷 안에 있습니다. 찾아보세요.”
옷 안?
혹시?
수한은 옷 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딱딱한 물체 하나가 만져졌다.
야구공 크기.
힘의 결정 모양 황금 장식품.
그 표면에 S 글자가 선명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싶은데, 민종이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설명했다.
“지금 우리 공격대가 기계 괴수의 동력핵을 가공하는 중입니다. 가공하는 게 끝나면 S급 힘의 결정이 나오겠지요? 그것들 중 원하시는 계열의 S급 힘의 결정을 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아직 완성된 게 아니니, 그 의미에서 그걸 드리는 겁니다.”
S급 힘의 결정!
저번에 귀띔을 듣긴 했지만 정말로 줄 지는 몰랐다.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가며 까다롭게 굴 줄 알았는데.
수한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너무 과분한 물건을 받는 것 같습니다.”
“에이, 이 정도는 드려야지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수한은 옷과 황금 장식품을 들고 물러나왔다.
옷을 만지작거리는데,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흡사 머리카락 몇 개만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새미가 호들갑을 떨었다.
“오빠! 그거 헤븐 행성에서 나오는 거 아냐? 갑옷 말고 전투복 중에서는 최고급이라고 하던데!”
“맞아.”
“축하해! 역시 오빠는 좋은 거 받을 줄 알았어.”
“고마워. 참, 자기도 축하해. 신발 괜찮은 거더라.”
“응, 난 안 그래도 발이 느렸는데 앞으로는 마음을 놔도 될 것 같아.”
“다행이야.”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한바탕 떠들썩한 축제와도 같았다.
민종은 몇 마디 덕담을 늘어놓은 뒤 퇴장했다.
벌써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홍보부장이 다시 올라왔다.
“자, 이제 오늘의 마지막 순서로 넘어가겠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앞으로 4주 일정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뭐 별 게 있을까?
기껏해야 단체로 몰려다니면서 사진이나 찍고, 먹고 마시는 게 전부겠지.
그런데 홍보부장이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기껏 미드가르드까지 왔는데, 지구에서처럼 단체로 움직이면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 좀 섭섭하겠죠?”
“당연하죠!”
“자유 여행 합시다, 자유 여행!”
“전 그림자 엘프들의 지저 왕국을 보고 싶어요!”
“전 바다 엘프들의 해저 왕국!”
“하하하,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자유 여행을 원하면 자유 여행을! 그게 아니라 정해진 대로 가고 싶으신 분은 저희가 마련한 경로대로 가면 됩니다!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세요!”
수한은 깜짝 놀랐다.
자유 여행이 가능하다고?
하긴 3천 명이나 되는 인원이었다. 이들을 다 통제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홍보부장이 주의를 주었다.
“단, 엘프들이 금지하는 행위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엘프들은 고지식한 종족이라 그 즉시 추방해 버리니까요. 특히 강력 범죄를 저지르면 지구에서 처벌을 받습니다. 항상 조심, 또 조심하세요.”
홀로그램이 변화했다.
미드가르드 행성이 허공에 떠올랐다.
맑고 투명한 푸른색과 초록색으로 뒤덮인 행성.
거기에 선명한 붉은 점이 여섯 개 찍혔다.
세계수, 영원의 샘, 청색 대해, 그림자 산맥, 왕관 도시, 달의 사원.
각각 다른 엘프 인종이 지배하는 권역.
홍보부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고로 단체로 움직이는 분들은 이 여섯 곳을 모두 돌아볼 겁니다. 접근이 제한된 곳도 최대한 가까이 갈 예정이고요. 거리가 머니까 차원문을 이용해서요. 다른 분들은 차원문 이용을 한 번은 지원해 드리지만, 그 이상은 사비를 쓰셔야 합니다.”
“여섯 군데 다?”
“대단한데?”
“공격대에서 작정하고 돈을 쓰나 봐!”
수한은 눈을 번뜩였다.
아무리 같은 행성 내라고 해도 차원문 이용은 막대한 돈이 들었다. 상여금에 포상까지 생각하면, 이번 원정으로 번 수익의 절반은 사용하는 것 같았다.
원래 수한은 어떻게든 빠져서 새미와 오붓하게 여행을 다니려고 했다. 그런데 저걸 보니 조금 흔들렸다.
새미도 꺅꺅 비명을 질렀다.
“어머! 저렇게나 많이 갈 줄은 몰랐어!”
“어떻게 할까?”
“글쎄? 어떻게 하지?”
새미가 고민하자, 수한이 묵직하게 말했다.
