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181화 (182/254)

< 내정 -1- >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한이 잠든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격대원들이 휴식을 취하라며 배려해준 덕분이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일단 기계 괴수나 변이체가 습격해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기엔 사방이 조용했다. 그저 숨 죽여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만 멀리서 들려왔다.

탑 꼭대기에 있는 사령부로 향했다.

새미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오빠!”

수한이 들어오자 새미가 반색하며 일어났다.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있었나 보다. 꼭 새끼새가 어미새를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그렇게 묻자 새미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피난민들이 식량을 나눠달라고 애원하고 있어. 굶어죽기 직전이래. 그래서 고민하던 중이었어.”

“그래?”

지난 경험으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바로 눈치 챘다.

굴투 시는 크람 행성에 남은 최후의 도시.

당연히 피난민들이 집중되었다. 도시의 수용 능력을 아득히 초월한지 오래였다. 이대로 가다간 서로를 잡아 먹어야 할지도 몰랐다.

기댈 수 있는 것은 미르 공격대뿐.

그들도 두려웠다. 혹시 자기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공포의 감정이 물씬 피어났다. 그러나 이대로 앉아 있다가 죽느니, 한번 애원이라도 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수한은 힐끗 창밖을 내다보았다.

피난민들이 몰려와 있었다. 문을 지키는 지원 요원에게 눈물로 뭐라고 호소하는 중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건만, 그들의 손짓에 절박함이 어렸다.

“알았어. 내가 처리할게.”

“방법이 없지 않아?”

“저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어. 몇 년 정도 뒤에는 우리 공격대의 중요한 동맹이 될 수도 있잖아. 기계 괴수만 잡는다고 다가 아니니까. 나중에 변이체 잡을 원정대 보내기에도 좋고.”

사실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울부짖는 그들을 보니, 대전쟁 당시의 자신이 겹쳐 보였던 까닭이다.

그때 수한도 세라프 종족과 종족 연합의 지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라프 종족이 아니었으면 기계 괴수에게 밟혀 주었을 테고, 종족 연합이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을 것이다. 수한만이 아니라 명한과 기한까지, 세 형제 모두.

그 빚을 갚아야 했다.

의관을 정제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예전에 질라 행성에서는 피난민들을 추스르기가 쉬웠다. 기존의 세력들에게 지원을 받으면 됐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지원을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굳이 계단을 이용할 것 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날개를 펼쳤다.

수한이 활강하며 내려오자, 울먹이던 피난민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눈에 두려움의 빛이 역력했다.

수한은 피난민들을 둘러보았다.

피부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한 각질로 덮이고, 코와 귀가 없이 구멍만 뚫린 크람 행성인.

다들 굶주리고 지친 기색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병에 걸려 있었다. 그들에게서 숨길 수 없는 절망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식량이 부족하다고요?]

초월 의식으로 묻자, 피난민들은 대답하기는커녕 벌벌 떨기만 했다.

안 그래도 기계 괴수를 상대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젖어 있던 참이었다. 굶어 죽을 판이니 용기를 내긴 했지만, 날개를 달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완전히 기가 죽었다.

그나마 강단 있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뭉툭 튀어나온 입을 실룩이더니,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먹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다 굶어죽을 겁니다. 저흴 죽이시려는 게 아니면, 제발 먹을 것을 나눠 주십시오!]

사내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피난민들이 그에 자극 받았는지 울부짖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일주일째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저를 노예로 부리셔도 좋으니 아이들만큼은 제발 살려주십시오!]

간절한 외침이 수한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익숙한 감정, 익숙한 호소다.

수한은 오른손을 들었다.

피난민들이 침묵했다. 뭔가 능력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수한의 몸짓에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위엄이 풍겼던 것이다.

[여러분의 말은 잘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사흘 이내로 여러분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하겠습니다.]

피난민들이 술렁였다.

다 죽어 가던 그들의 눈에 옅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십니까?]

[예. 사흘입니다. 그 시간 안에 식량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저흴 믿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수한의 강렬한 의지가 전해졌다.

피난민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사흘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 정도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하늘을 날며 기계 괴수들을 몰아치던 이계인 대장이 하는 말 아닌가.

신화 속의 신들보다 더한 위용을 뽐내던 이들.

못 믿을 이유가 없었다.

피난민들이 연신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관대하신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어리석고 추한 저희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들의 축복이 있기를!]

수한이 좋은 말로 위로를 하자, 피난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널브러졌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새미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사흘? 그 안에 해결할 수 있어?”

“해야지. 내가 보기에도 다들 상태가 안 좋던 걸. 지금까지는 어떻게 버텼는지 몰라도, 조만간 아사자가 나오게 생겼더라.”

