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예 훈장 -2- >
루카스는 메리 공주의 옆에 서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여쁜 우리 공주님, 이 분들 소개 좀 시켜주겠어?”
“아, 루카스. 언제 왔어?”
“방금 왔지.”
“인사해. 누군지는 알지? 이번에 KBE랑 DBE 받으시는 대한민국 타이탄 공격대의 이수한 차장님이랑 윤새미 차장님이야. 두 분, 여긴 제 약혼자인 루카스 베르나르라고 해요. 덜렁이인데 작은 공격대 하나를 맡아서 키우고 있어요.”
둘의 승급 및 승진 소식이 어느새 영국까지 알려졌나 보다.
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루브르 공격대가 작은 공격대라고 할 수는 없지요. 세계 5위권 공격대 아닙니까? 반갑습니다. 이수한이라고 합니다.”
“어머, 프랑스 루브르 공격대장님이세요? 반가워요. 윤새미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두 분이 제 피앙세를 구해주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루브르 공격대장 루카스 베르나르입니다.”
다른 주요 인사들도 다가왔다.
무슨 기업의 회장, 사장, 유명 축구팀의 구단주, 국회의원, 시장, 공격대장 등등.
영국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았다.
특이한 점은 프랑스 인과 아일랜드 인들도 꽤 많이 참석했다는 것.
수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신기하네.”
“뭐가?”
“세 나라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에이, 나빠 봤자 얼마나 나쁘겠어. 원수지간도 아닌데. 이 정도 행사에는 참석하나 보지.”
“그런가?”
이윽고 훈장 수여식이 시작되었다.
오늘 훈장을 수여 받는 인원은 총 10명.
영연방 소속이 5명, 그렇지 않은 사람이 5명이었다. 일단 훈장 수여는 동일하게 하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나?
수한과 새미는 영국 연방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훈장이 아닌 명예 훈장을 받는다. 그리고 나중에 Sir, Dame 등의 경칭을 받지 못한다. 대신 이름에 받은 훈장, 즉 KBE나 DBE를 같이 넣어서 쓸 수 있었다.
영국 여왕이 입장했다.
올해 벌써 아흔 살이 넘고, 즉위 후 60년이 지났다.
온화한 인상의 노인.
연한 초록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 쓴 작은 왕관이 아니면 그냥 흔한 동네 할머니로 착각할 줄도 몰랐다.
여왕이 입장하자 다들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모두 반갑습니다.”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한 명씩 훈장을 받았다.
시작은 영연방 소속 국적을 가진 이들부터.
여왕이 훈장을 수여했다.
검은 상자에 두 개의 화려한 훈장이 들어 있었다.
십자가 형상에 붉은 끈이 달려 있는 게 하나. 마치 별처럼 생긴 게 하나.
수한은 상자를 건네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기자들이 거기 대고 마구 플래시를 터뜨렸다.
시종들이 다가와 훈장 다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끈이 달린 것은 그냥 목에 걸어도 되고, 아니면 리본을 매어 가슴에 달아도 되었다. 별 모양 장식은 가슴 주머니 살짝 아래에 다는 게 정석이고.
훈장마다 구성이 조금씩 다른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은 별 모양 장식은 아예 없기도 했다.
그래도 훈장을 받아 기쁜 것은 마찬가지.
한 곳에 10명이 모두 모여 사진을 찍었다. 여왕도 가운데에서 활짝 웃었다.
점심에는 훈장 수여자들이 모두 참석하는 오찬이 열렸다. 여왕은 물론 왕실 가족들이 대거 참석했다. 덕분에 탁자가 북적북적했다.
음식은 별 게 없었다.
기껏해야 간단한 수프와 샐러드, 계란 요리, 생선과 고기 요리와 디저트로 끝이었다. 맛은 괜찮았지만, 기대에는 못 미쳤다고 할까?
용이는 수한의 앞에 자리를 잡고 음식의 냄새를 맡았다.
[맛있어?]
[응, 정말 맛있다. 너도 먹어볼래?]
[칫, 놀리지 마. 나도 먹고 싶단 말이야.]
예전에는 왜 이런 걸 먹냐고만 하더니, 요즘 들어 부쩍 음식에 관심을 보이곤 했다.
절대 등급으로 진화하고 뭔가 변화가 있는 걸까?
오찬 중, 여왕이 수한에게 말을 걸었다.
“이 차장님이라고 했지요? 원래는 지원 요원 출신이시라고요.”
“예. 깔루 행성에서 우연히 자연 각성한 후 지금은 AA급 이능력자가 되었습니다.”
“대단하네요. 참, 우리 알렉스도 로열 공격대에서 지원 요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알고 계세요?”
