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위망 붕괴 -2- >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를 하고, 핏빛의 날개를 펼친 자.
허리에 찬 검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세상 만물을 담은 듯 웅장한 기세가 뿌려지고, 언뜻 무지갯빛이 새어나왔다.
세계검이다.
갑옷도 심상치가 않았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황홀한 은백색을 뽐내고 있었다. 세계검과 마찬가지로 SSS급 장비로 보였다.
그 세라프가 수한의 앞에 착지했다.
얼굴은 옥으로 빚은 듯 아름답지만, 칼날처럼 매서운 기세가 물씬 풍겼다.
쥘베르가 소개를 해주었다.
[우리 종족의 질라 행성 총지휘를 맡으신 피의 날개 라엘라 의원님입니다.]
의원급, 즉 SSS급 이능력자.
수한은 정중히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지구 출신, 미르 공격대의 공격대장인 SS급 이능력자 이수한이라고 합니다.]
[반갑다. 그대의 활약은 듣고 있다. 이번에는 학술원에 큰 도움을 주었다지? 내 상관이신 세계수호자 실르엔님께서 칭찬을 많이 하시더군.]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기는. 그대의 도움으로 반격의 단초가 마련되었지 않느냐.]
작전은 간단했다.
수한과 라엘라, 라오그뉴, 붉은 날개의 세라프들이 전면에서 기계 괴수들을 공략한다. 그러면 다른 이들이 지원하며 기계 괴수를 하나하나 쓰러뜨린다.
세라프는 날개의 색깔마다 특기가 달랐다. 붉은 날개는 근접 공격에, 푸른 날개는 원거리 이능 공격에 특화되어 있었다. 흰색이면 방어와 지원 능력이 뛰어나고, 금색은 다방면에 재주가 뛰어났다.
그밖에도 여러 색깔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이 네 가지에 속할 때가 많았다.
라엘라을 제외한 일곱 SS급 세라프 중 적색 날개는 둘, 청색 날개가 둘, 흰색 날개가 둘, 금색 날개가 하나였다.
회의를 끝낸 후, 라엘라가 몸을 일으켰다.
[출발하지요.]
수한은 미르 공격대를 기계용에 태웠다.
이틀 동안 기계용에 손을 댄 참이었다. 이제 용 형태와 인간 형태로 변신할 수가 있었다.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 용 형태는 그대로 기계용이라 부르고, 인간 형태는 별도로 용기사라 부르기로 했다.
세라프들이 날개를 펼쳐 기계용을 쫓아왔다.
속도가 상당했다. 음속까지 속도를 올렸는데도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왔다.
금방 거대 기계 괴수들이 있는 지역에 접어들었다.
라엘라가 정신 감응으로 경고를 보냈다.
[곧 기계 괴수들이 보일 걸세. 더 높이 상승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속도를 점차 줄였다.
고도를 더 높여 구름 속으로 숨었다. 아울러 기계용의 은신 능력을 활성화했다.
수한은 운명의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기계 괴수를 발견했다.
크람 행성에서 봤던 기계 괴수들과 비슷하게 생겼다. 다만 구체적인 형상은 달라서 게가 아니라 거미를 닮았다. 그래도 머리가 셋, 팔이 여섯, 다리가 열둘이라는 점은 똑같았다.
기계 괴수는 공중에 떠 있는 기계용과 세라프 종족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대지를 서성이며 괜히 땅을 헤치거나 주변의 식물을 불태워 없애고 있었다.
연달아 다른 기계 괴수들도 확인했다.
셋 간의 거리가 기껏해야 수백 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전투를 시작하고 30분이면 도착할 것 같았다.
[일단 한 마리부터 확실히 처리를 해야겠습니다.]
[동감이다.]
정 안 되겠으면 동력핵만 처리하고 빠져도 될 일이었다. 지금까지 세라프들만으로는 결정타를 먹이기가 힘들어 그렇게 못했지만, 미르 공격대의 합류로 그게 가능해졌다.
수한은 먼저 적당한 곳에 미르 공격대를 내려주었다.
들키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기계 괴수의 탐지 장치가 한 번 이쪽을 훑어보았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이것으로 준비 완료.
라엘라가 수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한은 기계용을 변형시켰다.
앞다리가 접히며 사람의 팔처럼 변했다. 꼬리는 확연히 가늘어지고, 툭 튀어나와 있던 배가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머리의 각도가 좀 더 내려가고, 배 안에 보관하고 있던 광선검과 파멸의 철퇴를 두 손에 쥐었다.
