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 기계용 -2- [5권 끝] >
[그걸로 충분합니다.]
수한은 만족했다.
기계 괴수와의 1대 1은 박빙이라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수한이 개입하여 뒤집는 게 가능했다. 속성 공격을 몽땅 퍼붓고, 새미 등 다른 이능력자들의 공격이 더해지면 제 아무리 기계 괴수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기계용의 제어 능력도 조금씩 더 향상될 테니까.
만족스러운 기분을 만끽하며 브종 시로 돌아왔다.
수한의 말을 들은 원정팀이 잔뜩 고무되었다. 당장 나가서 기계 괴수를 잡자고 야단이었다.
“쉬엄쉬엄 하죠. 기계용에게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은 소식이 더 있었다.
공격대 하나가 추가로 브종 시에 도착했다.
며칠 전 바티오 시에서 봤던 오크 원정대였다. 이동 속도가 느려 이제 도착했지만, 전력만큼은 타이탄 원정팀에 뒤지지 않았다.
지구인과 오크들은 서로 경계하면서도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당분간은 브종 시에서 동고동락하게 될 것 같았다.
그 날 밤.
해가 떨어지고 몇 시간이 지난 후, 쿠웅 쿠웅 하고 땅이 울렸다.
뭔가 무거운 물체가 접근해오고 있었다.
어디 그것뿐이냐.
하늘 저편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먹구름 사이로 싸늘한 청색 빛이 번뜩였다.
기계 괴수들이 다가온다.
무려 다섯 마리.
지상에서는 셋, 하늘에서는 둘.
게다가 그 중 한 마리는 중형 기계 괴수였다. 지금 브종 시에 있는 세라프 중 한 명이 전담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소형 기계 괴수 네 마리를 원정팀과 세라프 한 명이 힘을 합쳐 상대해야 한다.
[제가 하늘을 막겠습니다.]
[그럼 내가 중형 기계 괴수를 상대하겠다.]
나머지 기계 괴수 2마리는 두 종족의 몫.
수한은 오크 중 유독 덩치가 큰 자에게 말을 걸었다.
[기계 괴수 2마리를 우리끼리 감당해야 될 것 같은데,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오크가 한쪽에 앉아 있는 기계용을 흘낏 보았다.
[저걸 이용하면 1마리는 잡을 수 있지 않소?]
[힘들긴 하지만, 적어도 시간은 끌 수 있습니다.]
[이거 좀 힘들겠는데……]
오크들이 자기들의 전력을 공개했다.
AA급 이능력자 5명, A급 이능력자 10명, B급 이능력자도 10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원정팀과 합치면 AA급 10명에 A급 15명, B급 15명이니 적은 수는 아닌데, 중심이 될 S급 이능력자가 없기 때문이다.
오크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는 시간을 끄는데 주력하는 게 어떻겠소? 그러면 세라프들이 맡은 기계 괴수를 처리하고 지원을 올 거요.]
[그 수밖에 없겠습니다.]
세라프들에게 그 내용을 말하자, 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시간만 끌고 있어라. 우리가 합류하여 남은 것들을 처리하겠다.]
세라프들이 날아올랐다.
수한은 기계 괴수에 탔다. 다른 이능력자들은 ATV 위에 올라갔다.
의논 끝에, 기계 괴수에는 수한만 타기로 했던 것이다.
격렬한 몸싸움 중 탑승자가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마 머리가 안전한데 그곳은 혼자 타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지상에서 전투를 치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윽고 포진을 마쳤다.
거대 기계용이 가장 앞.
ATV 수십 대가 그 뒤쪽에 부채꼴로 퍼져 있었다. 원정팀의 지원 요원들이 운전대를 잡았다. 지구인과 오크 이능력자들이 거기 타고 돌격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오크들이 희한한 짓을 했다.
자기들이 타고 온 코뿔소에게 붉은 액체를 뿌렸다.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자 코뿔소의 눈이 뒤집어졌다. 검은자위는 사라지고 흰자위만 남았다.
몸집도 커진 것 같았다. 피부에 묘한 광채가 어렸다. 마치 피가 묻어 번들거리는 듯했다.
준비가 끝날 때쯤, 기계 괴수들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익룡 형태의 기계 괴수 두 마리, 머리가 두 개인 곰이 한 마리, 늑대 형상이 두 마리.
