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바돈 -1- >
넷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하크라였다.
한 차례 도움을 준 드워프들이 있는데, 굳이 다른 곳을 찾아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하크라 근처에 이름난 장인 가문이 있지 않나.
토프레 가문.
수한의 마법 소총과 반자동 권총을 만든 곳이었다.
바리스와 안면도 있으니 찾아가더라도 박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토프레 가문과이 있는 곳은 티오르 도시.
하크라 인근의 도시 중 최고의 광산 도시였다. 예전에 수한이 어둠 지네를 사냥했던 노비크 산맥 인근인데, 기차를 타고 3시간만 가면 된다고 했다.
새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토프레 가문은 총으로 유명하지 않아? 검도 잘 만들어?”
“잘 안 만들지. 그 옆에 막시무스 가문으로 가려고 해. 막시무스 가문은 종족 연합에서도 검 제작으로는 최고봉에 서 있거든.”
“그래?”
바로 기차를 탔다.
ATV까지 가져가느라 화물칸을 이용해야 했다. 지구보다 기술이 떨어지는지 쉬지 않고 덜컹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아르텔라가 멀미를 해서 얼굴이 핼쑥해졌다.
도착하는 대로 토프레 가문에 방문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바리스가 반색하며 뛰쳐나왔다.
수한은 바리스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잘 계셨지요?]
[하하, 잘 있었다마다! 자네도 신수가 훤해졌는 걸?]
어둠 지네를 잡을 때 드워프 군대를 지휘했던 S급 이능력자였다.
바리스가 수한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래, 여긴 어쩐 일인가? 이 근처는 변이체 씨를 말려놓아서, 자네가 사냥할 만한 것도 없는데?]
[아, 사냥하러 온 게 아닙니다. 검을 하나 사러 왔습니다.]
[검을?]
[예.]
수한은 마엘른과 얽힌 일에 대해 설명했다.
바리스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하, 그런 일이 있었나? 나약한 엘프 답지 않은 친구로군! 알겠네. 내가 도움을 주지. 검을 사러 왔다면 막시무스 가문으로 가야 되겠지? 우리 가문도 검을 안 만드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막시무스 가문과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 자, 가세!]
바리스가 손짓을 했다.
역시 토프레 가문에 먼저 오길 잘 했다. 막시무스 가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바리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일행을 통과시켰다.
[이봐! 내가 누굴 데려왔는지 나와 봐!]
바리스가 호기롭게 소리를 질렀다.
일하던 드워프들이 뭔가 싶어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 중 하나가 수한을 알아보았다.
[작년에 어둠 지네 잡았던 지구인이잖아!]
[뭐? 누구라고?]
[그 왜, 광명 속성 쓰는 지구인이 있어서 어둠 지네를 잡았다고 했잖아? 그 지구인이야! 개선식 할 때 본 적이 있어.]
[어 그래? 귀한 손님이 왔네?]
수한이 드워프들 사이에선 제법 알려진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노비크 산맥에는 광산이 많았다. 티오르가 그 광산들 때문에 생긴 도시였다. 질 좋은 광석이 공급되어야 티오르에 위치한 장인들이 작품을 만들 텐데, 차원의 틈 때문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걸 해결한 게 드워프 군대와 알바트로스 원정대. 그 중에서도 바리스와 수한의 역할이 컸다.
자연히 막시무스 가문 드워프들이 수한을 환대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맥주 파티가 열렸다. 간만의 손님이라며 온갖 요리를 다 대접하면서, 맥주를 아예 통으로 내오는 것이다.
일행을 맞이한 드워프, 굴탕이 호기롭게 잔을 권했다.
[자, 한 잔 쭉 들이키시게. 오랜만에 손님이 왔는데, 맥주 한 잔 주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지!]
아침 일찍부터 술이라니.
군말 않고 받아 마셨다. 술에 대한 드워프들의 집착은 저번에도 잘 겪어 보았으니까.
술판을 벌이면서 마엘른의 검에 대한 얘기를 했다.
굴탕과 다른 드워프들이 머리를 힘껏 끄덕였다.
[그럼, 그럼! 검 제작으로 따지면 우리가 최고지! 헤븐에서 만드는 세라프의 검이나 미드가르드의 호수검, 비프로스트의 무지개검 정도가 아니면 상대가 안 될 걸?]
[마침 잘 왔네. 얼마 전 노비크 산맥에 운석이 하나 떨어졌거든. 그걸 가공해서 괜찮은 검을 몇 개 만들었는데, 그것들 중에 선택하면 될 거야.]
[엘프가 쓸 거라고? 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군. 우리는 실력이 없는 자에겐 물건을 만들어 주지 않아. 뭐, 양산품을 쓰겠다면 묻지 않겠지만.]
