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114화 (115/254)

< 세계수 -1- >

하늘 수레가 크리맛실 위에 내려앉았다.

수한은 크리맛실을 한 번 살펴보았다.

크리맛실은 히미아실과 분위기가 좀 달랐다. 히미아실은 높은 나무들을 파내어 만든 공중 도시였는데, 이곳은 그보다 확연히 낮고 두툼한 나무들을 재료로 썼다.

성벽처럼 나무들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고지대에 있어 방어에 용이하고, 성벽 역할을 하는 나무에 여러 대형 병기가 설치된 것이 보였다.

“여기 오니까 세계수가 더 잘 보여!”

새미는 수한과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지척으로 다가온 세계수.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코 끝으로 그윽한 향기가 파고들었다. 새들이 우짖는 소리가 종소리처럼 맑게 울려 퍼졌다.

용이가 수한의 품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코를 킁킁 댔다.

[좋은 냄새! 어제 맡은 냄새가 나!]

[그래?]

[더 가까이 갔으면 좋겠다!]

하늘 수레 역에서 내려왔다.

나무들이 오밀조밀하게 서 있었다. 도시 중앙에 유독 큰 나무가 몇 그루 연속해서 보이는데, 그곳이 아마 영주성이지 싶었다.

수한은 먼저 세라프 문자로 편지를 적었다.

세계수 개방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편지였다. 이계인이 세계수에 접근하려면 영주의 허락이 필요하니까.

신원도 AA급 이능력자 둘이라고 정확히 밝혔다. 크리맛실의 영주씩이나 되는 엘프가 아무나 만나주진 않을 테니까. AA급이면 그래도 얼굴 정도는 보여주지 않겠나.

영주성의 경비병에게 주자,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새미가 용이를 껴안은 채 말했다.

“잘 됐으면 좋겠다.”

“그러게. 꼭 진화시켰으면 좋겠는데.”

다행히 이야기가 잘 풀린 것 같았다.

경비병이 둘을 안에 들어오게 했다.

긴 복도를 따라갔다. 영주성도 나무 속을 파내 만들어서 파릇한 내음이 났다.

작은 서재에서 영주를 만났다.

풀을 엮어 만든 옷을 입고, 꽃관을 쓰고 있었다.

히메르아.

별빛 숲 일족의 가주.

엘프 특유의 맑은 눈으로 두 지구인을 응시했다.

[세계수에 가시길 원하신다고요?]

[예. 이 녀석이 곧 성장할 것 같은데, 세계수 근처로 가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한은 용이를 내밀었다.

용이가 날갯짓을 하더니 히메르아에게 안겼다.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히메르아에게 머리를 비볐다.

히메르아가 놀란 얼굴로 용이를 내려다보았다.

[신기한 마법 생물이네요. 지구에서 태어난 건가요?]

[아뇨. 세라프들이 만든 겁니다.]

[아, 어쩐지…… 이질적인 느낌과 함께 친숙한 느낌이 듭니다. 정령과도 비슷한 점이 있네요.]

[그렇습니까?]

[이 아이 때문에 세계수로 가는 건가요? 다른 이유는 없고요?]

[예. 근처에만 갈 수 있으면 만족합니다.]

[좋아요. 세계수에게 위해를 주지 않는다면 영주의 직권으로 여러분을 통과시키도록 하겠어요. 단, 세계수에게 티끌만한 상처라도 입힌다면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세계수는 다양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열매를 먹으면 모든 질병과 상처가 치료된다. 가지를 소지하고 있으면 이계의 어떤 병원균이나 기생충도 육체를 범접할 수 없었다. 잎사귀로 몸을 덮으면 힘의 결정 흡수 확률이 확 올라간다.

따라서 세계수의 부산물을 탐내는 이들이 많았다. 엘프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수한의 진심을 느낀 히메르아가 편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고 하려는데, 안쪽의 문이 열리며 작은 엘프 하나가 걸어 나왔다.

작은 엘프는 히메르아를 보고 세라프 어로 칭얼거렸다.

[엄마, 나 아파.]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다.

히메르아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뮤시아! 누워 있지 않고?]

용이를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작은 엘프에게 달려갔다.

수한은 작은 엘프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숲 엘프는 흰 피부에 초록색 계통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다. 개중 전사 계급만 피부가 어두운 편이었다.

