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116화 (117/254)

< 수호검 마엘른 -1- >

애초에 수한이 생각하고 제안한 것 아닌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좋습니다.]

말을 들은 즉시 승낙했다.

히메르아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저희의 율법에 어긋납니다. 부디 일이 끝날 때까진 함구해주셨으면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뮤시아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 시작하기로 했다.

이틀 정도 지나자 뮤시아가 기력을 찾았다.

세계수에 다녀와 생명의 힘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기다렸다는 듯 성장통이 뮤시아를 찾아왔다.

준비는 끝난 상황.

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이능 각성은 별빛 숲 일족의 직계만 아는 밀실에서 이루어졌다. 장로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엘른이 조심스럽게 준비한 물품을 꺼냈다.

총 세 가지.

D급 강체 계열 힘의 결정, 부채처럼 큰 세계수 잎, 세계수의 줄기를 가공하여 짠 녹색 옷.

E급을 가져올 줄 알았는데 D급?

수한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뮤시아가 버틸 수 있을까요?]

[병약하지만 굳센 아이입니다. 세계수의 잎은 힘의 결정을 안정적으로 흡수할 수 있게 도와주고, 줄기는 생명을 보호하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히메르아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새미가 가볍게 히메르아의 손을 잡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둘이지만, 체온을 통해 새미의 진심이 전달되었다.

히메르아가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뮤시아는 당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걸 흡수하면, 나도 이제 건강해지는 거지?]

[그래, 뮤시아. 우리 뮤시아도 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뛰어놀고, 세계수의 정령들이랑 마음껏 놀 수 있어. 그러니까 힘들어도 꾹 참아야 한다. 알았지?]

[응!]

뮤시아는 녹색 옷만 입고 옥으로 깎은 침대 위에 올라갔다.

마엘른이 힘의 결정을 세계수의 잎에 싸서 뮤시아에게 건넸다. 뮤시아는 입을 앙다문 채 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긴장이 되는지 히메르아와 마엘른을 한 번씩 올려다보았다.

히메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엘른이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뮤시아가 결심한 듯 눈을 치켜뜨더니, 힘의 결정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파삭!

힘의 결정이 그대로 부스러졌다.

영롱한 빛을 뿌리는 액체가 흘러나왔다.

세계수의 잎이 거기 반응하며 녹아들어갔다. 액체가 뿜는 빛에 신령한 진녹색 빛이 더해졌다.

액체는 뮤시아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뮤시아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몸이 푸들푸들 떨렸다.

새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수한은 말없이 새미를 끌어안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흡수가 끝났다.

수한이 D급 힘의 결정을 흡수할 때를 생각하면 몇 배는 빨랐다. 이것도 세계수의 효능인가 싶었다.

그러나 각성에 성공했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아악!]

뮤시아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몸을 마구 비틀었다. 그 서슬에 옥 침대에서 굴러떨어지자 마엘른이 급히 받아냈다.

[뮤시아!]

히메르아가 놀라 달려들었다.

수한은 냉정한 눈으로 뮤시아의 상태를 살폈다.

성장통이었다.

힘의 결정 흡수는 성공했다. 뮤시아는 D급 이능을 각성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이능이 몸의 상태를 좋게 만들어서, 당연하게도 성장통이 심해졌다.

오랜 세월 억눌려 있던 것에 대해 반발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 강도가 무시무시했다. 수한이 보기에 A급 힘의 결정을 흡수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보다 못한 마엘른이 푸르게 빛나는 손을 데려고 했지만 히메르아가 말렸다.

대신 수한이 다가갔다.

히메르아가 희망어린 눈으로 수한을 보았다.

애초에 지금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한을 동석시킨 것이다. 이능 각성에 성공하면 성장통이 심해질 게 뻔했으니까.

수한은 뮤시아의 손을 잡았다.

뮤시아가 각성한 이능은 신체 회복. 나중에 진화하면 불사니 뭐니 하는 것으로 변하겠지.

박명을 뮤시아에게 걸었다.

신체 회복 능력이 활성화되는 게 보였다.

하지만 뮤시아는 그런 줄 어쩐 줄도 몰랐다. 생전 처음 겪는 고통에 몸만 비틀고 있었다.

