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115화 (116/254)

< 세계수 -2- >

“우아아!”

새미가 탄성을 질렀다.

멀리서 봤을 때도 압도적인 느낌을 풍기던 세계수였다. 가까이서 보니 거대한 갈색 벽을 보는 듯했다.

사슴 마차가 세계수 안으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세계수 안에 도시가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거쳐 온 엘프 도시와 같았다. 차이점이라면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다는 것이었다.

대기가 무척 청명했다.

미드가르드 행성의 대기 자체가 맑지만, 이곳은 한술 더 떴다. 세계수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몸의 찌든 때가 모두 벗겨져 나가는 듯했다.

더구나 공간 전체에 어떤 힘이 느껴졌다.

생명 그 자체라고 할까.

[하아아……]

뮤시아가 길게 숨을 쉬었다.

세계수의 힘이 뮤시아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창백하던 뮤시아의 얼굴에 뽀얀 빛이 감돌았다.

마엘른이 뮤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끝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세계수의 힘을 흩어버렸다.

성장을 촉진시켰다가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까.

뮤시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마엘른이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뭐라고 달래주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용이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여기 좋아! 진짜 좋아!]

스스로 뮤시아의 품을 벗어나더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수한의 어깨에 한 번 앉았다가, 새미의 품에 한 번 안겼다가, 사슴 마차 밖으로 나갔다가 아주 부산을 떨었다.

그러다가 공중에 멈춰 선 채, 쌔액쌔액 숨을 쉰다.

세계수가 용이에게 반응했다.

공간 전체에 스며들어 있던 세계수의 힘이 저절로 용이를 향해 모여들었다.

진녹색의 빛이 어렸다.

용이에게 내재되어 있던 어떤 힘이 출렁였다. 그릇에 가득 찬 물처럼 고여 있다가, 최후의 한 방울이 떨어지자 폭발하듯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새미가 탄성을 질렀다.

“진화하고 있어!”

그 말대로였다.

우드득, 우득.

콩 볶는 듯한 소리가 났다.

용이의 몸이 제멋대로 꺾이고 있었다.

날개가 찢어졌다. 관절이 토막 났다. 네 개의 발이 갈라졌다. 몸통에도 금이 가며, 속의 부품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그 사이로 진녹색 빛이 스며들었다.

진녹색 빛이 용이의 몸에 난 상처를 수복했다. 그러면서 용이의 몸이 자꾸 커졌다. 지금까지는 수한의 손바닥 크기였는데, 이젠 수한의 팔뚝 정도 크기가 된 것이다.

용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수한에게 내려왔다.

신기한 눈으로 자기 몸을 둘러보더니 말을 건다.

[내가 커졌어!]

크기만 변한 게 아니다.

다소 통통하던 체형이 날렵해졌다. 동글동글 귀엽던 얼굴도 조금 각이 졌다. 앙증맞던 뿔도 좀 더 날카롭게 변했다.

아기에서 청소년이 됐다고 할까.

새미가 눈을 반짝였다.

“우리 용이, 이제 나이 먹었네?”

[나이가 뭐야?]

“호호, 그런 게 있어.”

새미가 용이를 껴안고 비비적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뮤시아가 발을 동동 굴렸다.

[나도, 나도!]

수한은 미소를 띤 채 용이를 둘러싼 쟁탈전을 바라보았다.

레벨 업 도우미의 장비창.

그곳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기계용의 등급이 전설+에서 절대+로 변한 것이다.

절대 등급이니 SS급이 되었다는 얘기일 테고, 아직도 성장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 같다.

설마 SSS급까지 가는 것일까?

마엘른이 축하를 해주었다.

[축하하오. 목적을 이루셨구려..]

[감사합니다. 크리맛실의 영주님께서 세계수 출입을 허가해주신 덕입니다.]

[이제 우리 볼 일을 봐도 되겠소? 이곳에 오래 있으면 뮤시아에게 좋지 않소.]

[그렇게 하세요.]

세계수의 열매는 위로 한참을 올라가야 된다고 했다.

마엘른은 뮤시아를 아예 자기 무릎에 앉혔다. 세계수의 힘이 흡수되려고 할 때마다 푸른 기운을 뿌려 그 힘을 흩었다.

그래서인지 뮤시아가 침울한 기색을 보였지만, 용이가 재롱을 부리자 금방 헤헤거리며 웃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의문이 생겼다.

