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난 >
피르니아.
다급히 날갯짓하던 그녀의 심장에 창이 박혔다.
아니, 뚫고 지나갔다.
피르니아의 전신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허공에 붉은 핏물이 뿌려졌다.
헤이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피르니아!]
애타게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하늘 저 멀리 날아갔던 창이 저절로 기계 괴수에게 돌아갔다. 기계 괴수가 그걸 집어 들더니, 또 투척 자세를 취한다.
[도, 도망쳐!]
헤이시가 몸을 날렸다.
소용없었다.
또 푸른 선이 그어지자 헤이시의 몸이 산산이 흩어졌다. 방금 전까지 함께 싸웠던 게 거짓말 같았다.
수한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늘 끝까지 날아갔던 창이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저걸 손에 쥐면 이번에는 수한의 목숨이 날아가겠지.
이미 동력핵에 과부하가 걸린 상황.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착지하자.]
산이 하나 보였다.
빠르게 그 뒤로 숨었다. 최소한 창에 직격당하는 건 피하자는 것이다.
비행체에서 뛰어내렸다. 전투복의 날개를 이용하여 안전하게 착지한 뒤,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허리의 단검을 쓰다듬었다.
단검이 검게 번들거리더니, 수한의 전신이 거뭇하게 변했다. 이내 주변 환경에 동화되어 사라져 버렸다.
용이도 비행체에서 벗어났다. 최후의 명령을 남긴 채 수한의 품에 숨자, 비행체가 굉음을 터뜨리며 하늘 저 편을 향해 날아올랐다.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주시했다.
콰앙! 꾸르릉, 쾅쾅!
비행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했다.
기계 괴수가 또 창을 던진 것이다.
동력핵까지 거기에 휩쓸린 듯했다. 이제껏 수한이 본 적이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후끈한 열기와 충격파가 수한이 있는 곳까지 밀려왔다.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흙먼지가 폴폴 일어났다. 용이를 안은 채, 조용히 마법 소총을 잡았다. 기계 괴수의 탐지 장치에 걸릴까 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쿵, 쿵, 쿵.
땅이 울렸다.
뭔가가 천천히 다가왔다.
주기적으로 진동이 퍼졌다. 바위 밑의 벌레들이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무들이 벌벌 떨며 나뭇잎들이 마구 떨어졌다.
수한은 마법 소총을 움켜쥐었다.
이걸 쏴 봤자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는 없지만, 악 소리도 못 내고 죽어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기계 괴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바위 위, 저 까마득히 높은 곳에 기계 괴수의 두터운 다리가 언뜻 보였다.
수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기계 괴수는 우두커니 서서 비행체가 폭발한 부위를 확인했다. 눈에서 푸른 광선까지 뿜어 샅샅이 훑어보더니, 그제야 몸을 돌렸다.
땅이 울리는 게 차츰 멀어졌다.
수한은 몸을 비틀어 바위틈에서 빠져나왔다.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긴 채, 고개만 내밀어 기계 괴수들을 살폈다.
‘뭘 하는 거지?’
기계 괴수들이 땅을 수색하고 있었다.
아까 피르니아와 헤이시가 죽었던 지점 근처.
신안을 발동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고글의 비율만 조절해서 놈들을 주시했다. 기계 괴수들이 고깃덩이가 된 피르니아와 헤이시의 시체를 수거하는 것이 보였다.
시체는 왜?
기계 괴수들은 살점 하나, 피 한 방울까지 꼼꼼하게 수거했다. 피 한 방울을 얻자고 흙을 퍼가는 수고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에 걸쳐 두 세라프의 시체를 갈무리한 다음 몸을 돌렸다.
그 큰 덩치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수한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살아남았다.
[나 잠 좀 잘게.]
용이가 수한의 품 안에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한바탕 추격전에서 모든 힘을 소진한 모양.
수한은 막막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소한 대지, 생소한 하늘, 생소한 나무들이 수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군체 의식을 발현해 보았다.
잡히지가 않는다.
새미도, 마엘른도 너무 멀리 있는 것이다. 더구나 방향도 제대로 모르니 뭘 어쩔 것인가.
수한은 쓰게 웃었다.
새미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던 때 이후론 처음인 것 같았다.
거기다 이번에는 완벽히 혼자였다. 도와줄 사람도 없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그나마 지도도 있었고, 계획서 내용도 숙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그런 것도 없다.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일단 자리에 앉은 채 갖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물이 찬 수통 1개, 압축 건빵 9개, 무기류와 야전삽, 구급낭, 그리고 손전등이 전부.
당장 며칠은 생존할 수가 있다. 압축 건빵을 아껴 먹으면 일주일까지도 나눠먹는 게 가능했다.
문제는 당장 내일부터 물을 마셔야 한다는 것.
