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건 >
세라프의 전당이 부숴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가장 큰 문제는 다른 행성으로 이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세라프 종족의 기술로는 세라프의 전당을 통해야 차원 이동이 가능하니까. 아니면 헤븐 행성이나 몇몇 중요한 행성에 있는 차원 도약 장치를 쓰던가.
모두 넋을 잃었다.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구덩이만 쳐다보았다.
수한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급했다.
얼른 페이니아에게 말을 걸었다.
[페이니아님! 헤븐 행성으로 돌아가세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급합니다! 상황을 보니 텔마 행성까지 제국의 손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아요! 텔마 행성에 세워진 세라프의 전당을 제국에서 확보했을 테니, 헤븐 행성을 직접 공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페이니아가 신음을 흘렸다.
수한의 추리가 일리가 있었다.
방금 전 제국인은 칼라트라와 잉트리그라는 명칭을 언급했다.
지금까지 세라프 종족에게 들은 내용을 종합하면, 둘은 제국 내의 다른 세력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았다. 수한은 지구에서 레벨 업 도우미를 획득했으니, 칼라트라가 종족 연합을 공격하는 제국의 세력이겠지.
그렇다면 잉트리그는?
칼라트라와 대립되는 어떤 세력일 것이다.
종족 연합을 칼라트라가 담당하고 있다고 보면, 잉트리그가 뭘 할 지는 뻔했다. 수확이라 언급한 시기가 오기 전 세라프 종족을 하나라도 더 잡으려고 할 터였다.
그렇다면 세라프의 전당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텔마 행성에 설치된 세라프의 전당을 통해 헤븐 행성으로 바로 갈 수가 있으니까.
전면적으로 공격을 해도 문제. 몇 차례에 걸쳐 인원을 들여보낸 다음 조금씩 납치를 해가도 문제.
수한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초월 의식을 통해 전달받은 페이니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맙소사……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다른 도시에도 세라프의 전당이 있을 거 아닙니까? 얼른 가세요! 시간이 없어요!]
지구에서 봤던 정보 중, 기요테 행성에는 세라프의 전당이 총 15개가 있었다.
그 중 가장 가까운 곳까지 거리는 약 3천 킬로미터. 페이니아의 비행 속도가 얼마나 나올지는 몰라도 몇 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터였다.
페이니아가 떨리는 손으로 허공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에서 보라색 빛이 점점이 흘러나왔다. 공중에 그 빛이 고정되어 하나의 마법진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마법진에 지팡이를 콕 찍자, 보라색 섬광이 일직선으로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섬광은 정확히 14개로 분열했다.
장거리 통신 이능인가 보다.
페이니아는 눈을 감고 제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쥐는데, 흡사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흩어졌던 보라색 섬광이 돌아왔다.
하나둘 페이니아의 지팡이에 스며드는데, 그때마다 페이니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윽고 열네 개의 빛 덩이가 모두 되돌아왔다.
페이니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어둡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수한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다른 세라프의 전당도 모두 파괴된 겁니까?]
[네. 제 종족들도 대부분 당한 것 같습니다.]
[이런……]
수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여태 원정을 다니며 위험했던 순간은 많았다. 조난당한 적도 있고, 감당하기 힘든 적을 마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때에도 세라프의 전당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일단 세라프의 전당이 있는 곳까지만 가면, 최악의 경우라도 몸은 빼는 게 가능했다.
헌데 행성 내 모든 세라프의 전당에 문제가 생겼다니?
하긴 수한의 생각대로 헤븐 행성을 공격할 거면 일단 기요테 행성을 고립시키는 게 첫 번째였다. 헤븐 행성에 연락이 가기라도 하면 만사휴의(萬事休矣)니까.
어떻게 한다?
수한은 일단 기계용을 아르프 시에 널린 공터에 착지시켰다. 피난민들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워낙 큰일이 벌어진 탓에 그들을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오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 전의 대화할 때 초월 의식을 통해 나눈 터였다. 덕분에 둘의 얘기를 모두들 들었다. 그런데 배경지식이 없다 보니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수한은 페이니아에게 허락을 구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여기 이 사람들에게는 알리겠습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페이니아는 될 대로 되라는 태도를 보였다.
수한은 동행한 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몇 명 되지 않았다. A급 이능력자 이상만 모였으니, 총 11명에 불과했다.
