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120화 (121/254)

< 명예 훈장 -1- >

연봉 협상 후, 변화 없는 일상이 이어졌다.

외계 행성으로의 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새로 발견된 행성이라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때쯤, 수한의 집으로 편지가 하나 날아왔다.

별 생각 없이 뜯어보았는데, 온통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초청장이었다.

발신인은 영국의 여왕.

오는 12월 1일, 버킹엄궁에서 명예 훈장을 수여 하겠다고 그때까지 와달라고 하는 것이다.

KBE(대영제국 기사 훈장).

갑자기 메리 공주의 얼굴이 생각났다.

몰디브에서 재회했던 그녀.

수한과 새미에게 KBE와 DBE 수여 논의가 있다고 했던가.

그 날 오후 새미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오빠도 초청장 받았어?]

[응. 받았지.]

[어떻게 할 거야?]

[가야지. 훈장 받고 다음날 바로 비행기 타면 시간 딱 맞을 것 같아. 아니면 거기서 차원문을 넘어도 되고.]

[아, 그렇겠다.]

[공격대에 홍보용으로 써도 된다고 하면 협조해줄 거야. 내가 얘기해볼게.]

논의 후, 수한과 새미는 런던에 있는 세라프의 전당을 통해 목표 행성에 진입하기로 했다.

세라프 연맹 영국 지부에서도 협조적으로 나왔다. 도버 해협 사건과 몰디브 사건을 통해 우호적인 사이를 유지하다 보니, 그 정도 협조는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안 좋은 소식이 있었다.

동력핵에서 힘의 결정을 추출하는 것이 절반 정도 진행되었는데, 그 중 S급 변조 계열 힘의 결정은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요란하게 힘의 결정을 주겠다고 했는데 늦어지고 있으니, 타이탄 공격대 입장도 난처했나 보다.

가공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어떻게, 다른 계열이라도 하나 드릴까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S급 신속 계열과 투시 계열 힘의 결정은 하나씩 나왔다는 것.

SS급은 추출을 시작하자마자 강체 계열이 튀어나왔다는데, 그것과 비교하면 운이 좀 없었다.

수한은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놔둘 생각이었다. 속성 부여야말로 수한의 주력 초능이었으니까. S급이 되어 배당을 올리는 것도 고려해 보았으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소중한 기회를 써버리긴 아쉬웠다.

돈으로 S급 힘의 결정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만 있으면 투시 계열을 선택해서 승급을 했을 텐데……

“알겠습니다. 변조 계열 힘의 결정이 나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부탁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원정은 AA급으로 다녀와야 할 모양이다.

원정을 다녀오는 동안 변조 계열 S급 힘의 결정이 추출되어야 할 텐데.

시간이 지나 11월 말이 되었다.

수한과 새미는 홍보부 직원 몇을 달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2시간 정도의 비행 끝에 런던에 도착했다.

올해 초에 런던에 왔었으니 꼭 9개월 만이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펑펑 플래쉬를 터뜨렸다.

둘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대한민국도 아니고, 영국에서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마엘른을 대동하긴 했지만 마엘른을 찍는 것도 아니었다. 카메라 끝이 둘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마엘른을 몇 번 찍다가도 다시 둘을 찍었다.

꼭 인기 연예인이 입국하는 것을 보는 듯했다.

홍보부 직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이야, 두 분 인기 좋은데요?”

“저도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는데, 장난 아니더라고요. 영국이랑 프랑스에선 거의 영웅 대접을 받고 있어요.”

“하긴 영웅 맞죠. 시민들도 구하고, 공주님도 구하고……”

왕실에서 나온 사람들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꺼먼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일행을 감쌌다. 기자들을 밀어내며, 천천히 공항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리무진이 한 대 보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앞뒤가 길쭉한 차였다.

다른 사람들은 뒤따르는 차에 타고, 수한과 새미, 마엘른만 거기 탔다. 먼저 안에 타고 있던 백인이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헤밀턴 코트 남작이라고 합니다. 버킹엄 궁에서 나왔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 분은 누구신지……”

“제 호위를 맡은 분입니다. 미드가르드 숲 엘프 출신으로, AA급 이능력자에 준하는 검술가이십니다.”

“허, 그렇습니까?”

헤밀턴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마엘른을 보았다.

마엘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요히 앉아 있었다. 다만 리무진 안을 자꾸 돌아보는 게, 이 길쭉한 차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 동안 타본 차들과 다르게, 실내가 무척 화려했으니까.

