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182화 (183/254)

< 내정 -2- >

수한은 자메스에게 물어 보았다.

[저것들 중 뭘 잡아가는 게 좋겠습니까?]

자메스가 고민하는 눈치더니 철갑 고래를 가리켰다.

[식량으로 따지면 비오크가 가장 좋습니다. 식용이 가능한 부위가 제일 많거든요. 독도 없고요.]

[쌍두 거북과 가시 오징어는 어떻습니까?]

[씨휘아와 돌뭉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들도 좋습니다. 대신 비오크보다는 식용 부위가 적은 편입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수한이 보니 셋 다 지구의 대왕고래와 크기가 비슷했다.

무게는 100톤 정도.

기계용이 충분히 들고 날 수 있었다. 무리를 하면 2마리까지 가져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문제가 되는 건 부피지, 무게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비오크 두 마리를 잡아가야겠네요.]

절대자의 눈으로 따로 떨어진 철갑 고래를 골랐다.

죽이는 건 쉬웠다. 광선포를 쓸 것도 없이 기계용에 장비된 기관총으로 즉사 속성을 박아 넣었다. 두 마리를 죽인 후, 네 개의 발을 이용해 시체를 칭칭 얽어맸다.

이번에도 변형 능력을 유용하게 사용한 것이다.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철갑 고래가 잘 고정된 것을 확인하고 속도를 올렸다. 오던 때처럼 음속을 넘지는 않았지만 빠른 속도였다. 한 번 왔던 길이니 일직선으로 쭉 날아가서, 굴투 시를 출발한지 네 시간 만에 귀환했다.

수한은 기계용을 몰아 굴투 시 상공을 빙글빙글 돌았다.

일종의 보여주기였다.

기계용에 매달린 고래 두 마리를 본 피난민들이 웅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한은 사령부의 탑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고래를 근처 공터에 내려놓자, 모여든 피난민들이 꿀꺽꿀꺽 침을 삼켰다.

수한은 자메스를 내려주었다.

자메스를 보고 피난민들끼리 뭐라고 떠들었다. 기계용을 타고 어딜 다녀온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새미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오빠! 성공했네?”

“그럼. 라오그뉴님이랑 다른 분들은?”

“라오그뉴님은 하도 많이 잡으셔서 지원과에서 SUV 끌고 나갔어. 혼자서는 못 옮기신대.”

“다행이다. 임 과장님한테는 연락 없어?”

“이제 4시간 밖에 안 지났어. 지금쯤 한참 수색 중일 걸?”

“아, 그렇겠구나.”

어느새 피난민들이 까맣게 모여들었다.

모두 눈이 벌게져서 철갑 고래를 쳐다보았다.

수한은 그들의 기세를 보고 한쪽 뺨을 긁었다.

처음에는 알아서 하라고 그냥 내줄 생각이었는데, 그랬다가는 질서가 무너져 자기들끼리 압사 당하는 사람이 나오게 생겼다.

머리를 굴리다 자메스에게 물었다.

[혹시 고래 도축 하는 방법 아십니까?]

[예. 예전에는 그걸로 밥 빌어먹고 살았습니다.]

[잘 됐습니다. 저걸 좀 도축해 주세요. 혼자서는 힘드실 테니, 아는 사람 있으면 그들도 데려다 쓰고요.]

샹티아 해역에 같이 다녀와서일까.

자메스는 순순히 수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동료 어부들을 부르더니 커다란 칼이며 도끼, 톱 같은 연장을 어딘가에서 가져왔다. 철갑 고래에 달라붙어 작업을 시작하자, 겉의 딱딱한 가죽이 두부 가르듯 갈라져 나왔다. 금방 속살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한은 그것을 보고 있다가 자메스의 아내를 호출했다.

아내가 두려운 기색을 띄자, 별 거 아니라는 듯 말을 했다.

[고기를 요리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부의 아내이니 고래 요리에는 도가 텄겠지요?]

[네. 칼이랑 솥만 있으면 어지간한 건 다 할 줄 알아요.]

[좋습니다. 알고 지내는 분들이 있지요? 그 분들이랑 같이 요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메스의 아내가 쭈뼛쭈뼛 몇 명의 아낙을 불렀다.

각자 가지고 있던 솥을 한쪽에다 걸었다. 그것을 본 피난민들이 합심해서 화덕을 만들었다.

누군가 부싯돌을 꺼내자 수한이 제지했다.

총을 쏘아 불을 붙였다.

그 뒤부터는 일이 쉬웠다.

