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류 -1- >
수한은 얼굴을 굳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폭탄이 터진 흔적이 보였다.
비행형 기계 괴수들이 흔히 쓰곤 하는 폭탄 공격.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행형 기계 괴수들이 공격해 온 모양이었다.
수한도 없고, 두 세라프도 죽어버린 상황. 크로시아의 세라프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기계 괴수를 막을 방법이 아예 없었다.
[어떻게 하죠?]
아르텔라가 흐린 얼굴로 수한을 보았다.
브종 시까지만 오면 만사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 보니 그게 아니어서 실망이 컸다.
막막한 것은 수한도 마찬가지.
바티오는 온전할지 모르겠다. 그곳까지 파괴당했으면 정말 큰일인데.
[일단 용이가 오길 기다리죠. 바티오가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봐야겠습니다.]
용이는 근처에서 기계 괴수의 흔적이 발견되어 정찰 보낸 참이었다. 그래서 브종 시의 상태를 미리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키잉!”
용이가 돌아왔다.
자기가 목격한 광경을 수한에게 전달했다.
기계 괴수 시체가 하나 보였다.
익룡을 닮았다. 날개 하나는 부러지고, 동력핵이 뽑혀 나간 채 널브러져 있었다.
동력핵이 없으면 어차피 구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걸 뻔히 알 텐데, 용이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저걸 변형시켜서 타고 가는 게 어때?]
[그러면 좋지만 움직일 수가 없잖아. 동력핵도 없는데.]
[동력핵 대신 변이체 심장을 쓰면 돼. A급 변이체 심장이라면 임시로 써먹을 수 있을 거야.]
[정말?]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폐허라고 해도 건물들의 골조 정도는 남아 있었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쉬었다. 최소한 허허벌판에서 거적때기 하나 깔고 눕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밤이 늦자, 조용히 폐허를 빠져나왔다.
용이가 인근 기계 괴수 시체 근처에서 A급 변이체들을 몇 마리 찾아놓았다. 그들에게 접근한 뒤, 저격으로 단번에 황천을 건너게 만들었다.
단검으로 심장을 꺼냈다.
도합 네 개.
용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기계 괴수 시체로 발을 옮겼다.
질라 행성에서 처음 변형시켰던 기계 괴수와 비슷했다. 다만 그때보다는 훼손 정도가 심했다.
용이가 기계 괴수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상태를 살피더니, 수한에게 말했다.
[비행은 힘들 것 같아. 추진 장치가 많이 훼손됐어.]
[상관없어. 걷기만 해도 충분하니까. 이동만 가능하게 만들어. 탈 수 있는 공간은 좀 많이 만들어 놓고. 아, 무기도 몇 개는 살려놓는 게 좋겠다.]
[알았어.]
기계 괴수가 변형되었다.
날개는 흔적만 남았다. 날렵하던 몸이 뚱뚱해졌다. 거의 사각형으로 두툼해진 뒤, 다리에도 살이 붙었다. 마치 도롱뇽처럼 짧고 굵게 변한 것이다.
무장이라고는 광선포 몇 문과 미사일 발사대 몇 개, 그리고 수십 개의 기관총이 전부.
대신 수송 능력은 엄청 났다. 지구의 크루즈 여객선의 구조를 기억해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실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물론 크루즈 여객선처럼 안락한 생활은 불가능하지만, 용이를 타고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었다.
수한은 가슴 부위에 변이체의 심장을 밀어 넣었다.
심장이 으깨지며, 강렬한 힘이 방출되었다. 그 힘이 축 늘어져 있던 기계용을 일깨웠다.
기계용의 두 눈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기이잉.
벌이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기계용이 몸을 일으켰다.
수한은 머리 안에 마련된 좌석에 편히 몸을 묻었다.
[좋아, 가자.]
기계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력핵이 아니라 변이체 심장으로 움직이는 탓에 느린 편이었다. 움직임도 매끄럽지 않았다. 그래도 덩치가 덩치인 까닭에 브종 시 폐허까지는 금방이었다.
슬슬 날이 밝았다.
덕분에 기계용은 멀리서도 관측할 수가 있었다. 높은 곳에서 사방을 감시하던 피난민들이 기계용을 보고 종을 마구 쳤다. 기계 괴수의 일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폐허에서 야영을 하던 피난민들이 놀라 난리를 피웠다.
수한이 모습을 드러낸 다음에야 소요가 그쳤다.
“$^^@$^#$!”
“#$#$#$#&&&*&!”
피난민들이 기계용의 머리 위에 선 수한을 보고 뭐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아르텔라가 경외어린 눈으로 수한을 올려다보았다.
[용신의 사자님! 용신의 사자님이 맞죠? 그렇지 않고서는 이 거대한 용을 부릴 수가 없어요!]
[그런 거 아닙니다.]
수한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신앙을 이용하면 통솔하는 게 더 쉬워지겠지만, 나중에 들통 날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피난민들에게 아침을 지어먹게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엇박자가 좀 있었는데, 기계용을 타고 와서인지 수한의 말을 잘 따랐다. 하라는 대로 아침을 먹고 수한의 앞에 도열하여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오늘부터는 이걸 타고 이동하겠습니다.]