세계수의 힘이 뮤시아의 성장통을 유발시키는 것 같은데, 굳이 데려온 이유가 뭘까?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사슴 마차가 세계수 안을 달렸다.

긴 원형 도로를 뱅글뱅글 돌았다. 하염없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도 목적지에 닿지 않아서, 중간에 있는 작은 여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여정에 꽤 지친 모양이었다. 뮤시아는 밥도 먹지 않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수한은 새미와 함께 여관 밖으로 나왔다.

세계수 안이라 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신령한 동물들이 있었다. 몸에서 빛을 내는 새라든지, 유니콘을 닮은 뿔 달린 말이 주위를 노닐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세계수 안을 구경하는데, 마엘른이 지친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뮤시아는 괜찮습니까?]

[결계를 쳐 놓았으니 밤 동안에는 별 일 없을 거요]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세계수의 힘이 뮤시아에게 무리가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하자, 마엘른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렇다오. 하지만 데려오지 않을 수도 없소. 평소에 복용하는 세계수의 열매에는 특수한 약물을 첨가하는데, 그게 뮤시아의 몸을 축내기 때문이라오.]

[아, 세계수가 뿜어내는 생명의 힘을 주기적으로 공급 받아야 하나 봅니다.]

[바로 맞추셨소.]

마엘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주로 뮤시아의 건강 문제에 관해서였다.

처음 보는 수한에게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 지구의 문물로 뮤시아의 건강을 되찾아 줄 수는 없느냐는 것이다.

수한은 입맛을 다셨다.

[만약 지금 뮤시아가 겪고 있는 게 트롤의 성장통이라면 제가 알고 있는 지식 내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었소?]

[어제 영주성에서 엘프 노인들이 하던 말을 들었습니다.]

[장로들이? 그들의 말은 잊어버리시오. 가당치도 않은 말을 하는 자들이니까.]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대화가 끊겼다.

새미가 옆에서 궁금하다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세라프 어로 대화하는 까닭에 자꾸 겉도는 것이다.

조만간 통역 이능이 걸린 물건이라도 하나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엘른이 여관 앞에 설치된 난관을 쓰다듬었다.

주저하는 눈치더니 혼잣말처럼 몇 마디를 읊조린다.

[뮤시아의 건강을 찾아주는 자가 있다면, 내 검을 그에게 바치더라도 아깝지 않으련만……]

그 말에 수한의 귀가 쫑긋 섰다.

하늘 수레 역을 지키던 바람 엘프가 그러지 않았나.

크리맛실의 마엘른은 S급 이능력자를 꺾은 적도 있다고. 타이탄 공격대의 페롱 이사처럼, 마엘른을 영입하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뮤시아를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내친 김에 정확히 물어보았다.

[트롤의 성장통이라면 그냥 기력을 보충시켜주면서 보고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안 되니까 문제라오. 트롤들도 절반이 죽어나가는 게 성장통이오. 하프 엘프는 얼마나 더 심하겠소? 바위 엘프라면 견딜 수도 있겠지만, 숲 엘프 혼혈이라면 불가능한 얘기요.]

[아하, 그래서 뮤시아의 성장을 억제하신 겁니까?]

[통찰력이 대단하오. 그렇소이다. 우리들도 인위적인 방법을 쓰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소. 정상적으로 성장통을 겪을 경우 뮤시아가 죽을 확률이 100%에 수렴하니까.]

독으로 성장을 억제하고. 그러다가 생명력이 약해지면 세계수로 데려오고. 세계수에 의해 성장이 촉진되면 또 독을 써서 막고.

악순환이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겁니다.]

[맞소.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지. 뮤시아도 나이가 많이 들어서, 길어봐야 몇 년이 남았을 거요.]

[길어봐야 몇 년……]

입맛이 썼다.

들어보니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몸에 좋다고 알려진 것일수록 성장통을 자극시키기만 하지, 뮤시아의 고통을 경감시키지는 못 했다. 딱 하나, 극독을 첨가한 세계수의 열매만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마엘른이 한 마디를 남겼다.

[그대 지구인들은 인간 종족 중에서도 사고 방식이 가장 유연하다고 들었소. 이렇게 동행하게 된 것도 인연이니, 혹시 좋은 방법이 떠오르면 지체 없이 말해 주었으면 하오. 뮤시아는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아이라오. 뮤시아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소.]

[한 번 궁리해보겠습니다.]

마엘른이 안으로 들어갔다.

