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라 행성 -2- >
정신을 연결하자, 이젠 익숙하다는 듯 어떤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온다.
수한은 원정대를 정지시켰다.
“잠시만요. 질라 행성인이 할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는 사람입니까?”
“바티오 시 세라프의 전당을 관리하는 옛 공작가의 사병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범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고요. 옛 유럽식으로 따지면 기사 정도 될까요?”
“뭐라고 합니까?”
“자기네 소주군을 저희와 동행시키고 싶다는데요?”
“예?”
수한은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원정대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원주민 소년이라……”
“어떻게 할까요?”
“소년을 직접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조금 늦어진다고 큰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니까.”
티스 저택으로 원정대가 이동했다.
출타했다던 집주인이 돌아와 있었다.
한때는 위세가 등등했다는 공작가의 가주.
하지만 지금은 몰락한 귀족에 불과했다. 광대한 영역을 자랑하던 영토는 쪼그라들었고, 기사단과 수천 사병 대신 몇몇의 기사만 거느리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져, 상인 계층에게 밀리는 상태.
사람 자체는 괜찮았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몸 전체가 근육질이었다. 목소리는 우렁우렁하고, 두 눈은 태양처럼 번쩍였다.
수한의 집단 의식을 통해 얘기를 나눴다.
처음 겪는 상황에 어색해하면서도, 가주는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귀하의 아들을 저희 원정에 참여시키고 싶다고요? 위험합니다. 저희는 소풍 가는 게 아니에요.]
[위험한 것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원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아들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저희도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부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일천하긴 하지만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힌 녀석이니, 몸 튼튼한 하인 하나 생겼다 생
각하고 막 부려 주십시오.]
난처하긴 한데, 한편으로는 구미가 당겼다.
노동력?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현지 세력과 연수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기계 괴수를 잘 해결한다면, 질라 행성은 좋은 사냥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호적인 현지 세력이 있다면 원정을 다니기가 좋았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차원 무역을 통해 이득을 창출할 수 있었다.
더구나 소년만 달랑 보내지는 않을 테니 현지인 길잡이도 데려갈 수 있을 테고. 여러모로 장점이 있는 것이다.
의논 끝에 티스 가주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티스 가주와 소년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제가 도울 게 있으면 꼭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첫날은 티스 저택에서 묵었다.
그냥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가주에게 질라 행성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지리 정보를 위주로 알아보고, 그 외의 정보들도 최대한 수집했다.
덕분에 밤을 꼴딱 샜다. 가주는 푸석푸석한 얼굴로 원정대를 배웅했다.
원정대에 따라붙은 티스 가문 식솔은 총 다섯.
소년과 하인 둘, 기사 둘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두 비늘말을 타고, 석궁과 장검, 사슬 갑옷으로 무장했다.
중세 기사들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묘했다.
아침 일찍 출발했다.
[이쪽으로 가는 게 빨라요.]
소년, 리웨르가 길을 인도했다.
하인들이 그 뒤에서 길을 열었다. 우악스럽게 행인들을 밀치자, 행인들이 욕설을 하면서도 비켜주었다.
성문을 통과했다.
바티오 시가 위치한 느주브 반도는 뚱뚱한 삼각형 형상이었다. 그 중앙에 바티오 시가 있고, 삼각형 끝 부분에 항구도시 코몸이 있었다. 반면 북서쪽 삼각형의 밑변으로 가면 3개의 요새 도시가 나온다.
지금은 쇠락한, 과거 느주브 반도를 지배했던 왕정 국가의 잔재.
을루, 밀루, 졸루.
그 중 가장 큰 밀루로 향했다.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빠르게 달려도 사흘 정도는 걸린다던가.
어디까지나 질라 행성인 기준이었다. 하루 만에 주파했다. 다섯이 따라오지 못하자, 아예 그들과 그들의 짐을 ATV 천장 위에 싣고 달렸다. 비늘말들은 몸이 가벼워지자 잘 따라왔다.
리웨르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여러분의 능력입니까? 쉬지 않고 사흘을 달려야 하는 거린데, 어떻게 하루 만에 왔지요?]
[이 정도로 놀라시면 곤란합니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도 질라 행성의 문명이 빠르게 발전할 테니까요.]
저 앞에 밀루 도시가 보인다.
강을 면하고 있는 도시였다. 한쪽에는 높은 성벽이 올라가 있고, 그 성벽 너머에 큰 규모의 나루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도시의 두 부분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성벽 안은 좀 오래된 것 같고 나루터 인근은 최근에 건설된 것 같았다. 얼핏 보기에도 세월이 묻어나왔다.
이곳에도 세라프 종족은 없었다.