수한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몽땅 털어놓았다.
헤븐 행성에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 방금 알아낸 사실로 추측한 내용 등등.
석구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럼 우리는 결국, 양식장 안의 물고기 신세라는 겁니까?”
“제가 추측한 게 맞으면요. 참, 지금 나눈 얘기는 비밀이니까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기계 괴수들이 행동하는 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이유 때문일 줄이야……”
“자자,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부터 타개해야 합니다. 헤븐 행성이 공격당해서 약해지면, 결국 우리 지구도 타격을 입어요. 순망치한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얼른 대책을 생각해 봅시다.”
수한의 말이 맞았다.
마엘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소? 헤븐 행성으로 소식을 전해야 하고, 그러려면 세라프의 전당이 필요하오. 세라프의 전당을 재건해야겠소.”
수한이 생각하고 있던 내용과 같았다.
모두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빛을 받으며, 수한은 실의에 빠져 주저앉은 페이니아에게 다가갔다.
[페이니아님.]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자, 페이니아가 고개만 들어 수한을 쳐다보았다.
수한은 내심 혀를 찼다.
페이니아의 눈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심각하게 좌절한 모양.
수한은 부드럽게 말했다.
[페이니아님, 기운 내세요. 페이니아님이 이렇게 늘어져 있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늦게라도 헤븐 행성에 전갈을 보내야지요.]
[세라프의 전당이 무너졌는데, 무슨 수로요?]
[다시 지어야지요. 살아남은 세라프 종족 분들이 모이면 뭐든 수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다시 짓는다…… 지금 기요테 행성에 있는 세라프가 다 모여야 3명에 불과해요. 의원급도 없고 지원국 소속도 없으니 셋이 힘을 합쳐도 세라프의 전당을 하나 짓는데 1달이 넘게 걸려요. 그 시간이 지나면 이미 일이 다 끝나있을 텐데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들다 보면 뭔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서 더 빨리 완성시킬지도 모르고요.]
[끄응.]
페이니아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뭔가를 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얘기에 동감한 것이다.
아까처럼 보라색 빛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다른 세라프들이 아르프 시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페이니아는 그 시간 동안 외계 종족들을 불러놓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수한도 공격대를 추슬렀다. 본인은 아르프 시에 남아 있으면서, 용이는 요새로 보내서 전리품과 함께 지원 요원들을 데리고 오게 한 것이다.
몇 시간 후 다른 세라프들이 도착했다.
붉은 날개를 가진 알르아, 하얀 날개를 가진 닉시.
그들도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모든 세라프의 전당이 폭파된 것을 알고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의원급이 아니어서 그럴까. 지닌 무력에 비해서는 정신력이 좀 약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다독이며 세라프의 전당을 재건할 것을 주장했다.
다행히 둘 다 금방 정신을 차렸다. 페이니아까지 해서 셋이 머리를 맞대고 세라프의 전당을 재건할 궁리를 했다.
[뭘로 만들지요?]
[세라프의 전당을 재활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루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박살을 냈어.]
[그럼 한 가지밖에 없겠습니다.]
의논을 끝낸 세라프들이 타이탄 공격대를 찾아왔다.
용건은 간단했다.
새로운 세라프의 전당을 만드는데, 기계 괴수를 재료로 쓰겠다는 것이다.
다른 종족들도 기계 괴수를 사냥했지만, 그게 다 요새에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수한이 텔마 행성 군대를 추격하면서 타고 온 기계용뿐이었다.
수한은 흔쾌히 승낙했다.
[좋습니다.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얼마나 제공하면 됩니까?]
[대형 기계 괴수 1마리 분량이면 됩니다. 아, 동력핵도 있어야 하고요.]
[그냥 한 마리를 통째로 다 드리면 되겠네요.]
수한은 두 말 하지 않고 기계용을 내주었다.
이미 용이가 원정대와 함께 도착한 뒤였다. 수한이 도움을 주었다. 용이를 통해 기계용을 세라프들이 지정한 자리로 옮겨준 것이다.
새롭게 세라프의 전당을 세우는 곳은 아르프 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건물 하나 없이 허허벌판인 곳.
