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증 -2- >
시간에 맞추어 실기 시험장에 가자,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기자들이 빼곡하게 몰려와 있었다.
그들이 마이크를 들이댔다.
“수한씨! 이번에 영입하셨다는 미드가르드 엘프가 저 분입니까?”
“미드가르드 엘프분은 타이탄 소속입니까? 수한씨 개인과 용병 계약을 하셨다는 소문도 있던데요?”
“한 마디만 부탁드립니다!”
이제 기자라면 지긋지긋했다.
수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지나쳤다.
극성스럽게 달려드는 기자들의 손길이 문득 마엘른의 옷에 닿았다. 그러자 마엘른이 칼자루에 손을 얹고 시퍼렇게 두 눈을 빛냈다.
“내 몸에…… 손…… 대지 마라.”
어설프지만 분명한 한국어.
칼날 같은 기세에 놀라 기자들이 썰물처럼 물러났다. 마엘른은 그들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실기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기자들은 실기 시험장 안까진 따라오지 못했다. 타이탄 공격대의 요원들이 앞을 가로막은 탓이었다. 대신 나갈 때를 노리겠다는 듯 출구에 진을 치고 앉았다.
“아, 사장님도 오셨습니까?”
“지금은 할 일도 없는데요. 이능력자가 아닌 엘프 검사분을 초빙했다고 해서 보러 왔습니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한민종 사장을 비롯하여 S급 이능력자인 최 이사, 다른 AA급 이능력자들, 경영 전문 이사 등등 타이탄 공격대의 고위직은 다들 몰려온 것 같았다.
그들을 한 번 둘러본 후, 마엘른이 한 마디 말을 내뱉었다.
[이곳에는 강자들이 많군.]
호승심을 느끼는지, 민종을 자꾸 힐끔거렸다. 일견하기에도 민종의 강력함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검증의 첫 절차는 방어막 공격.
방어막 생성기를 갖다놓고 그걸 공격하게 했다. 아직 저효율이라 실전에서는 못 써먹어도, 이런 식으로는 활용이 가능했다.
마엘른이 검을 휘둘렀다.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며 방어막을 찢어발겼다. 생성기 위에 올려놓은 표적을 두 조각낸 후, 가볍게 검을 거뒀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깔끔하네요!”
“대단한데요? 최소 A급 변이체의 방어막은 뚫을 수 있겠습니다.”
“집중하면 그보다 높은 등급도 공격이 가능하다는 거네요.”
다양한 상황에서 검증을 했다.
예전에 수한이 치렀던 실기 시험과 비슷했다. 공격 능력을 측정했고, 생존 능력도 확인했다. 운동 능력과 방어 능력도 측정했다.
충분히 주의를 준 뒤 기관총을 난사했는데 마엘른은 그걸 다 막아내는 신기를 보였다. 몇 발만 쏘면 칼을 휘둘러 튕겨냈다. 영화에서나 보던 움직임에 타이탄 관계자들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속 이능을 가진 것도 아닌데 매우 잽쌌다. 지구인으로 따지면 C급 신속 계열 이능력자보다 더 나은 수준이었다. B급은 되어야 100미터 달리기에서 더 나은 기록이 나오고, 순발력은 비등비등했다.
민종이 눈을 번뜩였다.
“이거 수한씨가 보물을 물어왔네요.”
수한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민종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나중 일. 최소 몇 년은 타이탄 공격대에서 일할 거라고 봤다.
마엘른은 수한의 호위이니 수한이 타이탄에 남아 있는 한 마엘른도 타이탄 소속이 된다. 졸지에 고위 이능력자를 얻은 셈이니 민종의 입이 귀에 걸렸다.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입고 있던 가죽 잠바를 벗고 앞으로 나섰다.
“제가 직접 시험해 보겠습니다.”
“사장님께서요?”
몸을 풀던 AA급 강체 계열 이능력자가 멈칫했다.
민종이 씩 웃었다.
“원정 다녀오고 나서 실력 발휘를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한 번 어울려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러시다면야……”
민종은 SS급 이능력자.
그것도 방어에 최적화된 강체 계열 이능을 가지고 있었다. 거력 계열 이능도 S급이니, 만에 하나라도 상처를 입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민종은 마엘른의 앞에 가서 섰다.
마엘른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수한이 대련이라고 알려주었다.
[사장님은 SS급 강체 계열 이능력자입니다. 걱정 마시고 마음껏 실력을 발휘해 보세요.]
SS급.
그 말에 마엘른의 시선이 바뀌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민종을 노려보았다.
SS급은 미드가르드에서도 드물었다. 열 명을 겨우 넘겼고, 숲 엘프 중에선 딱 1명밖에 없었다.
검을 빼어들더니, 날렵하게 민종을 겨누었다.
여유 만만하던 민종의 얼굴이 굳었다.
전신에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수십 자루의 칼로 전신을 헤집는 것 같았다.
이건 보기보다 더하다.
그 생각과 동시에, 민종의 전신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온 몸을 후벼 파던 통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마엘른이 몸을 날렸다.
싸늘한 청색 혜성이 민종을 직격했다.