리웨르를 따라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구 시가지의 저택에서 하루를 쉬었다. 예전에 도시를 다스리던 가문과 안면이 있는 듯했다.
그 날 밤, 리웨르가 원정대에게 말했다.
[대륙으로 접어들면 조금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위험한 거라도 있습니까?]
[대륙 남동부는 크롱 제국의 세력권입니다. 종족도 다르고, 나라도 다릅니다. 크롱 제국의 기미크 종족은 매우 흉폭하고 잔인한 종족이에요.]
느주브 반도의 뒬르 종족과는 생김새가 확연히 달랐다.
언뜻 보면 사람과 비슷하지만, 체모 대신 비늘이 나 있었다. 이마 양쪽에는 혹처럼 보이는 뿔이 작게 나 있었다. 엉덩이에 짧은 꼬리가 나서, 달릴 때는 이걸 이용해 균형을 잡았다.
목적지는 크롱 제국의 수도, 크로시아로 잡았다.
이미 폐허가 됐겠지만 그곳을 지키는 세라프 종족이 있을 터. 바로 그 세라프를 찾아가는 것이다.
처음 강을 건넜을 때는 반도와 대륙의 풍경이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자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캬아악!”
[괴물이다!]
커다란 공룡이 출현했다.
영화에서 보던 티라노사우루스를 닮았다. 그런데 머리는 두 개에, 앞다리가 고릴라처럼 두툼했다.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고, 타닥타닥 전기가 튀고 있었다.
B급 변이체.
그것을 본 질라 행성인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만약 바티오 시에 저 변이체가 출현했다면 그것으로 바티오 시가 멸망에 준하는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정팀에겐 가소롭기만 했다.
수한이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짧은 총성과 함께, 총알이 방어막을 뚫고 변이체의 심장에 박혔다.
잠깐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땅바닥에 몸을 뉘였다.
쿵!
육중한 몸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질라 행성인들이 놀란 눈으로 수한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괴물은 생전 본 적이 없었다. 석궁을 날려도 박히기나 할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이 풍겼다. 그런데 그걸 일격에 죽여 버리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석구가 지원 요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자, 심장만 빼고 갑시다.”
“시체는 안 챙기고요?”
“덩치가 커도 너무 커요. 다른 변이체도 많을 테니, 시체는 놔두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기톱으로 심장을 꺼냈다.
차단막으로 잘 봉인한 후, 수한이 변이체 시체를 향해 총을 갈겼다. 불꽃이 피어오르며 시체가 순식간에 불타 없어졌다.
그 일이 있은 후, 질라 행성인들의 태도가 더욱 조심스럽게 변했다. 안 그래도 주의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이젠 아예 상전 모시듯 하는 것이다.
그 날 하루, 변이체를 꽤 자주 만났다.
더구나 대부분이 C급 이상이었다. 일반 지원 요원들만으로는 상대가 힘들다는 얘기였다.
[이 속도면 오늘 내로 브종 시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리웨르가 손을 꼽아보더니 그렇게 얘기했다.
크롱 제국 남동부 최대의 도시였다.
인근에 비옥한 평원이 펼쳐져 있어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라고 했다. 거기 도착한 후 조금만 더 가면 크로시아가 나온다나.
“으음……”
수한은 브종 시가 있다는 방향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새미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뭐 있어?”
“뭔가 느껴지는데 뭔지는 모르겠다. 정찰 좀 해봐야겠어.”
수한은 용이를 날렸다.
한 번 키잉, 하고 울더니 기운차게 하늘로 솟구쳤다.
옆에서 마엘른도 한 마디를 했다.
[힘의 파동이 느껴집니다. 누군가 하늘 위에서 격돌하는 것 같은데,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예민한 엘프 특유의 감각으로 먼저 알아차렸나 보다.
그나저나 하늘 위라고?
수한은 지평선이 아니라, 그 위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신안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흐릿하게 어떤 존재들이 보였다.
그들이 부딪치며 강렬한 힘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섬광이 터지고, 폭음이 울렸다.
거리가 먼데다, 그들이 뿜어대는 힘 때문에 뚫고 보기가 어려웠다. 고속으로 이동 중이라 더욱 그러했다.
용이를 통해 보았다.
충분히 접근한 뒤라서 그들의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세 존재.
붉은 날개, 혹은 푸른 날개를 펄럭이는 작은 인영이 둘. 그리고 커다란 새처럼 생긴 기계 괴수가 하나.
수한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비행형 기계 괴수라고?
저걸 어떻게 잡으라는 거지?