수한은 기계용을 가리켰다.
피난민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겉보기에는 커다란 용을 닮았는데, 어떻게 타고 가나 싶었던 것이다.
수한은 기계용의 하부를 열게 했다.
그러자 비행기 화물칸처럼 커다란 경사대가 내려왔다. 피난민 열 명 정도는 나란히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경사대였다.
아르텔라가 피난민들을 재촉했다.
피난민들이 우물쭈물 거리다가 하나둘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모두 수용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수한이 따라 들어가서 격벽 구조의 객실에 자리를 정해준 다음에야 출발할 준비가 끝났다.
[용아, 출발하자.]
목적지는 느주브 반도.
기계용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조절한 까닭에, 몸통이 그리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하루 몇 시간 정도는 탈 수 있을 듯했다.
피난민들이 혼란스러워하자, 아예 창문을 개방해 주었다. 여객선의 갑판처럼 등 위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개중 용감한 이들이 등 위로 나왔다. 철제 난간에 기대어 주위를 둘러보더니 신기한 표정을 짓는다.
이 정도면 됐다.
수한은 머리 쪽의 조종석으로 돌아갔다. 용이에게 성좌를 걸어주자 기계용의 움직임이 확연히 더 좋아졌다.
기계용으로 이동하니 참 편했다.
변이체들이 아예 접근하지를 않았다. 식사를 할 때도 내부의 동력원을 응용한 조리 기구를 쓰면 그만이었다. 수한의 입장에선 그냥 그런 수준이지만, 피난민들에겐 신세계와 같은 여행이 이어졌다.
수한은 주기적으로 변이체 심장을 용이 가슴 안에 넣었다. 그러면 출력이 떨어지다가도 확 불이 붙었다.
딱 하나만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쿨럭!”
수한이 잔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콧물도 나왔다. 기껏해야 맑은 콧물이지만,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지금까지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았던 수한이다. 질라 행성에서의 체류가 길어지고, 외계 음식을 섭취한 까닭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나마 더 진행되지는 않았다.
수한이 워낙 강건한데다 숲의 생명 망토를 두르고 있다는 이유가 컸다. 지금 이 정도이니, 바티오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쉬지 않고 이동한 끝에, 느주브 반도의 초입에 있는 밀루에 도착했다.
강 건너편에 보이는 도시.
수한은 멀리서 밀루를 확인한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밀루는 온전했다.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 신시가지도, 성을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도 잘 보전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전투 흔적이 보였다.
기계 괴수 잔해 일부가 쌓여 있기도 하고, 오크들이 부리던 코뿔소와 타이탄 공격대의 ATV도 버려져 있었다.
기계용의 속도를 늦췄다.
천천히 밀루를 향해 가는데, 밀루의 성에서 색색의 빛이 솟구쳤다.
세라프들이었다.
무려 다섯 명.
그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급격히 꺾어지며 기계용에게 날아왔다.
수한은 세라프들에게 정신 감응을 시도했다.
[안녕하십니까? 지구 출신 이능력자, 이수한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총알처럼 날아오던 세라프들이 멈칫했다.
넷은 널찍하니 퍼져 기계용을 포위하고, 한 명만 기계용의 앞으로 다가왔다. 황금빛 날개가 인상적이고, 금빛 갑옷에 황금 왕관을 쓴 세라프였다.
황금 세라프가 기계용의 기계용의 머리 앞에 멈췄다. 세라프 특유의 투명한 눈을 들어 기계용을 들여다보았다.
덕분에 수한과 눈이 마주쳤다.
태양을 닮은 눈동자였다. 황금색 불길이 이글대고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머리를 숙일 뻔 했지만, 수한은 당당하게 세라프를 마주 보았다.
세라프의 몸이 투명해졌다. 유령처럼 벽을 통과해서 수한이 앉아 있는 머리 안으로 들어왔다.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수한에게 말을 건다.
[기계 괴수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학술원에서 개발한 기계용이네요.]
[예. 가브낙 행성에서 이시테님에게 선물로 받았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 소식은 저도 들었으니까요. 크로시아에 오신 적이 있지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거기 있었거든요. 고마워요. 덕분에 고립되었다가 풀려날 수 있었어요.]
[아!]
크로시아에서 봤던 황금색 보호막.
그걸 유지시켰던 게 이 세라프인 모양이다.
이름이 쥘베르라고 했었지.
[그럼 쥘베르님 맞습니까?]
[맞아요. 그런데 피르니아와 헤이시는 어떻게 된 건가요? 기계 괴수를 유인했다고 들었는데요.]
[아……]
불행한 소식을 전하려니 일순 말이 안 나왔다.
잠깐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두 분 다 기계 괴수에게 돌아가셨습니다.]
[둘 다요? 맙소사,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둘 다 실력이 상당해서, 여간해서는 자기 몸을 뺄 수 있을 텐데요.]
길게 설명할 것 없이, 군체 의식으로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었다.
쥘베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형 기계 괴수가 창을 던지는 장면을 보자, 앙다문 입술 사이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자네요.]
