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차 진화 -1- >
수한도 자신이 성장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500 레벨을 찍자마자, 손목에 글씨가 몇 개 떠올랐기 때문이다.
[성장 한계 도달.]
[한계 레벨, 한계 초능 능력치.]
[레벨 업 도우미 업그레이드 요망.]
업그레이드라.
그러나 어떻게?
제국을 찾아가지 않는 한은 불가능할 터였다.
기댈 것은 세라프 종족밖에 없다.
헤븐 행성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간단한 편지를 보냈다.
다름 아닌 마니엘라에게.
답장이 오기 전까지 경매장에 가기로 했다. 레벨은 못 올려도 기술이나 초능은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헤븐 행성이야? 이야, 세라프 종족이 진짜 많다.]
[그들의 고향 행성이니까요.]
라오그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헤븐 행성에는 일행 모두가 동행했다. 이번에 얻은 전리품으로 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아르텔라가 세라프 종족을 보더니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세라프 종족은 모두 여자만 있나요? 남자가 안 보이네요.]
[세라프 종족은 무성이에요.]
[네? 그럼 어떻게 종족의 수를 늘리죠?]
[그건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린 세라프 종족이 가끔 발견되는 것으로 봐선 뭔가 방법이 있나 보지요.]
세라프 종족은 겉보기에는 모두 여자처럼 생겼다. 가슴이 봉긋 솟아 있었고, 이목구비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난소나 정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질이나 남성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르몬 조절 기관이 있을 뿐, 생식 세포 생산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론이었다.
세라프의 생식에 대해 밝히고자 하는 학자는 많았다. 하지만 세라프 종족이 모두 제지했다. 거의 노이로제에 가깝게 반응을 해서, 세라프 종족의 번식은 지금껏 베일에 싸여 있었다.
아르텔라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수한도 할 말은 없었다. 일행을 데리고 경매장으로 이동했다.
이미 언급했듯 이번 케르베스 원정의 매출은 100조가 넘는다.
이 중 대부분을 수한 일행이 갖게 된다. 공격대 지분을 다섯이 투자한 금액 별로 나눠 가지고 있고, 몫으로 따져도 다섯이 대부분의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지구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돈을 많이 써봐야 한계가 있다. 지나치게 많은 돈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도 좋지 않으니, 헤븐 행성에서 사용하는 게 더 나았다.
경매장에 들어온 라오그뉴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모든 세상의 모든 물건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지? 난 갑옷이랑 망토를 살 거야. 이제 이건 떼버려야지.]
라오그뉴는 자신의 주요 관절을 가린 갑옷을 만지작거렸다.
쥬페르 행성의 이름 높은 장인이 만든 물건이지만, 그래봐야 A급 장비라는 것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마엘른의 카일룸이나, 수한의 아바돈 같은 극강의 무구를 갖추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마엘른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힘의 결정 흡수 보조제를 구입할 생각이오. 몸을 무겁게 하는 갑옷이나, 방어구까지는 필요가 없겠지.”
“불사조의 깃털이나 바람 정령의 목걸이는 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세라프제 날개 장식 전투복도 좋고요. 강화 효과가 붙어 있는 장신구들도 고려해보세요. 마엘른님 배당금이면 SS급 장비 한두 개는 사실 수 있습니다.”
“그렇소? 알겠소이다. 생각해보겠소.”
아르텔라도 얼굴이 밝았다.
일행 중에서는 배당금이 가장 적었다. 그래도 S급 장비를 살 정도는 되었다. 저번에 얻어두었던 S급 힘의 결정까지 흡수하고 나면, 앞으로는 아르텔라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반면 새미 혼자 표정이 굳어 있었다.
수한은 새미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자기야, 긴장 풀어.”
“휴, 긴장 된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충분하지! 이능 인증에서도 별표가 떴잖아? 흡수 보조제 다 쓰면 분명히 흡수에 성공할 거야.”
“흡수해도 승급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수한은 새미를 믿었다.
지구에서 S급 힘의 결정을 몇 개 흡수해서 흡수 확률을 높인 뒤였다. 약간의 운만 따라준다면 성공할 거라고 봤다.
만약 수한과 새미 둘 다 승급에 성공한다면 미르 공격대의 SS급 이능력자가 단번에 셋으로 늘어나는 셈.
지구 전체를 통틀어도 SS급 이능력자가 열 명이 안 된다. 따라서 수만 작다뿐이지 최강의 공격대를 자처하는 게 가능해진다. 사실 성과만으로 따지고 보면 이미 역대 최고였고.
환전한 마법 금화는 각자 몫만큼 나눠준 뒤.
허공에 손짓을 하며 경매창을 살폈다.