외계 질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미드가르드 행성에서 히메르아에게 받은 숲의 망토가 있으니 몸 상태가 최상으로 유지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걸로 당분간은 버틸 수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일단 자야겠다.’
무척 피곤했다.
추격전을 하는 동안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휴식을 충분히 취한 후, 브종 시를 향해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 같은 것은 없었다. 별 수 없이 나무 위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기계 괴수들이 헤집어 놓은 까닭에, 야생동물도 변이체도 몽땅 도망가서 마음 편히 잘 수 있었다.
그래도 아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밤새 선잠을 잤다. 뭔가 소리만 들려도 눈을 떴다가 주위를 살폈다. 안전한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다시 잠이 들었다.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올랐다.
수한은 눈을 떴다.
하늘 저 편이 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잠을 좀 잤더니 정신이 맑아졌다. 천근만근 무겁던 몸도 많이 가벼워졌다.
“후우우.”
길게 심호흡을 했다.
상황은 나쁘지만,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예전에 비슷한 경험도 있지 않은가. 바티오 시에서 티스 가문에게 얻은 지도도 수한의 주머니에 잘 들어 있었고. 그걸 잘 보면 이번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새미와 마엘른이 걱정되었다.
탈출은 잘 했을까, 기계 괴수들이 그들에게 돌아갈 텐데 괜히 자신을 찾겠다고 이쪽으로 오는 것은 아닐까.
유사시 브종 시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니, 일단은 브종 시로 돌아가야겠다.
그렇다면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는 게 급선무.
수한은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주변 지형과 지도를 대조했다. 지구와는 확연히 다른 형식이지만, 이미 충분히 설명을 들어서 알아볼 수 있었다.
‘꽤 많이 왔는 걸.’
추격전을 오래 벌이기는 벌었나 보다.
크로시아에서 5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브종 시까지는 1천 킬로미터가 넘었다.
1시간에 5킬로미터를 걷는다고 치면, 하루 10시간씩 걸어도 20일은 넘게 가야 한다.
예방 접종이 떨어지기 전까지 무척 아슬아슬했다.
또 병원 신세를 져야 할 모양.
수한은 잠들어 있는 용이를 내려다보았다.
중간에 기계 괴수의 시체를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변형시켜서 타고 다닐 텐데.
주머니에서 압축 건빵 하나를 꺼냈다. 3등분 한 후 꼭꼭 씹어 먹었다. 물도 한 모금 마시고 몸을 일으켰다.
“해보자!”
스스로에게 다짐한 뒤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동쪽, 브종 시였다.
산을 타는 것은 쉬웠다. 레벨 업 도우미 덕에 몸이 날렵해진 까닭이었다.
하루를 꼬박 걷자 산에서 벗어났다.
여기서부터 브종 시까지는 계속 평야 지대가 이어진다. 기계 괴수와 마주치는 것만 피하면 된다.
“키잉!”
그때쯤 용이도 깨어났다.
용이가 밥을 달라고 칭얼거렸지만, 저번처럼 힘을 많이 주입해줄 수는 없었다. 그저 최소한의 활동이 가능한 정도로만 힘을 주입했다.
[여기 어디야?]
용이가 주변을 뚤레뚤레 살폈다.
수한은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용이가 요란하게 날갯짓을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집에 못 가?]
[걱정 마.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자.]
용이를 하늘 높이 날렸다.
녀석의 시야를 공유하며, 지도와 대조했다.
아침에 수한이 파악한 게 맞았다. 하늘 높은 곳에서 대지를 내려다보니 확실해졌다.
어느새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제 추격전에서 생긴 듯한 구덩이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주변의 나무에서 부채처럼 생긴 나뭇잎을 긁어모아 덮자, 나름 안락한 잠자리가 탄생했다.
용이가 깨어났으니 선잠을 자지 않아도 좋다. 사주 경계를 지시한 뒤 푹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용이가 수한을 깨웠다.
[일어나, 일어나!]
[무슨 일이야?]
[기계 괴수가 가까이 오고 있어!]
[뭐?]
잠이 확 달아났다.
옆에 놔둔 마법 소총을 끌어당겼다. 구덩이 밖으로 고개만 배꼼 내밀었다. 단검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용이의 말 대로였다.
대지가 은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신안을 사용하자, 멀리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지나는 게 보였다.
수한을 노리는 것 아닌 것 같다. 그냥 배회 중이었다.
한참 동안 숨을 죽였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 괴수가 멀리 떠나갔다.
잠이 다 달아났지만 체력을 보존하려면 자야 했다. 수한은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새벽.
이번에는 변이체들이 접근했다.
기껏해야 C급의 변이체들이었다. 수한은 성질을 내며 몽땅 다 쏴 죽였다. 화염 속성으로 불을 지른 후, 아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수통에 남은 마지막 물을 비웠다.
남동쪽에 마침 작은 개울이 흘렀다. 거기서 물을 좀 떠가야겠다.