그런데 뮤시아라는 엘프는 좀 달랐다.

얼굴에 털이 좀 많았다. 언뜻 드러나는 손등에는 각질처럼 껍질이 일어나 있었다. 머리카락도 까만색이었다. 히메르아를 빼다 박은 푸르고 맑은 눈이 아니었으면 혈연관계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히메르아가 품에서 작은 열매를 하나 꺼냈다.

달짝지근한 향기를 풍기는, 선명한 붉은색의 열매였다.

[뮤시아, 약 먹자. 아 하렴.]

[아.]

열매를 먹자 뮤시아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용이가 수한의 어깨로 날아왔다.

[쟤는 어디가 아픈 거야?]

[그런 얘기하면 못 써.]

새미가 주의를 주었지만, 엘프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아픈 건 사실이니까요.]

[우와, 아기용이다!]

오히려 용이가 뮤시아의 주의를 끌었다.

뮤시아가 달려와 용이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린아이다운 천진함에 수한은 용이를 내어주었다. 뮤시아가 용이를 끌어안았는데, 용이도 그게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느라 언뜻 뮤시아의 귀가 보였다.

수한의 눈이 깊어졌다.

엘프의 쭉 뻗은 귀가 아니다. 훨씬 더 뭉툭하고, 다소 두툼한 느낌을 주었다.

이종족 혼혈.

혹시 이렇게 아픈 것도 그 때문일까?

그럴 거라 짐작은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마엘른입니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물처럼 담담한 기색의 엘프가 들어왔다.

가벼운 풀잎 옷을 입고, 허리에는 길쭉한 은빛 검을 찼다. 나뭇잎 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된 게,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마엘른은 히메르아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말했다.

[영주님. 곧 세계수의 열매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벌써요?]

[저번 차원의 틈을 봉인하면서 생긴 부상자들을 치료하느라 열매 소모가 예상보다 빨랐습니다. 사흘 분량만 남았습니다.]

[사흘 분량…… 세계수에 다녀와야겠네요.]

[엄마, 나도!]

뮤시아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히메르아가 측은한 빛을 내비쳤다.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얘도 데려가면 안 돼?]

뮤시아가 용이를 세게 끌어안았다.

용이는 주둥이로 뮤시아의 얼굴을 애교스럽게 툭툭 쳤다. 그 감촉이 좋은지 뮤시아가 꺅꺅 웃었다.

히메르아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수한과 새미를 한 번씩 보더니,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두 분의 여행에 제 딸을 동행시켜도 될까요? 아픈 아이긴 하지만, 마엘른님이 따라갈 테니 폐는 끼치지 않을 겁니다.]

수한은 새미와 의논을 했다.

다른 이들은 다 세라프 어로 말하고 있는데 혼자만 소외되고 있던 것이다.

사정을 들은 새미가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해, 오빠. 용이도 진화시키고 아픈 애 약도 가져다 주면 좋지. 그런데 어디가 아픈 거래?”

“그건 모르겠어. 사실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둘이 허락하자 뮤시아가 용이를 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처음 보는 용이가 무던히도 마음에 들었나 보다.

마엘른이 뮤시아를 잡아 끌었다.

[자, 뮤시아. 이제 잘 시간이다. 영주님이랑 손님들 이야기 할 수 있게 방에 가자.]

[응, 삼촌! 아기용아, 내일 또 보자!]

뮤시아는 마엘른의 손에 이끌려 서재를 나섰다.

히메르아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엘프들은 감정 변화가 적다고 알고 있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 한숨에서 애틋한 마음이 절절이 스며나왔다.

수한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따님이 많이 아프신 모양입니다. 세계수의 열매는 한 알만 먹어도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픈 게 아니니까요.]

[아픈 게 아니다…… 괜한 것을 물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휴! 아닙니다.]

히메르아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곧 감정을 추슬렀다. 처음 보았을 때의 얼굴로 돌아가더니 시종을 한 명 불렀다. 수한과 새미가 쉴 곳을 안내해달라는 것이다.

[내일 오전 늦게 출발할 거예요. 그때까지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종은 둘은 손님용 방으로 데려갔다.