피난민들이 알아서 움직였다. 건장한 사내들이 먼저 나서서 질서를 유지하고, 어부들이 고깃덩어리를 떼어내면 아낙들이 요리를 만들었다.

마침 라오그뉴도 도착했다. SUV 몇 대가 커다란 동물 시체들을 매달고 천천히 라오그뉴를 따라오고 있었다.

모두 육류라 소화가 잘 될가 싶었다.

어부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회로 먹는 게 별미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쫄쫄 굶기만 했으니, 국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향초 같은 것을 넣어 비린내를 잡았다. 그것 말고도 인근에서 채집한 채소를 넣자 그럴 듯한 고깃국이 완성되었다.

자메스의 아내가 작은 그릇에 고깃국을 담아 수한에게 내밀었다.

[사장님. 이거 드세요. 비록 누추하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원정대가 수한을 부르는 호칭을 들었나 보다.

제법 구수한 냄새가 수한의 코 안으로 파고들었다.

수한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피난민들의 굶주린 시선이 수한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 수한이 먼저 시식을 해야 그들도 식사를 할 듯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예전이라면 감염 문제 때문에 입도 안 댔겠지만, 지금은 쥘베르에게 받은 우주 탐험가의 별이 있으니 먹어도 괜찮았다.

수한은 기분 좋게 그릇을 받아들었다.

한 술 뜨자, 비로소 피난민들이 자기들끼리 음식을 나누어 먹기 시작했다.

새미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이제 급한 불은 끈 것 같아.”

“맞아. 샹티아 해역 보니까 어장이 풍족해서 도시 하나 먹여 살리는 건 일도 아니겠더라.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가 봐줄 수도 없으니까, 결국 자립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지.”

“어떻게 하려고?”

“봄이 오면 파종을 해야지. 보니까 밭들이 다 망가져 있던데, 겨울 동안 다시 개간을 해야 할 것 같아. 배를 만들어서 물고기 잡는 것도 시작해야지. 주인 잃은 가축들 잡아다가 목장을 만들면 충분히 우리 도움 없이도 살아남을 거야.”

“힘의 결정에 대해서는 안 알려줄 거야?”

“두고 보려고. 믿을 만한 사람 있으면 그 사람부터 시작해야지. 신중하게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빠 생각이 맞아.”

10만 명이 먹어대는 것은 엄청났다.

그 큰 고래가 벌써 뼈만 남겨놓고 있었다. 그 동안 굶주렸으니 일부러 조금만 먹게 했어도 그랬다.

아르텔라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들 괜찮을까요? 저렇게 갑자기 먹으면 속에 탈이 날 텐데요.”

“제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수한은 시계를 쓰다듬었다.

4번째 침을 11번째 천사에 맞추고 칠채 성좌를 사용하자, 하얀 빛이 뿜어져 광장을 한 번 훑었다.

피난민들이 움찔하더니 별 거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고기와 고깃국에 머리를 처박고 식사를 했다.

워낙 굶주린 탓에 많이 먹지도 못했다. 고기 몇 점에 고깃국 한 사발 정도만 먹고 헉헉거렸다.

수한은 시계를 벗어 사령부의 탑에 꽂았다.

그러자 흰 빛이 동심원처럼 퍼져 나왔다. 흡사 빛나는 돌이 탑에 꽂혀 있는 것 같았다.

흰 빛을 등진 채, 수한은 피난민들에게 말했다.

[하루에 3번, 이곳에서 음식을 제공할 겁니다. 하지만 저희가 무한정 여러분을 보살필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이방인이고, 언젠가는 떠나야 합니다. 결국은 여러분 스스로 일어서야 합니다.]

내일 아침을 먹은 후, 각자의 특기를 조사하겠다고 했다.

농부는 농부, 어부는 어부, 목수는 목수, 대장장이는 대장장이, 이렇게 분류한 뒤 할 일을 부여하겠다고 한 것이다.

피난민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기대가 어린 얼굴로 수한을 보았다.

1년 넘게 전쟁에 시달린 참이었다. 거대한 절망에 물든 시간을 보냈고, 분노와 악도 다 타서 재가 되어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대신 수한은 철저히 질서를 지킬 것을 주문했다.

폭행, 절도, 강간, 살인 등을 저지르면 이유 불문 추방하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그런 이들까지 끌고 가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으니까.

추방은 곧 죽음.

피난민들이 몸을 움츠리는 게 보였다.

남은 음식은 한쪽에 쌓아 보관했다. 수한이 녹스를 몇 번 쏘자 빙결 속성이 음식들을 꽝꽝 얼렸다. 날씨도 추우니, 충분히 보관할 수 있을 것이다.

