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라프의 지원 >
헤븐 행성의 날개 요새에 도착했다.
폭탄이 터졌던 게 바로 얼마 전이다.
겨우 2달이 지났을 뿐인데, 날개 요새는 감쪽같이 복구가 끝나 있었다.
수한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역시 세라프 종족의 기술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폭발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을 보면.
일단 심사 위원회부터 가봐야겠다.
심사 위원회는 날개 요새에서 좀 떨어진 백은 도시에 있었다. 그곳에 가려면 둥그런 접시처럼 생긴 비행체를 타야 한다.
수한은 근처의 작은 상점에서 비행 접시 운행표를 산 뒤, 자신의 위치와 목표 지점을 입력했다.
그러자 몇 시에 어디서 비행 접시를 타란 안내가 나왔다. 환승 경로까지 한 눈에 보여서,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약 1시간 뒤, 백은 도시에 도착했다.
비행 접시에서 정거장에 내리는 순간, 수한은 한 가지를 후회했다.
‘새미도 데리고 올 걸.’
도시가 무척 아름다웠던 것이다.
눈이 내린 듯 새하얗다.
코끼리 상아처럼 하얀 고층 건물들이 점점이 서 있다. 물방울처럼 투명한 구조물들이 허공을 떠다녔다. 하늘 저 편에는 소담한 무지개가 걸려 있고, 기기묘묘하게 생긴 새와 짐승들이 세라프들에게 먹이를 얻어먹고 있었다.
수한은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새미에게 사진이라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용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와본 것 같아. 좀 익숙해.]
[그래?]
헤븐 행성이 고향이니, 정신은 몰라도 몸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심사 위원회는 백은 도시의 중앙부, 지원국 안에 위치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탑이었다. 세라프들이 날개를 펴고 탑 안으로 날아들었다. 저층보다 고층에 더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지, 아랫부분보다는 중간 부분이, 중간 부분보다 윗부분이 더 뚱뚱했다.
수한이 접근하자 갑옷 입은 오우거 경비병들이 제지했다.
[인간인가? 이곳은 헤븐 행성의 지원국이다! 용건을 밝혀라!]
수한은 편지를 내밀었다.
호출장.
오우거들이 킁킁대며 편지를 읽었다.
보통 머리가 나쁜 종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 있는 오우거들은 그렇지도 않았다. 엘리트 중 엘리트야말로 세라프 종족이 경비병들로 뽑아가기 때문이다.
오우거들이 편지를 돌려주었다.
그 중 하나가 작은 목걸이를 내밀었다.
[이걸 차라. 통행증 역할을 하는 물건이다. 안에 들어가면 커다란 빛의 기둥이 보일 텐데, 그 위에 올라가면 된다. 빛의 기둥이 목걸이를 읽고 해당 부서로 보내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건투를 빈다. 쉽진 않을 거다.]
얼굴은 흉측하지만 호의적인 태도였다.
수한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용이도 수한을 따라 귀엽게 인사를 했다.
안은 한산했다.
그저 로비 역할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에서 하얗게 백열하는 빛의 기둥만 눈에 띄었다.
빛의 기둥에 올라섰다.
차원문을 통과할 때처럼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들고 주위를 살펴보자, 커다란 원형 복도와 거기 연결된 수많은 방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한은 방에 걸린 명패를 살폈다.
그 중 심사 위원회라고 적힌 곳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청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구형의 공간이었다. 세라프들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홀로그램을 띄워놓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용이가 신이 나서 날개를 펼쳤다.
[예쁜 종족들이 많이 있어!]
최근 들어 세라프 종족에겐 본능적인 호감을 갖는 용이다 보니, 그저 이 상황이 즐거웠나 보다.
입구 쪽에 앉아 있던 세라프가 수한을 보았다.
지친 얼굴로 처음에는 무심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눈이 커졌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홀로그램과 수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세라프가 부쩍 활기가 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은 이능국의 페이니아님이 청구한 사항입니다. 종족 인간, 출신 행성 지구, 등급 S급 이능력자, 성별 남성, 나이 27세, 이름 수한, 성 이에 대한 힘의 결정 추출 장치 구매 권리 허가 건입니다.]
[지구인 이수한이라고요? 원형 기계용의 주인을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오호!]
세라프들의 시선이 온통 수한에게 쏠렸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쏟아지자, 수한은 잠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구 형태 공간 가장 중앙에 있던 세라프가 손을 저었다.