“얘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몇 년 전 전역하고 바로 공격대에 취직하셨다면서요.”
“원래는 이 자리에 나와야 했는데 원정 나가 있어서 참석은 못 했어요.”
“대단하시네요. 왕자의 신분으로 그런 위험한 곳에 다녀오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자랑 같지만, 우리 영국 왕실은 고귀한 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믿고 따르겠습니까? 다행히 왕실 가족 모두 본인의 의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답니다.”
“고귀한 자의 의무라…… 좋은 말씀이십니다.”
수한도 어찌 보면 이미 사회 지도층.
그래서였을까.
여왕이 담담하게 말하는 내용이 송곳처럼 수한의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오찬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오후에도 여러 일정이 있었다. 영국 여왕과 왕세자는 궁전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올해 34살의 왕세손이 훈장 수여자들을 대접했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오후 늦게 모든 일정이 끝났다. 버킹엄 궁전을 구경한 뒤, 근위병들이 사열하는 것을 보고 뿔뿔이 흩어졌다.
왕세손이 수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무척 반가웠습니다. 다음에도 부디 좋은 일로 뵀으면 좋겠습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돌아갈 때도 리무진이 둘을 데려다 주었다.
타이탄 공격대가 원정을 시작하는 것은 1월 3일 오전 9시.
영국 런던에서는 새벽 1시에 차원문을 넘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시간에 질라 행성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내일 하루는 시간이 비는 셈.
대신 메리 공주가 둘을 초청했다.
장소는 윈저 궁전.
버킹엄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차를 타고 40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했다.
윈저 궁전에 가보자, 메리 공주와 루카스, 미샤가 먼저 자리를 잡고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카스는 그렇다 치고, 미샤는 왜?
메리 공주가 둘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어제 인사는 다들 했지요?”
“예. 비앙카양과도 안면이 있나 봅니다.”
“네. 몇 번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요. 퀸 공격대는 우리 영국에 투자를 많이 하거든요.”
“아하, 그렇겠습니다.”
한동안은 소소한 이야기를 했다.
용이가 심심했는지 탁자 위에서 재롱을 부렸다. 메리 공주와 미샤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좋아해서, 분위기가 퍽 좋아졌다.
그러다 타이탄 공격대가 화제로 떠올랐다.
“한민종 사장님이 SS급 이능력자가 되었다면서요?”
“그것도 강체 계열이라고 들었어요.”
“예. 가브낙 행성에서 기계 괴수를 대거 사냥하는데 성공했던 게 컸지요. 소형 기계 괴수는 물론, 대형 기계 괴수도 꽤 많이 잡았으니까요.”
“타이탄 공격대가 세계 10위권에 진입하는 것도 시간문제겠어요.”
“다른 공격대가 정체되어 있으면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들도 노력할 텐데 그게 쉬울까요? 이번 대규모 원정에서 다들 많은 성과를 얻었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10위권 밖의 공격대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여서요. 사실 10위권 내 기존 공격대들은 성장 한계에 부딪쳤어요. SS급 이능력자가 있어서 높은 평가를 받는데, SSS급 이능력자로 성장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다른 SS급 이능력자를 끌어들이자니 다 자기 공격대 챙기기 바쁘고, S급 이능
력자 영입해 봐야 조금 시간이 지나면 독립해서 나가고요.”
“하긴 그렇겠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3나라의 동향에 대해서도 들었다.
대한민국과 비슷했다.
SS급 이능력자도 나타나고, 기존의 AA급 이능력자 중 S급으로 승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 승급에 성공하는 건 아니어서 실패하거나 죽은 사람도 몇 있다고 했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
수한에겐 좋은 일이었다.
조만간 S급 힘의 결정이 필요해지는데, 이렇게 혼란스러울수록 더 구하기가 쉬울 테니까.
거의 식사가 끝나갈 무렵, 메리 공주가 수한을 직시했다.
“저희가 파악하기에는 근시일 내에 이 차장님이 S급 이능력자가 될 것 같은데, 그때쯤 되면 본인 공격대를 창설하겠지요?”
“생각 중입니다.”
공격대 창설이 목표이긴 한데, 문제는 자금이었다.
원래는 한 몇 년 공격대를 다니면서 필요한 돈을 모으려고 했다. 그런데 돈을 버는 족족 레벨 업 도우미가 몽땅 빨아먹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막대한 금액이 통장 안에 남아 있지만, 공격대를 만들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대출을 한도까지 땡기면 소규모의 공격대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바트로스와 타이탄을 거치면서 너무 눈이 높아졌다.