수한은 뮤시아와 정신을 연결시켰다.

고통이 전이되지만, 그 정도는 무시했다.

[뮤시아.]

[……]

뮤시아의 정신에 직접 말을 걸었다.

대답이 없자, 다시 이름을 불렀다.

[뮤시아.]

[누구?]

반응이 있었다.

눈을 뜨더니 수한을 보기까지 했다.

수한은 마엘른에게 안겨 있는 뮤시아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속삭였다.

[뮤시아. 네 이능은 신체 회복이다. 네 몸에 정신을 집중해. 그러면 네 이능이 발휘되면서 통증을 극복할 수 있을 거다.]

[신체 회복?]

[그래. 그게 네 이능의 이름이야.]

“@@%*%^$%#@[email protected]……”

뮤시아가 엘프 어로 몇 마디를 읊조렸다.

눈을 감았다.

희미한 황동색 빛이 뮤시아의 전신에 어렸다.

히메르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뮤시아! 잘 했다!]

우드득, 우득.

뮤시아의 전신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장통을 넘어,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소리를 듣자 히메르아가 수한의 소매를 붙잡고 눈짓을 했다.

수한은 새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밀실은 히메르아의 개인 서재로 연결되어 있었다.

히메르아가 크게 숨을 쉬더니 수한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뮤시아가 무사히 성장통을 이겨낼 것 같아요.]

[D급 이능이고, 제 박명 능력도 활성화되고 있으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뮤시아의 성장이 끝나기 전까지는 저도 이곳에 머물겠습니다. 너무 멀어지면 제 능력이 취소될 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마침 그걸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히메르아는 아예 수한에게 뮤시아를 계속 관찰해 달라고 부탁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수한은 흔쾌히 허락했다.

덕분에 서재 옆의 좋은 방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좋은 음식과 좋은 차를 얻어 먹으며, 가끔 서재로 들어가 밀실의 뮤시아를 확인하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뮤시아의 성장이 끝난 것은 정확히 이틀이 지난 뒤였다.

수한은 깜짝 놀랐다.

성장이 끝난 것을 느끼고 밀실로 들어갔는데, 웬 청초한 아가씨가 옥 침대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엘프.

얼굴에 수북하던 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피부가 깨끗한 흰색으로 변하고, 귀도 다른 엘프들처럼 날렵하게 뻗었다.

늘씬한 몸매에, 하얗게 빛나는 다리가 인상적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어 수한은 잠깐 넋을 잃고 엘프를 응시했다.

히메르아와 판박이.

[뮤시아니?]

조심스럽게 묻자, 엘프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기껏해야 지구인 기준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던 뮤시아가 거의 10대 후반 정도 외모로 성장했으니까.

겉보기에는 트롤의 인자가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실은 신체 회복 이능으로 흡수된 것.

지금은 C급을 넘어, 거의 B급에 육박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고위 이능력자로 성장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세계수 줄기 옷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한이 세라프 날개 전투복 상의만 벗어주자, 뮤시아가 고맙다고 종알대며 그걸 받아 걸쳤다.

수한과 동행한 용이가 뮤시아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너 어떻게 이렇게 커진 거야? 비결 좀 알려주라! 나도 더 커지고 싶어!]

뮤시아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수한은 히메르아와 마엘른, 새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히메르아가 단박에 달려왔다. 수한의 상의를 입은 뮤시아를 보더니, 격하게 그 여린 몸을 끌어안았다.

[뮤시아! 해냈구나!]

[엄마!]

평온하던 뮤시아도 두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수한과 새미는 서로를 껴안은 채 둘을 쳐다보았다. 모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보니, 가슴 한편이 시큰하면서도 따스해졌다.

새미가 수한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정말 잘 됐다.”

“그러게. 이제 장로들도 뭐라고 못하겠어.”

“맞아맞아. 그런데 마엘른님은 어디 계셔? 연락 안 했어?”

“어라. 정신 감응 보냈는데 왜 안 오시지?”

수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엘른의 행방은 금방 알아냈다.

시녀들이 몰려와 마엘른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호들갑을 떤 것이다.

그들을 따라 영주성 밖 정원으로 나가자, 마엘른이 붉은 옷을 입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붉은 옷?