[계속 하세요.]
[위원회에서는 그 동안 지구인 이수한의 출생부터 성장, 현재까지 모든 점을 조사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제국과의 연관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가족을 중시하는 성향으로 볼 때 변절할 가능성도 낮습니다.]
대놓고 뒷조사를 했다고 하지만, 수한은 그러려니 했다.
기요테 행성에서 겪은 일도 있으니까.
중심의 세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허가하는데 별 문제는 없겠네요. 날개 요새의 사령관이신 블루아님께 들은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세라프가 숙고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들어 수한을 보더니,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대에게 묻겠어요.]
[예, 말씀하십시오.]
[저희에게 추출 장치를 사면 뭘 하실 생각인가요?]
수한은 눈을 끔뻑거렸다.
질문의 의도가 뭔지 얼른 파악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저 사실대로 대답했다.
[제 공격대에서 쓰려고 합니다. 전에 질라 행성에서 헤븐 행성 제품을 써본 적이 있는데, 간편하고 성능이 좋아서 인상 깊었던 적이 있어서요. 좋은 추출 장치가 있어야 기계 괴수를 잡는 대로 전력화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페이니아님께서 원하는 것을 물어보셔서, 평소 생각하고 있던
구매 권리 심사를 부탁드린 겁니다.]
[강력한 공격대가 새로 생기는 것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지요. 그런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추출 장치를 파는 것은 그대와 우리 종족의 인연을 생각할 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추출 장치를 빼앗기거나 도난당하기라도 하면 책임을 지셔야 해요.]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세라프가 몇 가지를 더 질문했다.
수한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중심 세라프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대를 믿겠어요. 그대에게 우리 종족이 만드는 힘의 결정 추출 장치를 구매할 권리를 드리겠어요.]
[감사합니다!]
수한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이것으로 호랑이에 날개를 단 셈이다.
이제 케르베스 행성에 원정을 가고, 거기서 기계 괴수 동력핵을 가져오는 일만 남았다.
섬세한 조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변이체 심장이나 기계 괴수 동력핵을 넣고 단추만 누르면 끝이다. 어린아이라도 조작할 수 있었다.
중심의 세라프가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참, 날개 요새에서 사령관 블루아님을 뵙도록 하세요.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셨어요.]
[알겠습니다.]
인사를 한 뒤, 용이를 데리고 심사 위원회를 빠져나왔다.
아마 본론은 블루아가 직접 얘기할 모양이었다.
비행 접시를 타고 날개 요새로 갔다.
칼날 아성으로 날아올라 면담 요청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안쪽으로 안내되었다.
[어서 오시오, 2달만인 것 같소이다.]
블루아가 반갑게 수한을 맞이했다.
얼굴이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처음 봤을 때는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더니, 이젠 피부에서 광채가 났다.
수한은 빙긋 웃었다.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복구를 끝마쳤으니까. 그 전까지는 죽는 줄 알았다오. 아, 거기 앉으시오.]
블루아는 자기 앞쪽에 자리를 권했다.
수한이 의자에 앉자, 용이가 얼른 무릎 위로 올라와 앉았다. 블루아가 그걸 보고 싱긋 웃었다.
[용이가 그대를 잘 따르는 모양이오.]
[뭐, 눈 뜨고 본 게 저니까요. 제 힘에 의해 깨어나기도 했고요.]
[덕분에 학술원에서 칭찬이 자자하다오. 사실 학술원에서는 기계용을 진화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소. 그래서 최고 의원 회의에서 자원을 너무 많이 썼다고 타박을 듣곤 했는데, 요즘엔 그 소리가 쏙 들어갔소이다. 나중에 학술원 원장이신 진리의 빛과 만날 일이 있을 거요.]
[하하, 그렇습니까?]
수한은 그저 웃어 넘겼다.
문득 블루아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를 뵙자고 한 이유가 있소. 그대가 우리 종족에게 준 도움에 대해 보답하기 위함이외다.]
수한이 생각했던 대로였다.
[과찬이십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거기 있었어도 같은 일을 했을 겁니다.]
그래도 보답을 거절하진 않았다.
종족 차원에서 이뤄지는 보상이었다. 페이니아와 알르아, 닉시 셋이서 준 게 S급 힘의 결정 12개였는데 세라프 종족의 보답은 얼마나 클까?