의자 대신 소파처럼 푹신한 게 ㄷ자 형태로 놓여 있었다. 가운데에는 작은 탁자를 놓았다. 앞쪽에 작은 냉장고와 바(Bar)가 설치되어, 간단한 음료를 즐기는 게 가능했다.

헤밀턴이 와인을 한 잔씩 권했다. 그게 비행하는 동안 쌓인 피로를 푸는데 도움이 될 거라나.

수한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수여식은 내일 오전 10시에 시작한다고 하셨지요?”

“예. 수여식 후 오찬을 함께하는 것으로 일정이 끝납니다. 그리고 며칠 간은 왕실 가족분들께서 한 번씩 두 분을 식사에 초청하실 겁니다.”

“저희 12월 3일에는 원정 나가야 됩니다.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대한민국에서 출발하는 타이탄 공격대와 일정을 맞춰서 런던의 차원문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미리 예약해 두었으니까, 원정에 늦으실 일은 없을 겁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이 하신 일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벌써 오후 4시.

헤밀턴은 둘을 버킹엄 궁전 인근의 호텔에 내려주었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 9시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버킹엄 궁전에서 숙박하면 좋겠지만, 그런 호사는 국빈 방문시에나 누릴 수 있었다. 대신 최고급 스위트룸에서 묵게 되었으니, 이것도 나름 괜찮았다.

헤밀턴이 호텔 체크인을 도와주었는데, 둘의 신원이 밝혀지면서 잠깐 소란이 일어났다.

총지배인이라는 사람이 나왔다.

찾아주셔서 영광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고급 와인도 한 병 서비스로 주었다.

헤밀턴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모두들 객실로 올라갔다.

오랜 비행으로 잔뜩 지쳐 있었다. 저녁은 룸 서비스로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막상 누우니 잠이 오질 않는다.

수한은 눈을 깜빡이다가 새미를 슬쩍 건드렸다.

“자기야, 자?”

“아니, 아직.”

“비행기에서 너무 잤나 봐. 잠을 잘 수가 없네.”

“시차 때문에 그럴 거야. 원래 지금은 아침이어야 되잖아.”

“하긴 그렇다.”

“얼른 자. 3일 후면 원정도 나가야 돼.”

“그 전에……”

“어머, 미쳤어?”

수한이 새미를 껴안자, 새미가 수한을 꼬집었다. 그래도 싫진 않았는지 밀어내진 않았다.

밤이 깊었다.

새미는 곤히 잠이 들었다.

좀 오랫동안 괴롭혔더니, 아예 지쳐 나가떨어진 것이다.

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레 침대를 벗어났다. 너무 잠이 안 와서, 술이라도 한 잔 하려는 거였다.

호텔 꼭대기에 있는 바로 올라갔다. 대충 아무데나 앉으려는데,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정확히 말하면 엘프.

마엘른였다.

그 앞에 웬 백인 미녀 하나가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말을 마엘른에게 거는데, 마엘른은 눈만 멀뚱거렸다.

이제 겨우 한국어를 더듬더듬 하기 시작했는데, 백인 미녀는 영어로 말을 붙인 것이다. 세라프어도 아니니 마엘른은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나마 칵테일 한 잔을 시켜놓고 마시고 있는 게 용했다.

수한은 마엘른의 옆자리로 가 주저앉았다.

[마엘른님, 여기서 뭐하세요?]

[아, 술 한 잔 하러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인 여자는 뭡니까? 아까부터 저한테 자꾸 뭐라고 말을 거는데, 뭐라고 하는 줄 알 수가 없습니다.]

[흠, 잠시만요.]

수한은 백인 미녀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 엘프님과 아는 사이신가 봐요?”

“예. 동료 사이입니다. 어쩐 일이신지요?”

“아, 별 것 아니에요. 멋진 엘프님이 혼자 계시길래 말벗이나 하고 싶어서 앉은 거예요. 메뉴도 못 정하고 계셔서 자그마한 도움을 드렸는데, 이제 보니 헛짓한 것 같네요.”

“아하, 그러십니까?”

하기야 마엘른은 지구에서 드문 미남이니 여자가 꼬일 만도 했다. 과연 지구인 여성에게 눈길이라도 줄지 의문스럽긴 하지만.

수한은 좋은 말로 백인 미녀를 쫓아 보내려고 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고, 종족이 달라서 관심을 가지기는 힘들 거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백인 미녀는 고혹적으로 미소만 짓고 있을 뿐, 그 자리에 여전히 앉아 있었다.

그 사이 마엘른이 술을 다 비웠다.

잔을 내려놓더니 입맛을 다신다.

[이거 너무 맹맹한 것 같습니다. 그냥 과일즙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럼 좀 독한 걸로 더 시키겠습니다.]