방어력이나 공격력은 일반 육상형 기계 괴수에 비해 밀린다. 하지만 기동성은 수십 배는 더 뛰어났다. 회피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그 사실을 원정팀 전체에 알렸다.
“맙소사, 비행형 기계 괴수요?”
“브종 시 상공에서 싸우는 거죠?”
“이거 접근하지 말아야 하나……”
“세라프들이 좀 더 유리한 것 같습니다. 일단 접근해 보지요. 어쨌든 세라프들과 접촉을 해야 하니까요.”
수한은 ATV 지붕 위로 올라갔다.
용이와 집단 의식을 이룬 채 셋의 접전을 계속 관찰했다. 혹시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전투는 세라프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나만 있어도 훨씬 유리한 전투였다. 그런데 둘이 합공을 하니, 기계 괴수로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몇 번 도망치려다가 끝내 덜미가 잡혔다.
안심하고 브종 시를 향해 갔다.
세라프들이 기계 괴수 시체를 멀리 던져버리는 게 보였다. X-0를 정화하고 떠나기에, 얼른 쫓아가서 기계 괴수의 주요 부품을 챙겼다.
원정팀이 싱글벙글 웃었다.
“이거 시작이 좋은데요?”
“이번 원정도 대박의 느낌이 납니다.”
브종 시로 들어갔다.
곳곳에 전쟁의 상처가 나 있었다.
성벽은 온전한데, 시가지가 공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공중 폭격이 이뤄진 모양이다.
도시를 돌아본 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세라프의 전당이 없다.
최악의 경우, 차원문을 통과하여 도망칠 수가 없다는 뜻. 남동쪽의 바티오 시를 향해 후퇴하는 게 최선일 듯했다.
세라프들은 브종 시 중앙의 시청에 머물러 있었다.
원정팀이 접견을 요청하자, 바로 허락이 떨어졌다.
붉은 날개의 세라프와 푸른 날개의 세라프.
[반갑다. 가브낙 행성에서 그대들의 활약이 대단했다지? 이곳에서도 활약해 주길 부탁한다. 나는 피니르아라고 한다. 브종 시의 방어 책임을 맡고 있다.]
[반갑습니다. 헤이시입니다. 피니르아를 돕고 있어요.]
피니르아는 적색 검을, 헤이시는 푸른 활을 들고 있었다.
수한이나 원정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가브낙 행성에서 타이탄 공격대가 워낙 많은 성과를 냈으니까.
둘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매우 안 좋았다.
크로시아 파괴 후, 기계 괴수들이 대륙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특히 비행형 기계 괴수들 때문에 피해가 컸다. 현재 여섯 마리가 남아 있는데, 그것들이 바람처럼 날아와 민간인 거주 지역을 집중 폭격하고 달아난다고 했다.
[급선무는 그 녀석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 녀석들을 남겨두면, 누적되는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하긴 육상형 기계 괴수와 싸울 때 하늘을 날아와 합류하면 뭘 어떻게 하겠나.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히고, 후퇴를 생각해야 되겠지.
헤이시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원정팀을 보았다.
[혹시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난처했다.
이제 막 도착했는데 방법이 있을 턱이 있나.
모두들 고개를 젓자, 두 세라프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요.]
[어서 그대들이 도움이 되어 줬으면 좋겠다. 이대로는 오래 버틸 수가 없어.]
세라프들을 만나고 나오는 자리에서, 석구가 은근한 어조로 수한에게 물었다.
“저번처럼 변이체들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겠습니까?”
“전 변이체들을 정신 제압할 수가 없습니다. 세라프들도 보니까 정신 계열 이능에는 특화된 것 같지가 않고요.”
“이시테가 그립네요.”
“사실 그 다섯 변이체가 특이했던 거지요. 기계 형태로 진화해서 기계 괴수 시체로 달랠 수가 있었으니까.”
어쩌겠나.
없으면 없는 대로 새로운 방법을 궁리해 봐야지. 그냥 손만 빨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브종 시에는 피난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곳곳에 천막이 보였다. 이질적인 용모의 피난민들이 원정팀을 두려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브종 시를 나와 남동쪽 벌판에 야영지를 차렸다.
밤이 되었다.
수한은 용이만 데리고 야영지를 거닐었다.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물론 지금 돌아가도 충분했다. 기계 괴수의 시체를 고스란히 얻었으니, 이것만 가져가도 이익이 날 것이다.
정보 수집도 사실 할 만큼 했으니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애초 목표는 진작 달성했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 뭔가가 수한의 영감을 간질이고 있었다.
가브낙 행성처럼 대박을 낼 것 같은 느낌.
한 가지, 딱 한 가지 생각만 떠올리면 쾌속으로 끝장낼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