블루아가 수한을 보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 공격대를 만든다고 들었소.]
[예. 곧 첫 원정을 떠납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게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소?]
[맞습니다. 일단은 급한 대로 힘의 결정 추출 장치만 구매했습니다만, 많은 것이 부족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거라서 힘의 결정 추출 장치만 구한 거지, 실은 더 구해야할 게 많았다.
공격대를 운영하면서 하나하나 갖춰나가야겠지.
시작은 지구에서 생산되는 물건부터.
그나마 힘의 결정 추출 장치를 빼면 다른 것들은 대부분 대체가 가능했다. 추출 장치처럼 절망적으로 심한 성능 차이가 나는 물건은 드물었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블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가 공격대에 필요한 물품을 좀 지원하려고 하오. 개인 장비를 주는 것도 좋지만, 그거야 그대도 잘 갖추고 있으니 필요가 없지 않겠소?]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소. 원래는 복잡한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그 정도는 지원국 심사 위원회에서 조사한 것으로 갈음하도록 하겠소.]
블루아가 홀로그램을 하나 불러내더니 수한에게 튕겼다.
지원 물품 목록이었다.
목록을 확인한 수한의 눈이 커졌다.
어마어마했다.
힘의 결정 추출 장치, 이능 적성 검사 기기, 이능 인증 기기, 변이체 감지 장치, 기계 괴수 감지 장치, X-0 탐지 장치, 간이 폭발 함정, 진지 방어용 방벽 생성기, 운송용 소형 비행 접시, 간이 초소 건설 장치, 간이 막사 건설 장치, 방어용 파동탄 발사기, 인공지능 방범 인형 등등.
원정에 필요한 것은 물론, 공격대 사옥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물건이 많았다.
전부 헤븐 행성에서 생산되는 물건들.
뭐 하나를 사려고 해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구매 권리를 쉽게 내주지도 않았다.
블루아가 놀란 수한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우리 종족이 생산하는 물건에 대해 구매 권리를 드리기로 했소. 최고 의원님들이 직접 관여하시는 것을 빼고 모든 물건이 해당되오]
[그게 정말입니까?]
[그대가 이번에 우리 종족에게 준 도움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수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힘의 결정 추출 장치 구매 권리만 있어도 날개를 다는 셈인데, 헤븐 행성 제품 전체라고?
결정 됐다.
원정만 몇 번 성공시키고 나면, 미르 공격대는 지구 제일의 공격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블루아가 호의 어린 얼굴로 수한을 보았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시오. 내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하겠소. 혹시 내 힘으로 부족할 것 같으면 다른 의원들을 소개시켜주겠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수한은 블루아의 이 말이 진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빈 말로 하는 게 아니었다. 진심을 담고 있었다.
지금까지 세라프 종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아예 동맹에 준하는 관계가 되었다고 할까.
쉽게 말하자면, 우주 최고의 인맥을 확보했다고 보면 되겠다.
용이를 이용해 세라프의 전당을 재건한 보람이 있었다.
이제 볼 일은 다 보았다.
더는 블루아가 할 말이 없는 것 같아서, 수한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가려는 거요? 더 있다가 가지 않고?]
[하하, 바쁘실 텐데요. 그리고 원정 시작 직전이라 제가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습니다. 경매장 들러서 살 것도 있으니,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쉽소이다. 나중에 시간 나면 꼭 들러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칼날 아성을 벗어났다.
지원 물품은 지구의 대한민국에 있는 세라프의 아성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운송비만 해도 상당히 많이 들 텐데, 그것들 모두 세라프 종족이 부담한다.
이것도 상당한 특혜.
이쯤 되자 수한도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그렇다고 물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경매장에서는 흡수 보조제를 잔뜩 샀다.
지금을 위해 S급 힘의 결정을 하나 처분했다. 수한에게는 필요 없고, 지구에서는 인기가 떨어지는 정신 계열 힘의 결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흡수 보조제를 차고 넘치도록 구입할 수가 있었다.
경매장 옆에 있는 호텔의 방을 하나 빌렸다. 밀실이 딸려 있는 방이었는데, 방을 빌리자마자 밀실 안에 틀어박혔다.
수한이 흡수해야 할 S급 힘의 결정은 정확히 3개.
왜 2개가 아니라 3개냐고?
간단하다.
일곱 번째 초능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