쩌엉!
금속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마엘른이 몇 걸음을 물러났다. 약세이긴 하지만, 지금도 옅은 투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민종이 놀란 얼굴로 마엘른을 보았다.
검이 꽂힌 자리.
선명하게 상처가 나 있었다.
비록 옷을 살짝 찢은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SS급 이능을 뚫은 것이다.
민종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마엘른이 다시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검을 허공에다 대고 수십 번을 뿌렸다. 그러자 푸른 기운이 파도처럼 첩첩이 일어났다. 민종을 때리고 또 때리자, 민종을 감싼 황금색 기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민종이 주먹을 휘저었다. 강렬한 파동이 번지며, 마엘른이 날린 기운을 소멸시켰다.
마엘른이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났다.
이번에는 민종이 공격했다.
무섭게 마엘른을 압박하면서 주먹을 몇 번이나 쳐냈다. 웅장한 기운이 일어나며 마엘른을 난타했다.
마엘른이 허공에 대고 검끝을 찍었다.
푸른 기운이 폭풍처럼 일어났다. 민종의 공격을 튕겨내고, 녹이고, 흩어놓았다.
완전하지는 않았다.
마엘른이 확연히 밀렸다.
그럼에도 그 투지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힘껏 검을 휘둘러 민종을 한 번 견제했다. 뒤로 풀쩍 뛰어 거리를 벌린 후,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마엘른은 검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검신을 자신의 눈앞에 대고, 지긋이 검신을 응시했다.
두 눈이 심원한 빛을 뿜었다.
대기가 무거워졌다.
찬연한 빛이 검 끝으로 모여들었다.
뭔가 강한 기술을 쓰려는 모양.
“여기까지 하지요.”
수한이 끼어들었다.
민종이 마뜩찮은 눈으로 수한을 돌아보았다. 마엘른도 왜 끼어드느냐는 얼굴을 했다.
“비장의 수단을 쓰실 것 같은데, 그랬다가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다치면 어떻게 합니까? 이만하면 충분히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어, 마엘른에게도 말했다.
[마엘른님.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방금 쓰려던 기술, 부담 없이 막 쓸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냥 간단한 심사를 하는 겁니다. 생사대적을 만난 것도 아닌데, 본인 몸에 부담이 가는 기술을 쓰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비상 상황이라면 세계수의 열매를 먹여 치료하겠지만, 겨우 다섯 알 뿐인데 벌써부터 소모하긴 아깝지 않나.
[으음, 일리가 있습니다.]
마엘른이 검을 거뒀다.
달아올랐던 얼굴이 빠르게 식었다. 평소의 담담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민종이 투덜거렸다.
“쳇, 김이 다 샜네요. 어쩔 수 없죠. 원정 1팀 원정도 좀 있으면 시작한다고 하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챙겨야 하는 분이어서요.”
“뭐, 저도 이해합니다.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지금까지 공격만 봐도 AA급 거력이나 구현 계열 이능력자 정도 수준은 넘는 것 같습니다. 음, S급이라 하기에는 좀 모자란 것 같고요. 대리님이 말씀하신 대로 어지간한 S급 이능력자는 가볍게 찜 쪄 먹겠습니다. 무술은 훨씬 뛰어날 테니까요.”
민종은 속으로 몇 마디를 삼켰다.
검만 좋은 것을 갖고 있어도 꽤 위협적이었을 거라는 얘기.
지금 마엘른이 갖고 다니는 검은 추방 당하면서 얻은 별 볼 일 없는 철제 검이었다. AA급 검만 가지고 있었어도 대련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민종이 곰곰이 생각하다 또 말을 이었다.
“방어 능력도 나쁘지는 않은데 공격력만은 못 하네요. A급 강체나 의지 계열 이능력자 정도?”
“그 정도로도 대단합니다.”
“AA급 이능력자에 준하여 계약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사냥 대상은 기계 괴수와 고위 변이체들이니까요. 현상금 사냥이 목적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습니다만. 자, 이제 두 분이 잘 의논해 보세요.”
대인 전투 능력은 S급 이능력자를 상회하지만, 기계 괴수와 변이체를 상대하는 것은 그것과는 또다른 문제.
민종은 가죽 잠바를 입고 실기 시험장을 떴다.
AA급 이능력자라면 통상적으로 연봉 25억에 배당 300몫을 받는다. 여기에 수한처럼 세라프 어를 잘하거나 다른 능력이 있으면 추가로 얼마를 더 받고.
그럼 마엘른은 어느 정도가 될까?
수한은 인사부장과 함께 같은 차에 탔다. 마엘른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기자들이 덤벼드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차 안에서 기본적인 조건을 조율했다.
“외계인 이능력자의 경우엔 지구인보다 더 나은 조건을 받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사실 지구의 화폐가 외계인들에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대부분 다른 목적 때문에 계약을 하는 거지요. 쥬페르 행성 출신인 페롱 이사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공격대도 외계인에게 바라는 건 직접적인 무력보다는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정 이상의 프리미엄을 주는 거지요. 하지만 이번 경우엔 좀 다릅니다. 정확히 말하면, 마엘른님은 우리 공격대가 아니라 수한씨에게 소속된 거니까요.”