밤 무렵 주변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SUV에 뭔가를 바리바리 싣고 있었다.

곡물 자루.

밀과 비슷한 품종으로 보였다. 가루 상태인 것도 있고,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상태인 것도 존재했다.

수한은 웃음을 띤 채 그들을 반겼다.

“뭐가 좀 많네요?”

“운 좋게 보존된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지상 창고는 누군가 거의 다 가져갔는데 지하 창고에는 곡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거든요.”

“다행이네요. 양이 꽤 많으니 당분간 버틸 수 있겠습니다. 종자는 없었습니까?”

“제가 그걸 알아볼 수가 없어서……”

“아, 그걸 생각 못했네요.”

덕분에 다음날 아침부터는 배급하는 음식에 곡류가 추가되었다.

수한은 피난민들 중 농부를 골라냈다.

그들에게 곡물 자루를 보여주었다. 이 중 종자로 쓸 수 있는 게 있냐고 묻자, 농부들이 이구동성으로 도정하지 않은 곡물을 가리켰다.

종자는 사령부 탑에 보관하고, 나머지 곡물만 풀었다. 수한이 기계용을 타고 곡물이 발견된 폐허를 왕복하니, 금방 곡물 자루가 무더기로 쌓였다.

라오그뉴는 계속 사냥을 하고 있었다. 코끼리보다 조금 작은 짐승을 수십 마리나 잡았다. 수한은 내친 김에 그것들도 가져왔다.

고래, 들짐승, 곡물 자루를 그득하니 쌓자 피난민들이 안정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시종일관 침울하던 그들의 얼굴에 비로소 활기가 깃들었다.

이것으로 식량 확보는 어느 정도 끝났다.

예고한 대로 피난민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일할 수 있는 성인이라면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피난민들이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여자들은 요리와 길쌈을 시키겠다고 하자 곧 수그러들었다.

현재 굴투 시의 인구는 약 10만.

이중에서 성인 남자는 기껏해야 3만 명 정도였다.

대부분은 농부와 어부였다. 그밖에는 목수와 석공, 대장장이가 소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왕이나 귀족, 성직자 같은 고위층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라프 종족은 그들을 먼저 보호할 때가 많은데, 크람 행성에서는 그러지 못했나 보다.

피난민 분류를 끝낸 후, 치안 문제에 손을 댔다.

기존에 병사였다는 자들을 활용했다. 무기라고는 몽둥이 하나가 전부지만, 한쪽 어깨에 푸른색 띠를 하나 둘러주자 기세등등해졌다. 피난민들을 통제하여 치안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대신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엄중 경고했다. 띠를 둘러주기 전 그들의 평판을 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이 진짜 많다.”

새미가 고개를 흔들었다.

수한은 쓰게 웃었다.

벌써 며칠 째 이곳에 묶여 있는 건지 몰랐다. 지원 요원들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는데, 그들도 전리품을 지구로 보내느라 바빴다. 그렇다고 이능력자들을 동원하기에는 전투 말고는 아는 게 없다는 게 걸렸다.

별 수 없이 수한이 고생해야 했다.

피난민들을 지휘하여 도시의 집을 수리했다. 한편 나무를 베어와 새로운 집도 지었다. 기계용을 동원해 주위 농경지를 한 번 뒤엎은 다음, 봄이 오면 파종할 준비를 했다.

불탄 어선 중 상태가 좋은 것을 수리했다. 몇 척은 더 만들기도 했다. 비록 샹티아 해역까진 못 가도, 근해에서 물고기를 잡는 건 가능했다.

그렇게 시간을 좀 보내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아직도 많은 점이 부족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삼시세끼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아침저녁으로 치안대가 순찰을 도는 모습이 보였다.

피난민 무리도 속속 도착했다. 미르 공격대가 주변 기계 괴수들을 소탕한 탓에, 굴투 시에 오기 쉬워진 것이다.

1달이 지났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싸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예전 같았으면 피난민 중 절반이 얼어 죽었을 것이다.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모두 자기들에게 배정된 집에서 쉬고 있었다. 때 되면 음식을 얻어가 가족끼리 배불리 먹었다. 수한이 강력하게 개입한 탓에, 강력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한은 도시를 한 번 둘러보았다.

피난민들의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 처음 왔을 땐 죄다 죽어 있었는데, 이젠 가끔 웃기도 했다. 어린애들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더구나 31마리 기계 괴수 전리품은 모두 지구로 보냈다. 그 덕에 현재 세라프의 전당 옆 공터는 텅텅 비었다.

때가 된 것이다.

진군의 때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