수한은 이번에 사용할 흡수 보조제를 먼저 구입했다. 그 다음, 쓸 만한 물건이 있나 보았다.
이능력자는 뭐니뭐니해도 자신의 무력이 가장 중요하다. 초능이야 이번에 승급할 테니, 장비를 한 번 싹 교체할 생각이었다.
모든 장비를 S급 이상으로.
지금 수한의 장비 중 A급이 2개, AA급이 2개가 있었다. 이 4개를 S급이나 SS급으로 바꾸고, 혹시 괜찮은 SS급 장비가 있으면 구입하려고 했다.
경매창을 뒤져, 4개의 물건을 우선 구입했다.
아고르스의 눈, 황실 보호의 허리띠, 세계수 망토, 환영 군주.
각각 수한이 갖고 있던 물건의 강화판이라고 보면 되었다. 다만 단검인 환영 군주는 그림자 칼날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강력한 은신 기능이 있는 것은 그림자 칼날과 같았다. 거기에 더하여 본체와 똑같은 환영을 몇 개 만들 수 있었다. 무슨 원리에선지, 기계 괴수나 투시 계열 이능력자도 속이는 게 가능한 환영이었다.
환영 군주는 절대 등급, 즉 SS급이고 나머지는 S급이었다.
이 4개를 산 것으로 경매를 마무리 지으려는데, 문득 한 가지 물건이 수한의 눈에 들어왔다.
SS급 장비, 지옥 왕관.
생김새는 안타까운 수준이었다. 까만 머리띠처럼 생겼다. 피처럼 보석이 이마 부분에 박힌 게 다였다.
기능은 간단했다.
정신 계열 이능의 증폭.
그런데 증폭 정도가 무시무시했다. C급 이능력자가 차면 A급의 위력을 발현하고, S급 이능력자가 차면 SS급 이능을 발휘하게 된다.
어느 행성의 정신 계열 이능력자가 이걸 차고 신 행세를 하다가 덜미가 잡히는 바람에 매물로 나왔다던가.
수한은 이것까지 구입했다.
지금까지는 지구에서 생산된 다기능 고글을 머리에 쓰고 다녔다. 그런데 아르고스의 눈을 사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투시 계열 이능 강화 기능은 물론, 고글이 가진 여러 기능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됐어.’
여기까지 하고, 공격대에 필요한 여러 물건을 구입했다.
주로 기계 괴수 시체를 가공하는데 필요한 장치들이었다. 특히 드워프들이 좋아할 물건 위주로 샀다. 세라프들에게 지원 받은 게 꽤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제 조만간 미르 공격대 자체적으로도 S급 장비를 생산하기 시작할 터.
여기서 끝내기는 좀 섭섭하다.
알바트로스 공격대와 타이탄 공격대에서 근무하면서 본 게 있지 않나.
미르 공격대의 사원들을 위한 선물을 샀다. 돌아가는 대로 사원 모두에게 선물과 함께 상여금을 뿌릴 생각이었다.
지원 요원들을 위해 생존 계열 기능이 달린 물건을 샀다. 일반 사원들에겐 몸 상태를 좋게 해주는 물건을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법 등급이 높은 것으로 샀더니, 수한이 챙겨온 금액이 다 떨어졌다.
“오빤 다 샀어?”
평정심을 되찾은 새미가 수한을 보고 물었다.
수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장비 5개 샀어. 자기는?”
“난 두 개.”
“좀 적은 것 같은데?”
“대신 다 SS급이야. 2개 밖에 안 샀는데 돈이 다 떨어졌어.”
“SS급이면 그럴 만 하지.”
지팡이 하나, 왕관 하나였다.
지팡이는 구현 계열 이능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왕관은 이능의 사거리를 비약적으로 증가시켜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고른 물건에 대해서도 들었다.
마엘른은 기동성과 회피,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장비를 맞췄다. 수한처럼 세라프 날개 장식 전투복과 차원 전이의 신발, 어떤 부상에서라도 회복시켜주는 불사조의 깃털을 구매한 것이다.
아르텔라는 공격력에 중점을 맞췄다. 소환 계열과 외능 계열 이능을 증폭시키는 물건은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SS급은 못 샀지만, 거의 S급으로 맞췄다.
가장 압권은 역시 라오그뉴.
수한만큼 받은 배당을 몽땅 장비를 사는데 소모했다.
그 결과 SS급을 세 개나 구입할 수 있었다. 배당률과 지분이 수한과 같아서 돈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서큐버스 도우미들이 끌고 온 수레를 보고, 수한은 혀를 내둘렀다.
“굉장하네요. 멋진데요?”