수한은 늑대 모양 기계 괴수에게 주목했다.
둘 다 똑같은 종류.
모든 면에서 동일했다. 등에 달린 길쭉한 주포가 주무기였고, 배 양 옆에 소형 미사일 발사대가 보였다. 언뜻 드러나는 치아가 음험하게 빛나는 게, 뭔가 강력한 병기가 숨어 있을 것 같았다.
“캬아앙!”
기계용이 세차게 울부짖었다.
수한은 마법 소총을 만지작거렸다.
기계 괴수들이 이쪽을 포착했다. 푸른빛이 한 번 두 종족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팟!
선공을 날린 것은 붉은 날개의 세라프 피르니아.
번개처럼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꽤 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을 단번에 단축한 것.
늑대 기계 괴수들이 공격을 포착하고 주포를 쏘았다. 그 서슬에 피르니아가 급히 날개를 펄럭였다. 몸이 자연스레 우로 돌아가는데, 속도가 꽤 줄었다.
곰 기계 괴수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몸을 던져 피르니아를 들이받았다. 피르니아가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런!”
수한은 경호성을 질렀다.
당초 세웠던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있었다.
헤이시가 개입하려 했지만 기계 괴수들이 한 발 더 빨랐다. 쌩 하고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별 수 없이 그들을 쫓아가 브종 시를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
늑대들이 다시 주포를 쏘았다. 위력이 약한 대신 연사 능력이 상당한 듯했다. 피르니아가 붉은 검으로 그 공격을 쳐냈지만, 닥쳐오는 곰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기계용이 움직였다.
전력으로 가속하여 곰을 들이받았다.
꽈앙!
범종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기세 좋게 돌진하던 곰이 저지당했다. 워낙 세게 들이받아서 넘어질 뻔했다.
“구우웅!”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기계용을 확인했다.
왼쪽 앞발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쳤다. 그 서슬에 방어막이 국소적으로 박살났다. 기계용의 오른쪽 어깨가 움푹 파이고 전깃불이 튀는 게 피해가 큰 것 같았다.
[엉겨 붙어!]
수한이 강하게 명령했다.
기계용이 네 개의 다리로 곰 기계 괴수의 몸을 감았다.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에다 대고 입을 벌렸다.
번쩍!
광선포가 발사되었다.
강렬한 빛줄기가 뻗어나갔다. 방어막이 눈에 띄게 출렁였다. 이내 구멍이 뚫리고, 광선 공격이 곰의 머리를 직격했다.
장갑 표면이 녹아내렸지만, 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두 앞발로 기계용의 몸통을 끌어안았다. 최대한 힘을 주자, 기계용의 두툼한 허리가 으스러질 듯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한은 정신을 집중했다.
용이의 배에서 총구가 무수히 튀어나왔다. 그 많은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천공 속성과 중화 속성의 조합.
방어막이 모조리 중화되었다. 총알이 기계 괴수의 머리를 두들겼다. 그러자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렸다.
문제는 기계 괴수의 덩치가 너무 크다는 것. 수한 입장에서는 큰 구멍이지만, 기계 괴수에겐 좀 굵은 바늘에 찔린 것과 비슷했다.
그나마 그 바늘이 수백 개는 되어서 조금씩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그래도 짧은 시간에 기계 괴수를 어떻게 해보기는 어려웠다.
기계용의 허리가 작살나기 직전 피르니아가 끼어들었다.
눈앞에 붉은 빛이 번뜩였다. 짧은 거리를 도약해 온 피르니아가 검을 내리친 것이다.
적색 빛의 파도가 기계 괴수를 덮쳤다.
단칼에 머리를 양단할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
별 수 없었다. 기계용의 허리를 놓고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큰 덩치가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금세 멀어졌다.
늑대들이 기계용을 정조준했다.
몸집이 커서 조준하기도 쉬웠다. 곰이 막 둘의 앞을 벗어난 순간, 집중적으로 공격이 쏟아졌다.
피르니아가 검을 휘둘렀다.
적색 검이 그리는 궤적에 늑대들의 공격이 걸렸다. 거울에 반사되는 빛처럼 저 하늘로 튕겨져 나갔다.
수한은 잠깐 숨을 돌렸다.
겨우 몇 번 일제 사격을 실시했다고 벌써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속성 부여는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능력이지만, 이 정도로 난사하는 것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
곰이 또 달려들었다.