변신은 고작 몇 초 만에 끝났다.
용기사가 입을 벌렸다.
입 안에 숨겨져 있던 주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통형의 부속품이 회전하며, 주포가 길어져 입 밖까지 뻗어 나왔다.
수한은 정신을 집중했다.
예전처럼 속성 중첩과 속성 조합만이 아닌, 새로 개발한 기술 중 하나를 쓸 생각이었다.
뇌룡 숨결.
용기사와 동화된 채 속성 중첩과 우레미르를 발현했다. 수한이 낀 장갑에서도 두 가지 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네 개의 힘이 섞이며, 주포에 강렬한 빛이 모여들었다.
빛이 벼락으로 변했다.
번개 다발이 타다타닥 소리를 냈다.
주포 자체의 힘과, 수한이 일으킨 뇌룡 숨결의 힘이 하나로 뒤섞였다.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무시무시한 기파를 창공에 뿌려댔다.
거기 깃든 위력을 느낀 라엘라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세라프들도 침을 삼키며 용기사를 보았다.
그만한 힘이 모이는데 기계 괴수라고 모를 리가 없다.
몸을 멈칫하더니, 탐지 장치를 최대한으로 가동했다. 지상을 빠르게 훑은 후, 이내 하늘을 탐색했다.
기계 괴수의 눈이 용기사를 정면으로 주시했다.
이미 늦었다.
수한이 뇌룡 숨결을 완벽히 구현한 다음이었다.
용기사가 입을 찢어져라 벌렸다.
강대한 벼락의 강이 꿈틀거리며 뛰쳐나갔다.
콰콰콰콰콰콰!
해일이 세상을 덮쳤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릴 것만 같은 기세로 우르르 쏟아졌다.
구름이 찢어졌다.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시야가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거대한 번개의 용이 기계 괴수를 직격했다.
방어막이 겹겹이 쳐졌지만, 그 정도로는 이 무시무시한 재앙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마주치는 즉시 맷돌에 갈린 감자처럼 으깨져버렸다.
“끄끄끄끄끄!”
기계 괴수가 기괴한 소리를 질렀다.
강렬한 힘이 기계 괴수의 전신을 관통했다. 곳곳의 주요 부품이 부셔지고, 전자 기기에 혼선이 생겼다. 금속 장갑 표면이 시꺼멓게 녹아내려 안 그래도 흉악한 외모가 더욱 흉물스럽게 변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수한은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뇌룡 숨결을 끝내자마자 초능 두 가지를 발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극초음속과 천지개벽.
주포가 회전하며 입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두 손에 든 검과 철퇴를 등에 붙이고, 대신 꼬리에서 광선창을 뽑아 들었다.
순식간에 천지돌파가 완성되었다.
어마어마한 힘이 광선창으로 모여들었다. 파랗던 창의 빛이 붉게 변하여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용기사가 몸을 기울였다.
날개를 떨쳤다.
추진 장치가 빛을 뿜었다.
용기사가 매서운 기세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창끝에서 이글대는 빛이 용기사의 몸을 감쌌다. 용기사가 낙하함에 따라 그 뒤로 길게 늘어졌다.
이것은 일개 용기사가 아니다.
하나의 혜성.
문명을 불태우고 종족을 멸종시킬 파멸의 마왕이었다.
기계 괴수가 주춤주춤 일어났다.
어깨 위에 매달린 주포를 겨누고 쏘았다. 강렬한 빛이 번쩍하고 쏘아졌다.
무시했다.
몸으로 맞으며 전진했다.
기계 괴수의 시꺼먼 몸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창끝이 기계 괴수의 머리에 꽂혔다.
꽈아앙!
폭음이 터졌다.
막강한 힘이 기계 괴수를 꿰뚫었다.
대지가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쳤다. 지진이라도 난 듯 나무들이 쓰러지고 흙먼지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수한은 순간 머리가 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금강불괴를 발현하는 등 온갖 방어 수단으로 스스로를 보호했지만,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신을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가 치솟았다.
꿀꺽 삼켰다. 몸을 일으켜 세우며 등에 부착시켜 놓은 파멸의 철퇴를 꺼냈다.
“부우우우!”
용기사에게 깔려 있던 기계 괴수가 일어났다.
하도 강한 타격을 입은 탓에 기능이 잠깐 정지했던 것이다.
