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에서 >
백호 공격대였다.
한때는 타이탄 공격대와 더불어 대한민국 공격대 1위 자리를 다퉜던 이들.
지금은 2위에 고정되었다.
가브낙 행성 원정 성공으로, 타이탄 공격대가 확연히 앞서 나갔기 때문이다.
수한은 병원 입구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백호 공격대가 수속을 밟는 것을 구경했다.
그나마 부상자들은 적어 보였다.
있어봤자 경상자 정도.
중상을 입은 사람은 다 죽은 것인지, 아니면 목숨을 구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수한은 적당히 의자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떴다.
그로부터 며칠 후, 병원 내의 초록빛 정원에서 그들 중 한 명과 조우했다.
“안녕하세요?”
수한은 환자복을 입은 한 여성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몇 번인가 얼굴을 마주했던 사람.
30대 초반. 보석 안경을 썼다. 짧게 친 머리가 무척 단정해 보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피부가 하얘서 어딜 가도 미인 소리를 들을 듯했다.
“안녕하세요.”
그 여성이 수한의 인사를 받았다.
“안경미 사장님이시죠? 오랜만에 뵙습니다.”
“호호, 오랜만이에요.”
S급 구현 계열 이능력자이자 백호 공격대의 사장이었다.
경미가 턱으로 수한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아도 되죠?”
“물론이지요. 영광입니다.”
경미의 수한의 옆에 앉았다.
수한은 경미를 힐끔거렸다.
어디서 부상을 입었나 보다. 왼쪽 어깨에 붕대를 감고, 팔걸이로 고정시켜 놓고 있었다.
“다치셨나 봅니다.”
“네, 그렇게 됐어요.”
사냥에 실패한 것 치고는 얼굴이 밝다.
피해는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냥에 참가한 인원들이 거의 죽어버렸다면 저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겠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피해는 없었나 보죠?”
“예. 천만다행이었죠. 근처에 있던 세라프들이 제때 구원을 와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원정대가 전멸했을 거예요.”
경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듣고 있는 수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경미가 느끼는 감정이 언뜻 전해졌기 때문이다.
수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기계 괴수 사냥은 쉽지 않네요.”
경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충분히 잡을 수 있었어요. 쥬페르 행성으로 원정을 간 거였는데, 현지의 신들을 섭외했거든요. 막대한 돈을 들였는데…… 사냥 당일에 그 신들이 기계 괴수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서로 싸우는 바람에 다 망해버렸죠.”
쥬페르 행성?
타이탄 공격대의 이사 중 한 명인 페롱 이사의 출신 행성이다.
신들이 지상을 거니는 곳이라고 했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듣고 보니 별 거 아니었다.
백호 공격대는 두 신에게 함께 기계 괴수를 사냥하자고 제의했다. 둘 다 늑대신이었다. 둘이 형제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막상 준비 단계에서 만난 두 신이 치고 박기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백호 공격대는 기계 괴수 공략에 실패했다.
경미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된 거예요. 두 신에 대해 더 자세히 정보를 모았어야 했는데, 형제신이라는 것만 듣고 조급하게 결정한 제 책임이 커요.”
“별 일이 다 있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참, 수한씨가 지금 AA급인가요?”
“예, 맞습니다.”
“지금까지 성장 속도 보면 곧 S급이 될 것 같은데, 그 뒤에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계속 타이탄에 남아계실 건가요?”
“글쎄요.”
수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독립하여 스스로의 공격대를 만드는 것으로 진작 가닥을 잡았지만, 굳이 떠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경미가 빙긋 웃었다.
“무례한 질문을 했네요. 죄송해요. 대신 한 가지 정보를 알려드릴 게요.”
“뭡니까?”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S급 힘의 결정 개수요.”
그게 정보가 되나?
기계 괴수와 S급 변이체의 출현이 빈번해진 까닭에, 상당히 많은 S급 힘의 결정이 풀렸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수요를 감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수한의 생각을 알아챈 경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아요. 우리나라에 AA급 이능력자가 몇 명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한 50명 정도 되지 않을까요?”
“옛날 얘기에요. 지금은 거의 100명 정도 되요.”
“그렇게 많아졌습니까?”
“힘의 결정이 원활히 공급되고 있으니까요. 최근 원정으로 대박을 터뜨린 이능력자도 많고요.”
“하긴 저도 요즘 좀 벌었으니까요.”