처음부터 알바트로스 급을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적당히 규모가 있는 공격대를 만들고 싶었다. 대출을 끼는 것도 마땅치는 않았고.
“그래서 말인데요.”
미샤가 슬쩍 운을 뗐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공격대를 만들 생각은 없으세요?”
“유럽에서요?”
생각지도 못한 제의였다.
메리 공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대한민국은 사실 인구에 비해 공격대가 너무 많아서 포화 상태에요. 만약 대한민국에서 시작하시면 견제도 많이 들어올 거고, 이능력자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예요.”
“그야 그렇지요.”
“만약 유럽에서 시작하신다고 하면 초기 설립 비용은 영국 왕실과 퀸 공격대, 그리고 루브르 공격대에서 1/3씩 부담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나치게 좋은 조건이다.
수한의 얼굴이 신중하게 변했다.
“당연히 조건이 있겠지요?”
“어려운 일은 아닐 거예요. 수한씨가 세 나라, 그러니까 영국이나 프랑스, 아일랜드 중 한 곳에 국적을 얻는 것, 그게 전부에요.”
실질적으로는 두 가지 조건이다. 유럽 내에서 공격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하나 더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거저먹기나 다름이 없다.
거기다 단지 자금 지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유럽 연합 내의 여러 이능력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필요하면 만나는 자리도 주선해주고, 지원 요원 및 여러 사무직 사원들도 쉽게 고용하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지원 주체인 셋 중 둘은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 첫째가는 공격대. 다른 하나는 여전히 전세계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영국 왕실.
그들의 후원을 받는다면,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수한은 셋을 보며 물었다.
“궁금한 점이 있는데,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제게 이런 제의를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이능력자 강국으로 알고 있는데요. 저를 굳이 데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 말에 루카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이유가 있지요.”
그것으로 끝.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뭘까?
고민하다 보니, 여기 앉아 있는 셋에게 생각이 미쳤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그렇기 때문에 썩 사이가 좋지 않은 국가에 속한 이들.
이 세 명에게 뭔가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아……”
수한은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걸 입 밖으로 내려고 하는데, 조용히 앉아 있던 새미가 생글생글 웃었다.
“어차피 나중 일이잖아요? 오빠가 언제 S급이 될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공격대 창설에 대해 얘기하는 건 시기상조인 것 같아요.”
“맞습니다. 일단 전제조건이 제가 S급이 되는 거 아닙니까? AA급이면 택도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요.”
“나중에 논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셋의 입가에 이것 봐라? 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뭇 사교적인 웃음을 짓더니,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중차대한 일을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겠지요. 좋습니다.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언제든지 좋아요. 코트 남작에게 연락하시면 제게 바로 소식이 들어올 거예요.”
“충분히 생각이 정리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얘기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헤밀턴이 윈저 궁전을 구경시켜 주었다. 오후 4시쯤 되자 호텔로 돌아왔다.
홍보부 직원들은 둘의 그런 모습을 몽땅 카메라에 담았다. 둘이 가는 곳에는 마엘른이 항상 동행했기 때문에, 대충 셔터를 눌러도 그림 같은 장면이 찍혔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새미가 뒤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누굴 이용해 먹으려고 저런담?”
새미도 눈치 챈 모양이다.
용이는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냈다.
[누굴 이용하려고 그랬는데?]
수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좋은 조건이긴 해.”
“돈은 원정 몇 번 다녀오면 충분히 벌 수 있잖아? 괜히 남의 돈으로 공격대 차려서 목줄 메일 필요는 없다고 봐.”
“그건 그래. 기껏 열심히 원정 다니면서, 남의 칼이 될 이유도 없고.”
“내 말이 그 말이야.”
몰디브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능력자 집단이 테러를 감행하며 메리 공주를 납치하려고 했었다.
바로 그들 때문에 수한을 영입하려는 것 아닐까.
수한은 대인전 최강의 이능력자고, 그 위력은 메리 공주가 몰디브에서 똑똑히 목격했지 않나.
정말 그 이유 때문이라면 피하는 게 좋겠다.
앞날이 창창한데,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남의 나라 암투에 참견한단 말인가.
호텔에 돌아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바로 저녁을 먹었다. 잠자리에 든 뒤 짧은 잠을 청했다.
드디어 자정.
각자의 무장을 모두 챙겼다. 마엘른도 검과 자신의 장비를 챙겨 가지고 나왔다. 용이는 하품을 쩍쩍 하더니 수한의 허리에 몸을 감고 잠을 청했다.
정확히 새벽 1시.
붉은 빛과 함께 차원문을 통과했다.
목적지는 질라 행성.
가브낙 행성과 마찬가지로, 기계 괴수들이 대륙을 휩쓸고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