방은 특별히 화려하진 않았지만 참 안락했다. 푹신한 풀 침대에 누운 채 뒹굴거렸다.

새미가 또 뮤시아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아까 걔, 엘프 맞아? 좀 다른 것 같던데.”

“하프엘프 같아.”

“아 진짜? 어쩐지…… 그럼 하프엘프라서 아픈 거야?”

“얘기하는 투가 그런 것 같았어. 병에 걸린 게 아니라고 하더라. 이종족 혼혈 부작용이거나 종족 고유의 문제인가 봐.”

“안 됐다. 애는 착하던데.”

“그러게 말이야.”

세계수의 열매도 통하지 않으면 수한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안타까워 혀를 찼다.

아직 해가 지기까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방에서 좀 쉰 후,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엘프들이 둘을 보고 묘한 눈빛을 보냈다. 지구인들이 왜 여기에 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몇몇은 엘프 어로 투덜거리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 없어 그냥 넘어갔지만, 그리 좋은 내용은 아닐 거라 짐작했다.

그들을 무시하고 정원을 거닐었다.

한 바퀴 쭈욱 돌아봤을 때였다. 슬슬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한 무리의 엘프들과 마주쳤다.

노인들이다.

하나같이 은빛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그들이 둘을 보더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개중 한 명이 둘 보고 들으라는 듯 세라프 어로 크게 말했다.

[이젠 인간까지 끌어들이는군!]

[저들이 트롤 아이를 세계수까지 호위해 간다 하오.]

[흥, 마엘른님은 어째서 트롤 아이를 비호하는지 모르겠소. 누이의 자식이라 하나, 엄연히 다른 혈통이 아니오?]

[별빛 숲 일족의 직계는 이제 마엘른님 밖에 남지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소.]

[애초에 율법을 어긴 자를 영주위에 올려서는 안 되었소.]

[직계가 둘 밖에 남지 않았으니 어찌하겠소? 마엘른님께서는 한사코 고사를 하셨는데.]

[그야 그렇소만.]

트롤 아이?

뮤시아를 말하는 모양이다.

아버지가 트롤이라면 뮤시아가 왜 그렇게 아픈 건지 이해가 갔다.

미드가르드의 트롤은 자라면서 극심한 성장통을 겪는다. 그걸 이겨내야 막강한 재생력을 자랑하는 진정한 트롤이 된다.

성장통이라고 무시하지 마시라.

강인한 트롤들도 절반 이상이 성장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성인이 되면 친지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일 정도였다.

몸이 아픈 것도 서럽다.

더구나 뮤시아는 혼혈이라고 경원시하는 이들도 있지 않나.

“안 됐다.”

설명을 들은 새미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오빠, 좋은 방법 없어? 뮤시아가 너무 불쌍해.”

“같이 있는 동안 즐겁게 해주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는 것 같아.”

“히잉.”

다음날 오전 늦게, 뮤시아가 일어나는 대로 출발했다.

뮤시아가 용이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기용 안녕!]

[안녕!]

세계수까지는 사슴 마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빠르기는 하늘 수레가 몇 배는 빠르다. 하지만 승차감이 좋은 편은 아니어서 뮤시아가 견디기 힘들었다. 조금 늦더라도 안정적인 사슴 마차가 더 나았다.

동행하는 것은 마부를 비롯하여 총 다섯.

영주의 딸이 포함된 일행치고는 참 단출한 숫자였다.

[제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히메르아가 초췌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사슴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돌 하나 없이 깔끔한 흙바닥이 지평선 너머까지 깔렸다.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주위 경관도 볼 만 했다.

마법이 걸린 마차라 승차감이 아주 좋았다. 지구의 최고급 승용차를 타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뮤시아는 쉬지 않고 용이와 장난을 쳤다. 반면 마엘른은 검을 무릎에 얹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세계수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수한이 묻자, 그제야 눈을 떴다.

[멀지 않소.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할 거요.]

[가깝네요.]

[괜히 크리맛실이 관문 도시라 불리는 게 아니외다.]

뮤시아와는 달리 참 말이 없는 엘프였다.

뭔가 더 할 말도 없었다. 수한도 입을 다물었다.

점심은 히메르아가 챙겨 준 샌드위치로 해결했다. 지구식이고, 관광객용으로 정화까지 되어 있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세계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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