“그냥 우리끼리 다니자. 차원문 한 번은 이용하게 해준다니까 세계수 말고 다른 곳은 볼 수 있어. 아니면 여기도 교통편이 잘 발달되어 있으니까 그거 타고 가도 되고.”
“좋아! 나도 둘이 다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자유 여행은 따로 신청을 받았다.
대부분은 단체 여행을 선택했다. 미드가르드 행성의 명소 여섯 곳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바람 엘프들이 나와 작은 목걸이를 나누어 주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수정판이 금줄에 꿰여 있었다. 수정판에서 맑은 빛이 간헐적으로 새어나왔다.
위치 추적 기능이 달린 물건.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준비한 거였다.
홍보부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비싼 거니까 잃어버리지 마세요. 나중에 다 반납하셔야 합니다.”
바람 엘프들이 임시 주인 인식 절차를 도와주었다. 그러자 수정판에서 빛나던 광채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이 목걸이가 미드가르드 행성에 체류하는 동안 신분증 및 전자 화폐 기능을 한다. 따라서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
밤 동안 목적지를 정했다.
세계수.
아까 엘프들에게 들은 내용도 있지 않나. 용이가 성장할 지도 모르니, 한 번은 가봐야 했다.
그 다음에는?
영원의 샘을 가기로 했다.
온 김에 가장 유명한 곳을 보고 가자는 것이다. 더구나 세계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서두르면 차원문을 이용하지 않고도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면 총 세 곳을 보는 셈.
나머지는 나중에 또 와서 가면 될 것이다.
아침을 먹자마자 출발했다.
히미아실부터 크리맛실까지는 기껏해야 5백 킬로미터 거리.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사슴 마차를 타고 가도 되고, 바람의 정령들이 끄는 하늘 수레를 타고 가도 좋다.
“하늘 수레 타자!”
“하긴 마차는 지구에서도 탈 수 있으니까. 아니지, 영원의 샘에 갈 때 한 번 타볼까? 하늘 수레는 대수림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던데.”
“좋아!”
근처의 나무 속을 통해 히미아실 상층부로 올라갔다.
하늘 수레를 타는 곳은 가장 높은 나무에 위치했다.
어제 보기도 했던 바람의 정령들이 깔깔대며 주위를 지나쳤다. 작은 배 같기도 하고, 어쩌면 직사각형 상자 같기도 한 것들이 정령들의 손에 잡혀 둥둥 떠 있었다.
바람 엘프가 정령들 틈에 앉아 작은 악기를 불었다.
둘이 다가가자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다.
[지구인분들이시네요! 하늘 수레를 이용하실 건가요?]
[예. 크리맛실로 가려고 합니다.]
[오호, 크리맛실! 세계수를 보러 가시나 보죠? 하지만 이계인들한테는 잘 개방하지 않을 텐데요?]
[안 되면 어쩔 수 없지요. 가까이라도 가보려고 합니다.]
[하긴 크리맛실까지는 세계수의 영험함이 미치니까요. 그 영험함이 대단해서, 이능력자도 아닌 엘프가 S급 이능력자를 꺾은 적이 있다니까요!]
[뭐라고요?]
수한은 깜짝 놀랐다.
바람 엘프가 히죽 웃었다.
[마엘른이라고 했던가? 그런 이름일 거예요. 그 일 이후론 크리맛실의 수호검이라고도 불리죠.]
[어떤 분인지 궁금하네요.]
[우리 엘프들의 자랑이에요. 세라프 식대로 이능을 각성하지 않고 엘프 검술을 익혀도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주신 분이거든요.]
[기회가 되면 한 번 뵈어야겠습니다.]
[힘들 걸요? 바쁘신 분이라서요. 어휴, 내 정신 좀 봐. 이만 보내드릴게요. 목걸이만 잠깐 보여주세요.]
목걸이를 보여준 후 하늘 수레에 탔다.
바람 엘프가 정령들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정령들이 고개를 끄덕인 후 제 자리에서 크게 빙글빙글 돌았다.
합창하듯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쌩 달려나갔다.
“꺄악!”
갑작스레 가속도가 붙자, 옆에서 새미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수한은 가볍게 웃으며 새미를 안아주었다.
안전띠는 필요 없었다. 바람의 정령들이 둘을 감싸고 있으니까. 정령들은 둘을 놀리듯 낄낄 대면서도, 빼곡이 들어찬 나무의 가지 사이를 질주했다.
금방 히미아실을 벗어났다.
푸르른 숲이 펼쳐졌다.
대수림.
미드가르드 숲 엘프들의 고향이자 영토.
푸른 잎사귀 위를 스치며 달리자, 크리맛실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