“공격대 측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기탄 없이 조건을 말씀해 보세요.”
“통상적인 수준으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신 옵션으로 40평형 오피스텔 하나와 나중에 면허를 따면 방탄승용차 한 대를 리스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마엘른은 수한의 집에서 얹혀사는데, 그걸 해소해주겠다는 것이다.
나쁘지 않다.
아직은 수한과 같이 살면서 지구에 적응하는 게 필요하지만, 나중에는 마엘른도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할 테니까.
일단 본인에게 의향을 물었는데, 뜻밖에도 거절을 했다.
[제 임무는 그대를 호위하는 겁니다. 집을 주는 것은 고맙지만, 임무에 방해가 될 테니 거절하겠습니다.]
[너무 좁지 않습니까? 제 동생들도 있어서 좀 불편할 것 같은데요.]
[전 앉을 공간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마엘른의 말이 고맙고도 부담스러웠다.
결국 오피스텔은 빼고, 방탄승용차 한 대만 리스해주는 것으로 얘기가 되었다.
협상 끝에, 수한은 몇 가지 옵션을 더 따냈다.
가장 큰 것은 원정을 한 번 다녀올 때마다 미드가르드 행성에 다녀오는 비용을 지원받기로 한 것.
과연 쓸모가 있을까 싶었다.
마엘른이 가고 싶어하는 곳은 미드가르드 행성에서도 대수림이지, 미드가르드 행성에 가봐야 뭐 별 게 없다. 그래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걸 확보한 거였다.
안 그러면 기껏해야 의료비 지원, 장학금 지원, 세금 지원, 이런 건데 얼마나 마엘른에게 도움이 되겠나. 차라리 차원문 통과에 도움을 얻는 게 낫지.
계약서를 거의 작성했을 때, 문을 열고 타이탄 공격대 홍보부장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헉헉, 아직 계약 안 끝났지요?”
“예, 아직 입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한 가지 항목 좀 추가합시다.”
홍보부장의 얘기는 간단했다.
마엘른을 공격대 홍보 모델로 쓰자는 것.
예전에 수한이 몸담았던 알바트로스 공격대는 세르엘 종족을 홍보 모델로 써먹고 있었다. 덕분에 인지도가 무척 상승했다. 전력상으로는 상대가 안 되지만, 인지도로만 따지면 타이탄 공격대와 맞먹을 정도였다.
지구인 모델로는 세르엘 종족을 앞장 세운 알바트로스 공격대를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골머리를 앓던 참인데, 외모로도 뒤지지 않고 개인 무력으로는 압도하는 마엘른이 나타나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수한은 단번에 거절했다.
“안 됩니다.”
“에고, 수한씨. 그렇게 거절하지 마시고……”
“마엘른님은 엘프입니다. 엘프들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 취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공기 안 좋은 지구까지 모셔온 것도 죄송스러운데, 그런 것까지 시킬 수는 없습니다.”
“에이, 수한씨. 마엘른님께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나쁜 일은 아니지만 좋을 것도 없잖아요? 지구에서 유명해지고 돈 좀 벌어봐야 어디에 쓰겠어요?”
논의 끝에 수한이 한 발 양보했다.
마엘른을 홍보 모델로 쓰기는 쓴다.
그런데 따로 연출하여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앞으로 원정 다니면서 소형 카메라에 활약상이 잡힐 테니, 그걸 편집해서 쓰기로 한 것이다.
마엘른은 수한이 협상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설명은 다 해줬지만, 미처 이해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미현까지 동석한 자리에서 계약을 끝냈다.
수한은 멀뚱멀뚱 자신을 보고 있는 마엘른을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계약 대충해도 뭐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그게 아니지 않은가. 첫 인연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며 시작되었지만, 마지막에는 웃으며 떠나보내고 싶었다.
새미는 일반적인 조건보다 조금 더 높은 조건을 받았고……
그 다음에는 바로 수한의 연봉 협상에 들어갔다.
이능 인증 결과를 본 인사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 원, 너무 대단해서 말이 안 나옵니다.”
“뭐가 좀 많죠?”
“이건 많은 수준이 아니네요.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연봉 50억에 배당 600몫을 불렀다.
일반적인 AA급 이능력자의 딱 두 배.
그리고 차장 직급.
과장을 건너뛰는 것이다. 부장은 아마도 특수 원정 1팀장인 석구 때문에 안 달아주는 듯하고.
조금 모자란 것 같아 고개를 저은 뒤, 한 가지 옵션을 요구했다.
“만약 제가 어떤 기계 괴수를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면, 그 기계 괴수가 갖는 가치의 5%를 주십시오.”
“결정적인 역할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몇 번 입씨름 끝에 구체적인 조건을 확정지었다.
기계 괴수에게 일정 비율 이상의 피해를 입히거나, 아예 제압해서 급소를 드러나게 한다거나.
사실 S급 이능력자도 달성하기 어려운 일들.
인사부장은 이게 과연 의미가 있냐는 얼굴이었지만, 수한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거였다.
그것으로 모든 협상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