그런데 개울에 도착하고, 수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물은 맑은데, 썩은 듯한 악취가 났다.
굳이 분석을 안 해봐도 알겠다. 구급낭에 포함된 정수 필터를 써도 저걸 마시는 건 불가능했다.
근처에 다른 수원이 있으면 좋겠는데, 용이로 살펴보니 꽤 먼 곳에 있는 작은 호수 정도가 고작이었다. 더구나 까맣게 탄 동물 시체들이 둥둥 떠 있었다.
결국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 상류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용이를 먼저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울물이 오염된 원인을 알아냈다.
상류쪽으로 약 1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
크롱 제국인들이 떼죽음을 당해 있었다. 그 시체들이 개울가에 쌓여, 개울물이 오염된 것이다.
한때는 지구에서도 흔히 보였던 광경이다.
입맛이 썼다.
상황이 조금만 좋았어도 한데 모아 화장이라도 시켜줄 텐데, 그랬다가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면 큰일이었다. 멀리서 명복만 빌어준 후 상류로 조금 더 올라갔다.
그러자 맑은 물이 나왔다.
물을 마시던 동물들이 수한을 보고 놀라 달아났다. 녀석들을 일별한 후, 개울로 다가갔다.
용이가 물에 발끝을 담그더니 재잘거렸다.
[깨끗해! 마셔도 되겠어.]
[그래, 고맙다.]
정수 필터로 물을 받은 후 적당히 몸을 축였다.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출발했다.
곳곳에 위험이 산적해 있었다.
변이체들이야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기계 괴수가 몇 시간 간격으로 출몰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놈들의 눈에 띄기라도 했다간 당장 목이 날아갈 테니까.
덕분에 이동 속도가 느렸다. 하루에 50 킬로미터는 갈 줄 알았는데, 그 절반도 이동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압축 건빵도 동이 났다.
정확히 닷새.
체력 소모가 생각보다 커서 하루에 1개만으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최대한 아껴 먹은 탓에 사흘이 아니라 닷새 동안 먹을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는 사냥과 채집을 병행했다.
눈에 띄는 나무 열매를 닥치는 대로 걷어오고, 작은 동물도 몇 마리 잡았다. 용이로 주변을 살피면서, 그것들을 불에 구워 먹었다.
신안이 있어 다행이었다.
케르베스 인들에게 받은 렌즈를 착용한 상태라, 제한적이나마 미래 예지가 가능했다. 이걸 먹고 당장 탈이 날지 안 날지 확인하면서 섭취했다.
“어휴, 맛없어.”
수한은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고기는 하나같이 누린내가 났고, 열매는 지나치게 떫거나 셨다. 식사를 하자 혀가 다 얼얼해졌다.
걷고, 밥을 먹고, 자고, 다시 걷는 게 반복되었다.
곳곳에 시체와 폐허가 넘쳐났다.
기계 괴수들이 크롱 제국을 철저히 부셔버린 것 같았다. 조난 당한지 벌써 열흘이 되어 가는데, 멀쩡히 살아 있는 크롱 제국인을 보지 못했다.
며칠이 더 지났다.
조난당하고 정확히 보름이 흐른 시점.
수한은 슬슬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초 목표했던 거리의 절반밖에 오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한 달은 더 가야 브종 시에 도착할 듯했다. 바티오까지 가려면 또 시간이 걸릴 테니,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수한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서두르다가 잘못 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이런 때일수록 여유를 가지고 냉정하게 대처해야 했다.
용이가 수한에게 말을 걸었다.
[원주민들이 보여!]
[원주민들? 어디?]
용이가 수한에게 영상을 전달했다.
지치고 불안한 기색의 크롱 제국인들이 남동쪽으로 걷고 있었다. 백여 명 정도 되는데, 건장한 남자들은 걷고 어린아이와 여자, 노인들은 수레를 탔다.
중앙에는 작은 마차가 위치했다. 울긋불긋 화려하게 칠해놓은 마차였다. 크롱 제국인들은 그 마차를 감싼 진형을 취했다. 누군가 중요한 인물이라도 타고 있는 모양이다.
조난당하고 처음 보는 지성 생명체들.
칼과 활로 무장하고 있지만, 저 정도로는 하급 변이체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안쓰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장 수한 본인의 코가 석 자. 최대한 빨리 브종 시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외계인들을 보살피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겠나.
시선을 막 거두려는 찰나였다.
“구어어엉!”
묘한 소리가 들렸다.
일반적인 짐승이 내는 소리가 아니다.
수한은 용이를 통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서 익룡처럼 생긴 뭔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용이를 확대시킨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생김새가 좀 이상했다. 몸 전체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런가 하면 몸이 반투명해서, 반대편의 구름과 하늘이 언뜻 비쳤다.
생물이 아니다.
소환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