숲 엘프들이 질색하는 색깔이었다. 적색은 불꽃을 연상시키고, 불꽃은 숲을 태우기 때문이다.

히메르아가 마엘른을 질책했다.

[마엘른님! 이 무슨 황망한 짓입니까?]

마엘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영주님. 부디 이 죄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죄인이라니요? 크리맛실의 고귀한 수호검에게 누가 그런 참람된 말을 했습니까? 노르드 장로! 당신입니까?]

히메르아가 갑자기 화살을 돌렸다.

놀란 눈으로 마엘른을 보던 노인이 두 손을 휘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수호검께서 죄인이라니요, 전혀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소리를 했기에 마엘른님께서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자처하는 겁니까? 장로님 중 누군가가 영주 직위에 대해 떠든 게 아니면 마엘른님이 붉은 옷을 입을 이유가 있습니까?]

히메르아가 씩씩댔다.

화가 많이 난 모양.

수한이 구경만 하고 있는데 마엘른이 고개를 들어 히메르아를 보았다.

[영주님.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니요.]

[뮤시아를 보십시오.]

그 말에 히메르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마엘른이 붉은 옷을 입고 있어 시선이 집중된 참이었다. 아직까지 뮤시아의 정체를 알아본 엘프는 없었다.

그제야 뮤시아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엘프들이 웅성거렸다.

고작 며칠 만에 외모가 확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어린아이로 보였는데, 이젠 소녀가 되어 버렸다.

마엘른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뮤시아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궁구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까지 시도했던 방법은 모두 실패했지요. 그러다 우연히, 힘의 결정을 흡수시켜 이능력자로 각성시키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힘의 결정 흡수?]

[그것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율법에 어긋납니다. 하지만 이대로 뮤시아가 죽게 내버려 두는 것도 율법에 어긋나는 것 아닙니까? 뮤시아는 별빛 숲 일족의 직계이며, 크리맛실의 합당한 후계자입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요란한 헛기침이 터졌다.

뮤시아에 대한 언급이 불편했나 보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엘른은 담담한 기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감히 세계수의 지킴이이자 가장 위대한 숲지기, 군주 프리아크님이 반포한 율법을 어긴 죄를 청합니다. 군주님을 기만하고 영주님을 속여 크리맛실의 후계자에게 힘의 결정을 흡수시킨 죄, 설사 목숨을 바치라고 하셔도 바치겠습니다.]

마엘른은 고개를 숙였다.

히메르아의 눈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수한도 이제 상황이 파악되었다.

뮤시아가 각성한 것을 숨길 방법은 없다. 장로들이 사실을 알면 뮤시아는 물론, 히메르아까지 추방당할 터였다. 그 전에 선수를 쳐서 혼자 덤터기를 쓰려는 것 같았다.

똑똑하다고 해야할지 어리석다 해야할지 모르겠다.

마엘른은 히메르아의 동생이다. 가족이라는 얘기였다. 고향에서 추방 당하더라도 가족이 함께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세계수 때문이다.

숲 엘프는 세계수에 대한 의존도가 크다. 세계수에서 오랫 동안 멀리 떨어져 있으면 시름시름 앓다가 말라죽곤 했다. 따라서 숲 엘프에게 추방이란 사형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히메르아가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마엘른의 모든 직위를 해제하고, 가택에 연금하세요.]

[영주님!]

[영주님! 안 됩니다!]

[그만! 제가 오늘은 몸이 좋지 않네요. 내일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히메르아가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퇴장했다.

걷는 히메르아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심적인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새미가 수한을 건드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원래 미성년 엘프에게는 힘의 결정을 흡수시키면 안 되잖아. 관련자는 모조리 추방이래. 그것 때문에 마엘른님이 뒤집어 쓰고 혼자 추방당할 생각인가 봐.”

“치료하려고 그런 거잖아. 그런데 왜 추방을 해?”

“하아, 그러게. 답답하다.”

수한은 새미와 함께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그 날 저녁, 히메르아가 둘을 불렀다.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새 반쪽이 되어 있었다.

수한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어떻게, 마엘른님은 잘 해결되었습니까?]

[그 문제 때문에 두 분을 청한 거예요.]

히메르아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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