[기왕이면 최고급품으로 부탁합니다. 그리고 마엘른님은 AA급 이능력자에 준하는 무력을 갖고 계십니다.]
[AA급? 대단한데?]
[그 정도면 우리 검을 쓸 자격이 되지!]
[말 나온 김에, 바로 보여주세.]
[운석에서 추출한 별철로 만든 검들이니까, 엘프와 잘 어울릴 거야!]
별철이라……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운석으로 만든 검을 염두에 두고 있나 보다. 재료가 좋으니 검도 좋을 텐데, 가격을 얼마나 셈해줘야 될지 모르겠다.
굴탕을 따라 저택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바리스가 수한 옆에서 걸으며 속 편한 소리를 했다.
[자네도 총 하나 만들지?]
수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 지금 소총에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자네 소총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봤자 양산품이야. 좋은 무기는 목숨과도 같은 법이라고.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전 차원계 최고의 장인이 오로지 수작업으로만 만든 소총 하나쯤은 사 가야지. 안 그래?]
[끙!]
수한은 앓는 소리를 냈다.
솔직히 그러고 싶었다.
문제는 돈.
이성을 잃고 좋은 총을 샀다가 힘의 결정을 살 돈이 부족해지면 큰일 아닌가.
저택 안쪽은 마치 동굴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얼마 간 걷자 정교한 기계 장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구의 공장을 보는 것 같았다.
자동화된 벨트들이 질서정연하게 돌아다녔다. 그러면 기계 장치가 물건을 찍고 깎아냈다. 그것들이 맞춰지며 한 자루의 도끼창이 완성되었다.
일행이 신기한 눈으로 공장을 둘러보자, 굴탕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동화시키니 양산품의 품질은 올라가는데, 제대로 된 명품은 나오지가 않더군. 진짜는 아래층에 있소.]
느릿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 내려갔다.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가운데에는 용광로가 하나 있었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데, 특이하게도 커다란 용광로 안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수은을 보는 것처럼 광택이 흘렀다.
저게 운석에서 추출한 별철인가 보다.
깡! 깡! 깡
그 주변에서 드워프들이 별철을 모루 위에 대고 두드리고 있었다.
만드는 것은 각양각색.
검을 만드는 드워프, 갑옷을 만드는 드워프, 긴 창을 만드는 드워프 등 아주 다양했다.
드워프들은 새로 나타난 사람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자기들 작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별철만 다루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큰 용광로 말고도 작은 용광로가 몇 개 더 존재했다. 용광로마다 각각 다른 종류의 금속이 액체 상태로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이쪽으로 오게.]
굴탕이 일행을 더 안쪽으로 데려갔다.
용광로를 한참이나 지나, 제법 넓은 공간이 나왔다.
방음이 잘 되어 있어 쇠 두드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복잡한 마법진이 바닥은 물론이고 천장에도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군데군데 보석 박은 기둥이 서 있는데, 거기서 힘의 파장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좀 달랐다.
대장장이가 아닌, 펑퍼짐한 옷을 입은 드워프들이 돌아다녔다. 제단 위에 별빛 단검을 올려놓고 주문을 외우는데, 각자의 손에서 흰 빛과 검은 어둠이 맺혀 있었다.
팡!
별안간 폭음이 터졌다.
공간 전체가 반응하여 폭발을 억제했다. 덕분에 대형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검은 연기가 매캐하게 뿜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드워프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email protected]#$%@!”
“$%#^@!”
굴탕이 혀를 찼다.
[또 실패했구먼.]
[뭘 하는 겁니까?]
[별철을 얻은 김에 새로운 검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중이라네. 그냥 검만 만들어도 훌륭한 검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능 장비로 인정을 받기 힘들지. 마법을 부여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은 모양이야.]
드워프들은 마법을 직접 사용하는 것은 좀 서툴렀다. 반면 자기들이 만든 물건에 마법을 부여하는 것은 능숙했다. 당장 수한의 소총과 권총에도 마법이 걸려있지 않나.
수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마법을 부여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빛과 어둠 속성을 동시에 부여하려고 그런다네.]
[서로 상극 아닙니까?]
[그렇지.]
[그걸 검 하나에 부여하시겠다고요?]
수한은 뜨악한 눈으로 굴탕을 쳐다보았다.
이능 장비 제작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상반되는 속성의 마법을 부여하는 게 지극히 힘들다는 것은 안다. 굳이 그렇게까지 고생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 얘기를 하자, 굴탕이 이상한 눈빛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별철을 얻었으니 당연히 최고의 무기를 만들어야지! 최소한 지금 만드는 것들보다는 더 나아야 할 거 아닌가? 세라프 종족의 세계검과 비슷한 수준의 검을 만드는 게 우리 목표라네.]
[세계검이요? 굉장하네요.]