피르니아가 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자 곰은 방향을 틀어 기계용을 덮쳤다.
저기 걸렸다간 금방 전신이 박살날 터.
음속을 기계용에게 걸었다.
이심전심, 기계용이 다급히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이로 곰의 돌진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대신 늑대들에게 기계용이 노출되었다.
번쩍, 쾅쾅!
광선포가 기계용의 방어막을 두드렸다.
기계용이 방어막에 힘을 집중했다. 한 번은 막았지만 두 번째에는 힘들 것 같았다. 더구나 벌써 충전이 끝났는지 늑대들의 주포 끝이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수한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곰이 주변을 알짱대고 있었다. 피르니아가 곰을 견제하고 있지만 언제 달려들지 몰랐다. 늑대들과는 거리가 꽤 있어서 접근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AA급 이능력자들에게 시선을 끌어달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다 주포에 직격당하면 뭘 해볼 것도 없이 단숨에 살해당할 테니까.
방법은 한 가지.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면 현재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하긴 피해가 없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떨어지는 전력으로 기계 괴수 다섯 마리를 상대하려면 어느 정도는 피해를 감수해야지.
수한은 군체 의식으로 피르니아에게 자신의 계획을 전달했다.
피르니아가 바로 반응했다.
공간을 도약하여 늑대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 검을 휘두르자, 적색 기운이 비처럼 쏟아졌다.
늑대들이 껑충 뛰었다.
급히 피하느라 주포에 맺혔던 빛이 사라졌다. 방어막에 집중한 채 두 갈래로 도망쳤다. 덕분에 큰 피해 없이 피르니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피르니아가 그 중 하나를 쫓아갔다.
미친 듯이 검격을 날렸다. 그때마다 강렬한 기운이 늑대를 타격했다. 목표가 된 늑대는 날고 뛰느라 정신이 없고, 다른 늑대가 계속 견제 사격을 날렸다.
반면 수한이 탄 기계용은 위험에 빠져 있었다.
곰 기계 괴수가 달려든 것이다.
음속까지 동원하여 요리조리 피했다. 마비 속성 총알을 마구 날렸다. 그 덕에 쉽게 잡히지는 않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곰 기계 괴수가 몸에서 작은 벌레들을 사출한 것이다.
아주 작아서 언뜻 보면 검은 구름처럼 보이는 기계 벌레들.
그것들이 기계용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관절의 주요 부위에 부착하여 날카로운 이빨로 갉아먹기 시작했다. 동일한 재질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기계용의 전신이 마모되기 시작했다.
수한은 금방 대책을 생각해냈다.
‘벼락불!’
기계용이 전신으로 번개를 뿜어댔다.
검은 구름이 바싹하게 타서 가루가 되었다.
한 번 위기를 넘긴 것이다.
수한은 기계용의 눈을 통해 곰 기계 괴수를 노려보았다.
기계용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10분도 지나기 전 곰에게 따라잡히게 생겼다.
두 원정대의 이능력자들은 피르니아를 돕는 중이었다. 늑대들을 방해하고, 시선을 분산시키면서 유효한 공격을 꽂아 넣었다. 방어막이 점차 약해지면서, 금속 몸체 곳곳에 상처가 늘었다.
기계용이 곰에게 잡히는 게 먼저냐, 아니면 피르니아와 두 종족 이능력자들이 늑대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냐.
거기에 전투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수한은 음속과 성좌를 기계용에게 건 채 버텼다. 가끔 불벼락을 토하여 곰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특히 마비 속성을 유용하게 썼다.
그러나 조금씩 따라잡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수한은 눈을 부릅뜨고 곰을 노려보았다.
한 가지를 준비했다.
속성 부여를 사용했다.
두 손이 붉게 물들더니, 기계용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속성 조합까지 사용했다. 붉은빛에 이어, 보랏빛이 기계용의 몸을 한 번 뒤덮었다.
지금까지 쓰던 마비 속성과 중화 속성 조합 대신, 더 강한 조합을 선택한 것.
그런데 한 발 늦었다.
속성 조합이 끝나기 직전, 곰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곰의 앞발이 기계용의 머리를 후려쳤다.
꽈앙!
수한이 앉아 있는 곳.
바로 그 자리를.
[5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