어깨가 유난히 축 쳐져 있었다.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무슨 얘기 했어?”

새미의 질문에, 마엘른과 나눴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그걸 듣더니 새미가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우리가 도와주자! 분명히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나도 돕고는 싶은데, 트롤의 성장통은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냐. 자기가 알아서 견뎌내야 되는 거지.”

“외부에서 도와주면 안 돼? 미드가르드에 치료약들 좋은 거 많잖아.”

“치료약이나 치료 이능 쓰면 오히려 고통이 더 강해진대. 그래서 트롤들은 자기 성장통 시작되면 혼자 동굴에 들어가서 견딘다고 들었어.”

“그럼 견딜 수 있게 해주면 되겠네.”

“그야 그렇지만 반은 엘픈데 그게 가능할…… 아!”

수한은 갑자기 손뼉을 쳤다.

한 가지 생각이 섬광처럼 머릿속에서 번뜩였기 때문이다.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따지고 보면 아주 간단한 생각이라, 엘프들이 설마 이걸 놓쳤을까 싶기도 했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마엘른을 불러냈다.

[무슨 일이오?]

[생각해 봤는데, 뮤시아에게 강체 계열 이능을 각성시키면 어떻겠습니까?]

마엘른의 눈이 번쩍였다.

[강체 계열 이능을?]

[예. 트롤들은 체력이 강하고 재생력이 있으니 성장통을 견디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뮤시아에게도 비슷한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겁니다.]

[일리가 있소. 강체 계열 이능이라……]

그런데 마엘른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율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자연 각성이라면 모를까, 힘의 결정 흡수는 성인 엘프에게만 허용되었다. 미성년 엘프가 힘의 결정을 흡수할 경우 정체성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아서 생긴 율법이었다.

율법 중에서도 상위의 율법이라, 어긴 자는 모조리 추방한다던가.

수한은 율법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히메르아와 마엘른이 결정할 문제니까.

대신 자신의 박명 초능에 대해서만 설명해 주었다. 뮤시아가 강체 계열 이능 각성에 성공하면 그때부터는 수한이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엘른이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수한은 마엘른을 일깨워 주었다.

[어차피 히메르아님과 의논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세계수 열매를 가져가는 것에 집중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대의 말이 옳소.]

뮤시아가 일어나자 사슴 마차를 출발시켰다.

계속 달리고 달렸다.

드디어 세계수의 열매들이 맺혀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신관들이 출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마엘른과 뮤시아가 출입증 역할을 했다. 둘을 본 신관들이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 뮤시아를 보는 그들의 얼굴에 언뜻 동정심이 어렸다.

세계수의 열매는 작았다. 수한의 엄지손가락 마디 한 개 크기에, 홍옥처럼 붉은 빛을 뽐내고 있었다.

마엘른은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땄다. 주의 깊게 열매를 살핀 후, 어떤 것은 따고 어떤 것은 놔두는데 기준을 알 수가 없었다.

[세계수의 열매는 충분히 익은 것을 따야 한다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달콤한 과실에 불과하오.]

작은 가죽 주머니에 세계수의 열매를 대여섯 개 정도 따로 담았다. 그것을 수한에게 건네며 씩 웃어 보인다.

[우리를 도와준 대가요. 특별히 잘 익은 것들만 담았으니, 설령 팔다리가 잘려도 재생시킬 수 있을 거요.]

[감사합니다.]

수한은 사의를 표하고 주머니를 받았다.

이건 여벌의 목숨이었다. 돈으로 가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엘른도 세계수의 열매를 많이 따진 못했다. 기껏해야 스무 개 정도가 고작이었다.

얼굴이 좀 어두워졌다.

[얼마 전에 차원의 틈이 열려서 그런지, 작황이 좋지 않소.]

[곤란하네요.]

[인근 도시에서 빌리면 되니 문제는 안 되오. 이제 돌아갑시다. 영주님과 의논을 해봐야겠소.]

세계수를 뒤로 하고 크리맛실로 향했다.

이번에도 중간에 한 번 쉬었다. 크리맛실에 도착하자 뮤시아가 크게 앓기 시작해서 새미가 걱정을 했다.

크리맛실로 돌아온 저녁, 히메르아가 둘을 불렀다.

무슨 이야기를 할 지 짐작이 갔다.

수한의 예상대로였다.

둘을 앞에 둔 자리에서, 히메르아는 얼굴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

[뮤시아에게 힘의 결정을 흡수시키려고 합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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