광선창이 꽂힌 머리 인근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세 개의 머리 중 1개만 온전했고, 주변의 팔도 박살이 났다. 남아 있는 팔은 세 개뿐이고, 상반신이 파헤쳐져 동력핵의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기계 괴수가 온전한 팔을 일제히 휘둘렀다.
거대한 도끼와 광선검이 용기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한쪽 손이 위험하게 빛나며 파멸적인 기운을 뿌렸다.
굳이 맞아줄 필요는 없다.
수한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옆구르기를 했다. 극초음속까지 발휘된 상태라 아슬아슬하게 공격이 용기사를 스쳤다. 수한은 몇 번이나 몸을 굴린 뒤 일어났다.
찬탄어린 라엘라의 정신 감응이 날아들었다.
[훌륭하다!]
세라프들이 날개를 펼치고 급강하하고 있었다.
라엘라가 남아 있는 기계 괴수의 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기계 괴수가 급히 전신의 광선포를 돌출시켰다. 미친 듯이 쏴대며 화망을 구성했지만, 라엘라가 세계검을 내밀자 궤도가 뒤틀리며 엉뚱한 곳으로 빠졌다.
세계검이 기계 괴수의 마지막 머리를 두 조각냈다.
흉험한 기세로 반격을 가하지만 그 정도에 당할 라엘라가 아니었다. 곡예비행을 하며 피해냈다. 그러면서 세계검을 뿌리자 적색 화염이 쏘아져 기계 괴수를 강타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세라프들도 덤벼들었다.
일제히 적색검을 휘둘렀다. 맹렬한 빛이 터졌다. 라엘라처럼 머리를 쪼개놓지는 못했어도, 각자 팔 하나를 날려 버렸다.
[어흥!]
라오그뉴가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번개처럼 몸을 날리며 마지막 남은 팔까지 뜯어 버렸다. 몸에 광선포와 미사일 발사대, 화염 방사기 정도는 남아 있지만 실질적으로 무장해제가 된 셈이다.
수한은 광선포를 발사하여 기계 괴수의 흉부에 유도 속성을 걸었다.
때마침 미르 공격대의 이능력자들이 도착하고, 원거리 공격을 준비하던 세라프들도 공격을 퍼부었다.
형형색색의 빛이 빨려 들어가듯 흉부를 강타했다.
수한은 철퇴를 놓고 광선검을 빼어들었다.
기계 괴수가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수한 스스로 발하는 힘과, 장갑에 박힌 보석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공명하고 있었다.
번개를 생성했다.
그것을 단번에 발산시켰다.
뇌룡 일격.
광선검과 어우러져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번갯불이 뛰쳐나가며 기계 괴수의 가슴을 때렸다.
금속 장갑이 단번에 쪼개졌다.
동력핵이 드러났다.
위협을 느낀 기계 괴수가 반항했다. 온전한 다리로 용기사를 걷어차고, 광선포를 숱하게 날렸다. 미사일을 쏘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다.
소용 없었다.
수한은 화신 초능과 방어막으로 견뎠다. 그러면서 동력핵을 기계 괴수에게서 뽑아 버렸다.
기계 괴수의 움직임이 멎었다.
성난 전갈처럼 반항하던 것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신체 말단에서만 간헐적으로 경련이 일어났다.
“후우.”
수한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뇌룡 숨결과 천지돌파를 연달아 사용한 탓에, 강렬한 공허감이 엄습해 왔다.
용기사의 덩치가 큰 탓에 기술을 발현하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 지금은 거의 2/3 이상 힘을 소모한 것 같았다.
이래 가지고 거신 강림은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늘 위에서 기계 괴수들을 감시하던 쥘베르가 말했다.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10분 후 도착할 겁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기계 괴수를 해치웠지만, 공격 즉시 기계 괴수들이 움직인 탓에 근방까지 접근해온 것이다.
그래도 두 마리만 남았으면 해결하기가 쉽다.
수한은 용기사를 일으켰다. 철퇴로 무기를 바꾼 채 한쪽 방향을 맡았다. 라오그뉴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용기사의 옆으로 따라왔다.
[라엘라님. 제가 버티고 있을 테니 다른 기계 괴수를 먼저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좋다.]
수한은 미르 공격대도 라엘라에게 합류하도록 했다.
이쪽으로 오는 거대 기계 괴수를 상대하는 것은 수한과 라오그뉴, 그리고 아르텔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