“그럼 S급 힘의 결정은 얼마나 될 것 같으세요?”
“타이탄에서 사냥한 기계 괴수만 10마리가 훨씬 넘으니까, 최소한 20개는 되지 않을까요?”
“아뇨. 딱 9개에요.”
“예?”
수한은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10마리의 기계 괴수를 잡아 S급 힘의 결정을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게 온전히 남아 있다면 모를까, 누군가 이미 흡수했다면 어떻게 되겠나.
멀리 갈 것도 없었다.
타이탄의 한민종 사장이 그랬고, 알바트로스의 갈태수 사장과 배현애 이사가 그랬다. 둘 다 기계 괴수를 잡고 얻은 힘의 결정으로 승급에 성공한 것이다.
경미가 말을 이었다.
“수한씨는 변조 계열 이능력자죠?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에 있는 힘의 결정 중 변조 계열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게 정말입니까?”
“네. 변조 계열 S급 힘의 결정을 얻고 싶으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셔야 할 거예요.”
“거기 가봤자 자기네 이능력자 챙겨주려고 할 텐데요?”
“그렇죠. S급 힘의 결정에 목마른 AA급 이능력자가 노예 계약 맺기에는 가장 좋은 상태니까.”
경미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수한은 자기 아래턱을 긁었다.
하긴 좀 이상하긴 했다.
변조 계열 S급 힘의 결정이 있으면 타이탄 공격대에서 진작 연락이 왔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투시나 정신 등 다른 계열 힘의 결정이라도 받아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속성 부여는 수한의 능력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다른 능력들만 강화시켜 봐야 보조적인 역할밖에 안 되었다.
어떻게 변조 계열 힘의 결정을 구할 방법이 없을까?
문득 쥘베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힘의 결정을 구하기 힘들면 자신을 찾으라고 했었지.
한 번 비벼봐야겠다.
그냥 예의 상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경미와 한담을 나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오후 5시.
곧 담당 교수의 회진 시간이었다.
“많이 좋아지셨네요.”
“그렇습니까?”
“예. 기생충이 꽤 줄어들었습니다.”
회진을 온 담당 교수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태블릿 PC를 보여주는데, 처음에 봤던 사진과 비교하면 확실히 하얀 부분이 줄어들었다.
수한은 기대 어린 얼굴을 했다.
“그럼 곧 퇴원할 수 있을까요?”
“허허. 잘 하면 가능하겠습니다. 일단은 상황을 봅시다. 지금 속도면 1주일 뒤에는 가능할 것 같은데,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빨리 퇴원했으면 좋겠네요.”
그나마 시계 바늘을 회복에 맞춰 놓아서 이 정도였다. 안 그랬으면 꼼짝 없이 2달은 입원했어야 했다.
시계가 발휘할 수 있는 강화 효과는 총 12가지.
빛나는 무구, 저항력 상승, 집중력 향상, 피부 방어, 행운, 근력 강화, 체력 재생, 지능 향상, 염력 강화, 섬광 강타, 회복, 순발력 상승.
수한은 손을 꼽아가며 1주일이 얼른 지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퇴원하기 며칠 전, 한 남자가 수한을 찾아왔다.
타이탄 공격대 인사부장.
AA급으로 승급하고 협상을 한 뒤로는 처음 보는 거였다.
“오랜만입니다.”
“예. 잘 계셨지요?”
“저야 뭐 놀고 먹는 처지인 걸요. 앉으세요.”
수한은 소파를 권했다.
인사부장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처음에 만났을 때와는 태도가 좀 달랐다. 하긴 그때는 B급이었고, 지금은 AA급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다른 공격대에 가면 이사 대우고, 타이탄에서도 부장에 준하는 대우를 하니까.
수한은 냉장고에서 음료수 하나를 꺼내 건넸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바쁘시다고 들었는데요.”
“하하, 돌아다니는 게 제 일인 걸요. 사내의 문제는 과장들이 잘 해결하고 있으니, 전 사옥 밖에서 일해야지요.”
“고생하십니다.”
잠깐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본론이 나왔다.
“차장님이 S급 힘의 결정을 받기로 했었지요?”
“맞습니다.”
“혹시 들으셨을지 모르겠는데, 우리 공격대에서 추출한 힘의 결정 중에 변조 계열은 없었습니다. 차장님이 쓸 만 한 것은 투시, 신속, 정신, 의지 계열 정도였어요.”