[그렇지? 얼른 입어보고 싶다!]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갑옷, 별빛을 담은 듯한 투구, 통짜 쇠로 만들어서 볼품은 없지만 폭발적인 돌진을 보장하는 장화.
라오그뉴가 그것들을 차고 으스댔다.
하나같이 변신이 가능한 수인들을 위한 장비였다. 라오그뉴가 본체로 돌아가도 파괴되지 않고 제 기능을 했다.
“더 살 건 없죠?”
일행을 돌아보며 묻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호텔로 돌아가겠습니다.”
진짜는 지금부터.
수한은 목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즐거운 쇼핑 시간이 끝나고, 고통을 견뎌야 할 때가 왔다.
언제나 그랬듯 수한이 먼저 시작하려고 하는데, 새미가 선수를 쳤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시도할게.”
“괜찮겠어?”
“응. 어차피 먼저 하나 나중에 하나 차이는 없잖아.”
새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구에서 챙겨온 SS급 힘의 결정과 함께, 방금 차원 경매장에서 구입한 흡수 보조제를 들고 밀실로 들어갔다.
얼마나 걸릴까?
저번에는 시간을 많이 단축해서 3시간 정도가 걸렸다. 이번에는 최소 10시간은 걸릴 것으로 예측이 되었다. 아무리 흡수 보조제가 있다고 해도, 무려 SS급 힘의 결정이니까.
수한은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본인이 흡수하는 것도 아닌데 손바닥에 저절로 땀이 났다. 무심코 바지에 대고 닦았는데, 어느새 바지의 허벅지 부분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마엘른이 수한을 보더니 말했다.
“좀 쉬시는 게 좋겠소. 힘의 결정 흡수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게 안절부절 하다가, 그대가 힘의 결정 흡수에 실패하면 그것도 좋지 않을 거요.”
수한은 쓰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일을 이치대로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사랑하는 여인이 고통을 참고 있는데 냉정하게 대처하기는 힘들었다.
수한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소파에 눕다시피 한 채,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1시간, 2시간, 3시간……
정확히 9시간이 지났다.
문이 열렸다.
새미가 밖으로 나오자, 수한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아픈 데는 없어?”
얼른 새미에게 다가가 몸을 살폈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에서 씻고 나오긴 했지만 옅은 피비린내가 풍겼다.
일단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수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새미가 활짝 웃었다.
“응. 괜찮아.”
“성공한 거야?”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그런 것 같아.”
“축하해! 대단하다. 정말 천재는 자기인 것 같은데?”
“에이, 오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새미는 그렇게 말을 하지만, 수한이 보기에는 새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수한은 레벨 업 도우미를 이용해서 여기까지 올라왔지만, 새미는 본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SS급까지 승급한 것 아닌가.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내밀었다.
[SS급이 됐다고? 오, 축하해! 나중에 한 번 붙어보자!]
“축하하오. 한 시름 놓았구려.”
“언니, 축하해요!”
“호호, 다들 고마워요.”
이제 수한의 차례다.
수한은 힘의 결정과 흡수 보조제를 챙겼다. 새미가 수한의 어깨를 애교스럽게 툭툭 쳤다.
“오빠, 파이팅! S급 커플도 했었으니까, SS급 커플도 해보자!”
“그래야지. 조금만 기다려.”
새미도 성공했는데 자존심 때문에라도 실패할 수는 없다.
수한은 전의를 다지며 밀실로 들어갔다.
보조제를 몽땅 사용한 뒤 힘의 결정을 깨뜨렸다. 차가운 액체가 수한의 심장을 장악한 뒤, 끝없는 고통의 굴레가 수한을 엄습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이 수한을 두드렸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 망치로 후려치는 것 같은 통증, 전신을 얼리는 냉기, 뜨거운 화염, 빨랫감 짜듯 몸을 쥐어짜는 고통, 개미 떼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 아찔한 어지럼증과 강렬한 욕지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수한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버텼다.
AA급으로 승급할 때의 고통보다 몇 배는 강했다.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우웨엑!”
수한은 밀실 구석에 대고 구토를 했다.
정화 마법이 작동하며 토사물을 곧 없애 버렸다. 맑아지는 공기를 느끼며, 수한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끝났나?”
거칠거칠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초능창을 확인했다.
만물 변환 점수 300점이 부여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통을 인내한 보람이 있는 것이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S급으로 승급할 때는 그래도 견딜 만 했는데, SS급은 말 그대로 끔찍했다.
루비 아이를 잡으려면 수한이 SSS급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때는 어느 정도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SS급으로도 당장은 충분했다. 지구인의 한계가 보통 SS급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지구인 중에서는 최고 등급에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