수한은 그곳에 기계용을 세우고 물러나왔다. 세라프들이 달려들어 기계용을 낱낱이 해체했다. 그리고 부품을 일일이 다듬으며 기본적인 바닥을 깔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수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무척 원시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세라프의 전당은 바닥과 벽, 기둥에 새겨진 마법진이 힘을 발휘하여 차원문을 연다. 따라서 진귀한 금속으로 바닥과 벽, 기둥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일일이 수작업을 하는 것이다.
적색 검이나 지팡이로 금속 장갑을 쪼개고, 그걸 녹여서 얇게 펴고, 그 위에 세심하게 마법진을 새겼다. 그나마 닉시가 손을 데면 금속이 꾸물거리며 변형되는데, 그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왜 1달이 넘게 걸린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수한이 나섰다.
[비켜보세요.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네?]
어리둥절해하는 세라프들을 젖히고, 용이를 투입했다.
기계용을 빠르게 변형시켰다.
수한은 기억 속 세라프의 전당을 떠올렸다.
하도 많이 들락날락한 곳이라 그런지, 눈을 감는 것만으로 그 구조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수한은 먼저 각종 무장을 덜어냈다. 한쪽에 잘 모아둔 뒤 동력핵과 구동부를 비롯한 주요 부품들을 기계용의 중앙으로 모았다. 그리고 금속 장갑을 몽땅 벗겨냈다.
금속 장갑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했다. 최대한 얇게 폈다. 그러면서 바닥으로 넓게 퍼뜨렸다. 기억에 남아 있는 그대로, 세라프의 전당과 동일한 넓이의 땅을 덮었다.
기계 괴수의 뼈대를 이용해 빙 둘러 건물의 뼈대를 세웠다. 남은 금속 장갑을 활용해 벽을 만들었다. 그 다음 기둥을 세우고 표면에 금속을 씌우자 수한이 기억하는 세라프의 전당이 대략적으로 재현되었다.
여기까지 걸린 게 고작 3시간.
불과 며칠 전 돌산에서 성을 만들었던 경험이 있으니 더 쉬웠다.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좀 더 시간이 걸렸을 테지.
[이제 뭘 하면 됩니까?]
[마법진을 새겨야 한다. 그건 우리가 직접 하마.]
[정신 계열 이능으로 어디에 뭘 새겨야 하는지 저한테 알려만 주세요. 용이의 변형 능력을 사용하면 금방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세라프들이 꺼려하는 기색을 보였다.
수한은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보안 문제 때문이었다.
세라프의 전당을 만드는 것은 세라프 종족이 독점하는 기술이었다. 경제적인 이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헤븐 행성을 방어할 수 있다는 게 더 컸다. 불순한 목적에서 헤븐 행성으로 오려는 시도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니아가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비상 상황입니다. 율법을 고집할 수는 없어요.]
알르아와 닉시도 찬성했다.
초월 의식을 타고 그들의 지식이 쏟아졌다.
엄청나게 방대한 양이었다. 세라프의 전당을 마법진으로 가득 채워야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수한은 하나하나 작업을 해나갔다.
처음에는 큰 마법진부터 시작했다. 금속 장갑을 변형시켜 마법진을 그린 뒤, 작은 마법진과 룬 문자도 새겼다.
그러면 세라프들이 달려들어 마법진을 활성화했다. 힘이 모여야 하는 곳에는 소지하고 있던 각종 보석을 박아 넣었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니 세라프의 전당 재건을 빠르게 할 수 있었다..
마법진을 만드는 게 정말 힘들었다. 특히 기둥에 미세하고 복잡한 마법진이 들어가야 해서 그걸 새기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계속 고생을 하다가 88점이 남아 있던 기술 점수 중 30점을 기계용 제작에 썼다. 그러자 마법진을 새기는 게 한결 편해졌다.
이렇게 하여 기본적인 공정은 끝이 났다.
차원문 생성기가 파괴되고 딱 하루만에 거둔 쾌거.
페이니아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제 됐습니다. 비록 내구도가 많이 모자라 하루에 몇 번 작동시킬 수 없겠지만,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할 겁니다.]
제대로 된 세라프의 전당으로 기능하려면 특수한 벽돌로 감싸 완전히 건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아쉬운 대로 써먹기에는 충분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헤븐 행성에 소식을 전하는 거니까.
더 미적거릴 필요가 있을까?
세라프들과 함께 차원문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