“운이 나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인사부장은 4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수한은 고민 끝에 투시 계열을 골랐다.
정신 계열도 좋지만, 지금도 크게 불편을 느끼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투시 계열을 선택한 것이다.
인사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사옥에 오셔서 수령해 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S급 이능력자 표준 계약서를 놓고 갈 테니까 한 번 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인사부장이 깔끔하게 인쇄된 계약서를 수한에게 건넸다.
잘 검토해보라고 한 후 수한의 병실을 나섰다.
수한은 침대에 누워 계약서를 읽어보았다.
연봉 100억에 배당은 1200몫.
어디까지나 S급 이능력자가 됐을 때의 얘기였다. 수한에게는 용이도 있으니, 실제로는 더 높은 대우를 받아야겠지.
그 날 저녁, 수한은 쥘베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구에서 S급 힘의 결정을 구하지 못할 것 같다고 밝히고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변조 계열만이 아닌, 구현 계열도 구할 수 있으면 구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답장은 금방 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은하수를 형상화한 작은 장신구.
이능 장비는 아니다.
헤븐 행성 및, 헤븐 행성에 위치한 차원 경매장 출입증이었다. 원래는 헤븐 행성에 가는 것도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야 하는데, 이게 있으면 그 절차를 생략할 수 있었다.
새미가 그걸 보고 감탄했다.
“이거 차원 경매장 출입증 맞지? 사진으로는 몇 번 봤는데, 실제로는 처음 봐!”
“쥘베르님이 이걸 주실 줄은 몰랐어. 힘의 결정 판매상과 연결해주기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헤븐 행성 차원 경매장에는 종족 연합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건이 모이니까 S급 힘의 결정도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돈은 어떻게 가져가? 원화를 받지는 않을 거 아냐.”
“지구에서 힘의 결정을 사서 가야지. 그걸 환전하면 돼.”
“아, 그럼 되겠다.”
힘의 결정은 차원 무역에서도 현금처럼 쓰이곤 했다. 수한과 새미가 받은 배당이 막대하니, 그에 해당하는 힘의 결정을 사가면 될 것이다.
휴가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 기간 동안 헤븐 행성을 다녀오면 괜찮을 듯했다.
한 가지 더 있었다.
수한은 마엘른을 돌아보았다.
[마엘른님.]
[예, 하실 말씀이라도?]
[저는 곧 퇴원합니다. 제가 퇴원한 다음 같이 노르헤임 행성으로 가시지요.]
[노르헤임 행성이라면 드워프들이 있는 곳 말씀입니까?]
[예. 그곳에서 마엘른님의 검을 구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긴 여행이 될 겁니다. 노르헤임 행성을 들른 다음에는 헤븐 행성을 다녀올 거니까요.]
[나도 가야겠지?]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 자기가 쓸 힘의 결정도 구입하지.]
여기 있는 넷은 모두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목적지는 노르헤임 행성과 헤븐 행성, 두 개.
차원 경매장에서 검을 구입하는 방법도 있지만, 예전에 쌓은 인맥도 있으니 거기에 기대어 볼 생각이었다.
수한은 차곡차곡 가장 먼저 처리한 것은 타이탄 문제였다.
현재는 특별 휴가 기간.
외계 행성에 다녀오겠다고 통보하자, 그것을 결재한 경영 담당 이사가 신신당부를 했다.
“기간 내에 정확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원정에 참가하실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차원을 넘으려면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예방 접종은 그 중의 하나일 뿐.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그 서류를 쌓으면 책상 위에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마엘른나 아르텔라는 물론, 새미도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어쩌겠나. 수한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지.
여러 준비물도 챙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통 수단. 4인승 ATV를 한 대 샀다. ATV를 충전할 발전기도 사고, 각종 식량과 옷, 비상용 물품을 구비했다.
지원 요원으로 공격대 경력을 시작한 참이라 쉬울 줄 알았는데, 이거 보기보다 쉽지가 않다.
하긴 수십 명이 하던 걸 혼자 하는 거니까. 아무리 규모가 단출해도 챙길 건 다 챙겨야 했던 것이다.
퇴원한 다음날, 바로 세라프의 전당으로 향했다.
관리인이 넷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예약된 시간에 차원문을 넘었다.
노르헤임 행성.
쓰나미텐구가 출현하기 전, 차원의 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다녀온 뒤 약 1년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