[그자요?]
[얼마 전에 기계 괴수들을 끌고 이곳을 공격 했어요. 지원이 다섯이나 왔었는데, 한 명이 죽었지요. 간신히 잡아 죽이기는 했는데, 시체에서 징벌 계열 8익(翼)급 무기를 확인했어요.]
[징벌 계열 8익급이요?]
[아, 그런 게 있어요.]
수한은 처음 듣는 단어.
쥘베르는 말해 줄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2익급이나 4익급을 가진 자가 타고 있었어도 둘이 당해내기 힘들었을 텐데 8익급의 주인과 마주쳤으니…… 하아, 절 구하기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네요.]
한동안 울적해하던 쥘베르가 감정을 추슬렀다.
밀루로 들어오라고 했다. 일단 피난민들부터 거두자는 얘기였다.
기계용을 움직여 밀루로 다가갔다.
성벽 앞쪽에 정지시킨 뒤, 피난민들을 하차시켰다. 기계용의 배 아래에서 경사대가 내려오고, 피난민들이 줄줄이 내리자 밀루의 병사들도 경계를 풀었다.
쥘베르가 신기한 듯 기계용를 매만졌다.
[이 녀석 신통하네요. 학술원에서 개발하고 있다는 소릴 들었을 땐 괜한 짓을 한다 싶었는데, 지금 보니 다방면으로 써먹을 수 있겠어요.]
[저도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변이체 심장으로 대체해서 기동시켰나 보죠? 다음부턴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구동부가 거의 다 망가졌네요. 재활용도 안 되겠어요.]
[그때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난민들을 옮기는 게 급선무여서요.]
[그건 저도 이해해요. 그나저나, 이능력자가 한 명 끼어 있네요?]
쥘베르의 눈이 아르텔라를 향했다.
다른 피난민들은 모두 밀루 시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르텔라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수한만 쳐다보고 있었다. 덩달아 그녀를 호위하는 장정들이 주변에 도열했다.
수한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다가 만났는데, 자연 각성자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데리고 왔지요.]
[잘 하셨습니다. 소환 계열과 외능 계열을 각성한 상태네요. 소환 계열은 B급에, 외능 계열은 D급인데 힘의 결정을 흡수시키면 소환 계열 A급 이능을 각성할지도 모르겠어요.]
[그 정도입니까? 놀랍네요. 질라 행성인들이 이능 각성에 재능이 있나 봅니다.]
[그렇지는 않아요. 이분이 특별한 거지요. 용신이라…… 이 행성에 신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한 번 조사를 해봐야겠어요.]
수한도 쥘베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텔라도 둘을 따라갔는데, 쥘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정들이 가까이 붙자 그것만 제지하고 멀리서 따라오라고 했다.
“콜록!”
수한이 가볍게 기침을 했다.
그러자 쥘베르가 짧게 주문을 외웠다. 황금색 빛이 수한을 감싸며 기침과 콧물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과연 세라프 종족.
수한이 사의를 표하자, 쥘베르가 주의를 주었다.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에요. 나중에 치료를 제대로 받긴 받아야 해요. 대신 더 진행되진 않을 테니까, 당분간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것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함께 걸으며 그 동안의 사정에 대해 들었다.
기계 괴수들이 수한과 두 세라프를 쫓아간 뒤, 다른 공격대원들은 모두 브종 시로 왔다고 한다. ATV를 타고 온 거여서, 며칠 정도 걸렸다던가.
그런데 기다려도 수한과 두 세라프가 오지를 않는다.
수색을 나갈 수도 없었다. 기계 괴수들이 덮쳤기 때문이다. 거의 10마리에 달하는 수에, 창을 든 대형 기계 괴수까지 있어 계속해서 밀렸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브종 시를 포기했다. 쥘베르가 시간을 버는 사이 세 요새 도시로 피난민들을 보냈다.
마침 바티오를 통해 세라프 종족의 지원이 오지 않았다면 다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투가 끝난 뒤 다른 문제가 생겼다.
피난민들.
느주브 반도의 뒬르 종족은 크롱 제국의 기미크 종족과는 앙숙이었다. 원수에게 먹일 식량은 없다고 세 요새 도시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쫓아내려고 죽이려고 들었는데, 그걸 중재한 게 리웨르였다.
지금은 쇠락했지만, 명망 높은 공작 가문의 후예.
이번에 크롱 제국을 원정대와 다녀오면서 느낀 게 컸다. 그래서 세 요새 도시의 시민들을 설득했다.
지금까지는 반목의 시대였지만,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싸워야 할 대상은 우주 밖에 있고, 그들과 싸우기 위해선 행성인 전부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설득에 세 도시가 피난민들을 통과시켰다. 도시 안으로 들이지는 않았지만, 근처에 머무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수한은 발걸음을 멈췄다.
[다들 여기 있다고요?]
[예. 기계 괴수의 시체를 넘기는 대가로 피난민들의 보호를 부탁했습니다. 절반은 지구로 돌아간 것 같은데, 절반은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수한이 걷는 게 빨라졌다.
뛰다시피 걷다가, 아예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