“그건 그래. 좋은 방법은 있어?”

“몇 가지 생각 중이야. 타당한 걸로 골라봐야지.”

일단 굴투 시에는 남은 식량이 없다. 기존에 비축해 놓은 식량까지 모두 피난민들이 먹어치웠으니까.

크람 행성은 현재 늦가을.

기계 괴수들의 공격으로 농사도 이미 망친 다음이었다. 가축도 다 잡아 먹었으니, 도시 근방에서는 식량을 구할 방도가 없는 것 같았다.

수한은 원정대를 불러 모았다.

한참 전리품을 지구로 옮기다 불려나온 시규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흘 내에 식량을 확보한다라…… 지구에서 가져오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건 힘듭니다. 제가 굴투 시의 피난민들을 한 번 헤아려 봤는데, 수가 무려 10만이에요. 지구에서 식량을 사와서 정화시키기고 차원문을 넘을 돈이면, 우리 공격대 수익을 상당히 털어 넣어야 할 겁니다.”

10만 명을 1년 간 먹여 살리려면 쌀로 따져서 백만 톤은 필요하다. 말이 백만 톤이지, 거기 소모되는 각종 비용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라오그뉴가 책상을 긁고 있다가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사냥을 하면 어때?]

“사냥이요?”

[응. 바다가 바로 옆에 있잖아. 해양 동물 중에 큰 놈을 잡으면 10만 명 정도는 먹일 수 있지 않겠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지구의 고래를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나.

대왕고래는 무게가 100톤이 넘어가는데, 그 중 고기가 50톤 이상이다. 50톤이면 1명이 200그램씩 먹어도 굴투 시의 피난민들이 하루는 버틸 수 있었다.

더구나 다른 부산물도 있으니, 실제로는 더 오랫동안 먹이는 게 가능할 것이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오빠, 사냥은 어떻게 하려고?”

“까짓 거 기계용 몰고 나가서 잡아오면 되지 뭐. 절대자의 눈도 있으니까, 사냥감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하지만 한 가지 방법만 선택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원정대 사람들에게 역할을 배분했다.

“저는 바다로 나가서 거대 해양 생물을 잡겠습니다. 라오그뉴님은 도시에서 멀리 나가시지 말고 적당한 동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잡아서 가져오세요. 지구의 코끼리 정도 크기 동물만 몇 마리 잡아도 아쉬운 대로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변이체를 잡진 마시고요.”

[알았다. 그 정도야 쉽지.]

“임 과장님. 지원 요원 중 몇 명을 차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근처 폐허를 수색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창고에 남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전리품을 지구로 옮기는 게 느려질 텐데,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어차피 전리품이 어딜 가진 않습니다. 지금은 피난민들을 다독이는 게 더 중요해요.”

“알겠습니다.”

“이사님들은 지원과를 좀 도와주세요. 변이체들이 출몰할 테니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부사장님은 굴투 시에 머물면서 아르텔라와 함께 지휘를 맡아주시고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저한테 바로 말씀해주세요.”

“네, 사장님.”

공식적인 자리니 존칭을 썼다.

쾌도난마식으로 일을 나눠준 후, 수한은 잠깐 궁리를 했다.

이대로 나가서 바다 위를 무턱대고 헤매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경험 있는 어부를 섭외해서 데리고 가는 게 나았다.

수한은 원정대를 한 번 슥 보았다.

“자, 이제 움직입시다. 혹시 뭔가 문제가 있으면 부사장님에게 말해주세요. 부사장님과 초월 의식을 계속 유지해 놓고 있겠습니다.”

“예, 사장님.”

수한은 사령부 밖으로 나왔다.

피난민들이 힘없는 얼굴로 수한을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며, 아까 앞으로 나서서 말을 했던 사내를 찾았다.

강단 있어 보이는 인상의 사내.

얼굴이 햇볕에 그을리고, 두 팔은 두툼했다. 그리고 희미한 소금 냄새가 났었다.

아마 어부가 아닐까 싶었다.

절대자의 눈을 동원해 사내의 위치를 파악했다. 전투복의 날개를 펼쳐 사내에게 날아갔다.

사내는 자기 가족들을 보듬고 쓰러진 건물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수한이 하늘을 날아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가족들을 두 팔로 가리더니, 경계하는 눈으로 수한을 보았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거대 해양 생물을 잡아오려고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면 많이 있습니까?]