수한은 탁자에 놓인 벨을 눌렀다.

종업원이 다가오자 위스키 몇 병과 안주로 먹을 샐러드 하나를 시켰다.

마엘른은 거의 물마시듯이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마셔도 괜찮겠습니까?]

[세계수의 가지 때문에 취하지도 않습니다.]

[아하, 그렇겠습니다.]

백인 미녀가 그것을 보더니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엘프님은 술을 잘 드시네요? 저도 몇 번 엘프 종족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분들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거든요. 마셔 봐야 한두 잔 정도?]

능숙한 세라프 어였다. 거의 수한에게 맞먹을 정도였다.

수한은 눈을 빛냈다.

[세라프 어를 잘 하시네요?]

[그럭저럭 말이 통할 정도로는 해요.]

그렇다면 왜 방금 전에는 영어로 말을 붙이고 있었을까?

단순히 마엘른을 꼬시려고 그런 거라면 세라프 어를 활용하는 게 백 배는 더 나을 텐데.

수한은 자세히 백인 미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백인 미녀가 유혹적인 미소를 짓더니, 수한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제 소개가 늦었지요? 전 미샤 비앙카라고 해요.]

세라프 어를 이렇게 자유자재로 쓸 정도면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기억나는 사람이 없다.

혹시나 해서 영국과 프랑스의 주요 이능력자와 공격대 소속 인물들을 다 외워왔는데 그랬다. 외모만 봐서는 영락없는 앵글로색슨 족인데 수한이 외운 인물들 중에는 없었다.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한이 노려보자, 미샤가 깔깔 웃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내일 KBE를 받는 분이 궁금해서 찾아온 거니까. 저도 내일 버킹엄 궁전에서 DBE를 받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네. 전 아일랜드 인이에요. 수한씨는 모르시겠지만 제가 소속된 공격대는 영국의 로열 공격대와 인연이 깊어요. 같이 원정 갈 때도 있고, 서로의 주식도 일부 보유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영국과도 거래를 하는데, 그걸 영국 왕실에서 높이 평가했다고 하네요.]

그 얘기를 듣자 떠오르는 공격대가 있었다.

퀸 공격대.

특이한 점은 사장이 이능력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원 요원 출신으로, 할리우드 배우들 뺨을 치는 미모와 능란한 수완으로 유명했다.

비록 전세계에서 명성이 드높다고는 못해도, 유럽에서는 꽤 이름을 날리는 공격대 중 하나.

설마 아일랜드의 공격대장이 여기까지 왔을 줄은 몰랐다.

수한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미처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대한민국 타이탄 공격대 소속, AA급 이능력자 이수한이라고 합니다.]

[알아요. 저도 뉴스는 보고 사니까. 요즘 동아시아의 이능력자 중 가장 주목해야 할 분이기도 하고요. 직접 보니까 과연 헛걸음을 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샤는 수한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집요한 눈길이다.

흡사 먹잇감을 앞에 둔 늑대의 시선 같다고 할까. 수한은 자신이 벌거벗겨진 채 미샤의 앞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옆에서 마엘른이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지구인들은 동족 포식 습관이 있습니까? 꼭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입니다.]

[호호호! 농담도 잘 하시네요.]

미샤는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마엘른이 엘프 특유의 심유한 눈빛을 던지자, 뭐가 켕긴 것인지 내일 보자고 하면서 자리를 떴다.

몸에 쫙 달라붙은 옷을 입은 탓에, 육감적인 엉덩이 선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워낙 매혹적인 몸이라, 수한은 잠시 거기에 시선을 빼앗겼다.

마엘른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여자와 짝짓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그대는 이미 반려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흠, 흠!”

수한은 그저 헛기침만 몇 번 했다.

다음날 오전 9시, 리무진이 호텔 앞으로 왔다.

리무진을 타고 버킹엄 궁전으로 향했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수한과 새미, 마엘른만 리무진에 탔다. 홍보부 직원들은 다른 차를 타고 이동했다.

메리 공주가 둘을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꼭 1달만이네요.”

“시간이 꽤 지난 줄 알았는데, 그것밖에 안 지났네요. 1년은 지난 줄 알았습니다.”

“그래요? 전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미드가르드 행성에서 여러 일을 겪은 탓에, 어느덧 옛날 기억처럼 느껴지나 보다.

수한과 새미는 메리 공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 건장한 남자가 이들을 향해 다가왔다.

금발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였다. 어깨가 떡 벌어졌고, 화려한 장신구로 전신을 감고 있었다.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 남자다.

루카스 베르나르.

프랑스 루브르 공격대의 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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