수한은 혀를 내둘렀다.
세계검은 세상의 모든 힘을 담고 있다는 막강한 무기였다. 정확한 등급은 밝혀진 적이 없는데, SSS급은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드워프는 자존심이 높은 종족이니, 세계검에 맞먹는 무기를 만들려고 도전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빛과 어둠은 너무 하지 않습니까? 빛과 열, 어둠과 냉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텐데요.]
[그런 건 진작 만들어 봤어. 태양검 이솔라테나 공허검 퓨느무아가 우리 가문에서 만든 검이라고.]
[그거 최고 평의회 위원 중에 한 명이 갖고 있는 검 아닙니까? 저도 들어본 것 같은데요.]
[맞아. 전 차원계 최고의 검객인 무리아님이 가지고 있지.]
수한도 이름만 들어본 인물이다.
검술로 따지면 세라프 중 최강자들도 한 수 접어준다던가?
굴탕이 마엘른을 손짓하여 불렀다.
실험적으로 빛과 어둠 속성을 부여하는 것들 말고, 완성 직전의 무기들이 한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순수하게 별철로 만든 무기도 있고, 합금인지 빛이 조금 흐린 무기도 보였다.
[엘프식 검은 이쪽에 있네. 미드가르드식도 있고, 실리사르식도 있지.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보게.]
마엘른이 검 중 얇실한 것들을 꺼냈다.
주로 물 속성이나 바람 속성이 부여된 검이었다. 드물게 하늘 속성이나 빛 속성이 부여된 검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검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 검 저 검 들어보더니 허공에 휙휙 휘둘러본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매서웠다. 그때마다 검에 부여된 속성이 창창한 광채를 뿜었다.
수십 번이나 검을 들고 휘두르는 것을 반복하더니, 언뜻 파란색으로 물든 검 하나를 골랐다.
[이게 좋겠습니다.]
[오, 보는 눈이 있군.]
굴탕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순수하게 별철로 만든 검 중 하나지. 하늘 속성이 걸려 있다네. 별철과 궁합이 잘 맞더라고. 그걸로 할 텐가?]
[그렇게 하리다.]
항상 무심하던 마엘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검이 어지간히 맘에 든 모양이다.
수한은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희귀한 별철로만 만든 것으로 모자라 강력한 마법이 붙었다. 이게 얼마나 할지 모르겠다.
드워프들의 반응을 봐선 최소한 S급 장비인 것 같은데.
굴탕이 근처의 드워프 하나를 불렀다.
[이봐! 이 엘프에게 검집 좀 그럴싸하게 만들어 줘. 손잡이도 제대로 맞춰주고.]
[아, 카일룸이 주인을 찾은 거야?]
[그래! 신경 좀 써주라고!]
마엘른은 카일룸을 들고 드워프를 따라갔다.
수한은 그 뒤를 지켜보다가 마엘른이 마법 부여실을 나간 다음에야 굴탕에게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좋은 검을 얻었네요.]
[우리야말로 고맙소. 우리들이 만드는 검은 여간해서는 주인을 찾기 쉽지가 않거든.]
굴탕이 흐뭇하게 웃었다.
수한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대금은 뭘로 치러야 할까요? 부족하나마 힘의 결정을 준비해 왔습니다만.]
[힘의 결정이 좋겠소. 희귀한 금속도 좋지만, 지구에는 그런 게 없을 테니까.]
[AA급과 A급으로 준비해 왔는데, 몇 개를 드려야 합니까?]
[카일룸은 감정해 보니 SS급으로 판명이 났다오. 함부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이니, 그대가 알아서 셈을 해주시오.]
수한은 기함을 했다.
SS급?
하긴 공장에서 찍어내도 AA급 물건을 만드는 드워프들이다. 세계검을 따라잡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검 중 하나이니, 등급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수한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배당으로 받은 7천억 전부를 힘의 결정으로 바꿔온 참이다. 문제는 이걸로 계산이 되겠냐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하다.
더구나 이걸 다 쓰고 나면 변조 계열 힘의 결정은 뭘로 살 것인가.
그냥 다른 걸 사자고 할까?
아깝다. 일단 사서 마엘른에게 쥐어주기만 하면 앞으로 크게 도움이 될 텐데……
어쩔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돈이 부족하니까.
다른 걸 고르겠다고 말을 하려는 찰나, 또 폭음이 터졌다.
펑!
시커먼 연기가 둘이 있는 쪽까지 흘러왔다.
“에취!”
매캐한 냄새에 새미가 기침을 했다.
그 소리를 듣자, 한 가지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마법 부여가 잘 안 되나 봅니다.]
[상극인 것을 한 무구에 담으려니 어려울 수밖에 없소. 그냥 부여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가 반발하면서 생기는 힘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니……]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