수한은 지구의 고래를 영상화하여 사내의 머리에 투영시켰다. 그것을 해체하여 잡아먹는 장면까지 보여주자, 사내는 금방 수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샹티아 해역에 가면 비오크, 씨휘아, 돌뭉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들이면 충분히 식량이 될 겁니다만, 샹티아 해역은 여기서 너무 멉니다.]

[얼마나 멉니까?]

[굴투 시에서 가장 큰 배를 타고 나가도 1주일은 넘게 걸립니다. 지금은 다 불타서 없어졌고요.]

1주일?

별 거 아니다.

크람 행성의 배는 모두 범선이니까. 초자연적인 힘이 발달한 행성도 아니니 1주일이라고 해봐야 2천 킬로미터 정도이니, 기계용으로는 1시간이면 충분했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깝네요. 금방 다녀올 수 있겠습니다.]

[가깝다고요?]

사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수한은 사내에게 제안했다.

[절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샹티아 해역이 어디 있는 줄 모르고, 이 행성에서 방향을 잡는 법도 모릅니다. 절 도와주시면 후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인데, 사내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없으면 제 가족을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저희가 보호해드리지요. 사령부에 가족들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내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수한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이 행성에 오기 무섭게 기계 괴수들만 잡고 다녔으니, 아직 이렇다 할 신뢰감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옆에 있던 사내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와요.]

[괜찮겠어?]

[우리 아이들도 밥을 못 먹은 지 오래 됐어요. 당신이 도와주면 더 빨리 비오크나 씨휘아를 잡아올 수 있잖아요? 샹티아 해역에 대해선 당신이 굴투 시에서 가장 잘 아니까요.]

[아빠, 배고파.]

아이들까지 칭얼대자, 사내는 금방 결단을 내렸다.

수한의 뜻대로 되었다.

사내의 가족들은 사령부에 맡겨 두었다. 그리고 사내를 데리고 기계용에 탑승했다.

기계용에 융합된 채 자고 있던 용이가 수한의 정신에 접촉했다.

[얘는 뭐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내가 같이 탑승하자 이상했나 보다.

사내는 정신 계열 이능이 없는 탓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생경한 눈으로 기계용의 내부를 구경했다.

뒤쪽의 좌석에 앉게 한 후, 안전띠 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서 용이의 질문에 대답했다.

[길잡이야. 지금부터 사냥하러 갈 거라서.]

[사냥? 기계 괴수들 잡게?]

[아니. 해양 동물을 잡을 거야. 먹을 게 필요하거든. 방수 되지?]

[응. 당연하지.]

[좋아. 그럼 출발하자.]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육중한 몸이 상공으로 떠오르자 뒤에 앉은 사내가 벌벌 떨었다. 설마 기계용을 탈지도, 또 기계용을 타고 하늘을 날 줄도 몰랐던 것이다.

방향을 꺾어 바다를 향했다. 추진 장치를 가동시켜 빠르게 비행하기 시작했다.

쿠아앙!

하늘 높이 올라간 후, 최대한으로 속도를 올렸다.

현재 기계용은 그 육중한 몸에도 불구하고 가뿐히 음속을 넘나들곤 했다. 덕택에 방금 전 출발한 굴투 시가 금세 점처럼 변하여 뒤로 사라졌다.

푸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졌다.

지구의 바다와는 다르게 좀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가끔은 핏빛처럼 보였다. 왜 그러나 싶어 사내에게 물어보니, 이 근방에 서식하는 붉은 해초들 때문이라고 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수한은 정신없이 창밖을 구경하던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가 몸을 움찔했다.

[저 말입니까?]

[하하, 그럼 여기 또 누가 있습니까?]

[아, 예, 자메스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자메스님. 여기서 어디로 가면 됩니까?]

[어 그러니까……]

자메스는 버벅거리면서도 길을 잘 설명해 주었다.

수한은 자메스가 가리키는 대로 기계용을 비행하게 했다.

굳이 해로를 따라갈 필요가 없으니 생각보다 일찍 샹티아 해역에 도착했다.

뾰족 솟은 바위섬 하나를 지나자 샹티아 해역에 도착했다.

해초들이 서식하지 않아 유독 파랗게 보이는 바다.

“햐!”

수한은 하늘 위에서 그 바다를 내려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거대한 바다 동물들의 천국이었다.

철갑을 입은 듯한 고래, 머리가 두 개에 뱀의 것처럼 긴 꼬리를 가진 바다거북, 표면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 있는 거대 오징어 등등.

절대자의 눈으로 살펴보니 그들의 먹이가 될 갖가지 종류의 생선과 작은 부유 생물들이 바다 전체에 가득했다. 이 바다 자체만으로도, 풍족한 생태계가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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