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위망 붕괴 -3- >
라오그뉴가 용기사의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이거 긴장 되는데?]
[라오그뉴님도 긴장할 줄 아세요?]
[그럼 나라고 항상 배짱부리는 줄 알아?]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공격은 제가 직접 받아낼 테니까 시선만 좀 분산시켜 주시면 됩니다.]
[전 기계 괴수가 움직이는 걸 방해하면 되죠?]
[예.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셋은 즉석에서 기계 괴수를 상대하기 위한 교감을 나눴다.
수한의 눈에 기계 괴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방금 상대했던 기계 괴수와 한 틀에서 찍어낸 듯 똑같이 생겼다.
용기사가 입을 벌렸다.
뇌룡 숨결은 쓰지 않았다. 대신 마비 속성을 중첩시키고 중화 속성을 조합하여 쏘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방어막이 중화되어 빛줄기가 기계 괴수를 강타했다. 맹렬하게 달려오던 기계 괴수가 덜커덕 멈춰 섰다.
주포로 쏴서 그런지 마비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마비가 풀린 다음에도 기계 괴수는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멀리서 대치하면서 광선포나 몇 방 쏘고 미사일만 몇 개 날렸다.
그 사이, 라엘라는 적극적으로 기계 괴수에게 달려들었다.
세계검을 휘두르며 날렵하게 움직였다. 덩치가 큰 기계 괴수로서는 쉽게 당해내기가 힘들었다. 기껏 무기를 휘둘러도 죄다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세라프 종족과 미르 공격대의 협동 공격이 기계 괴수의 방어막을 차곡차곡 벗겨냈다. 시간이 지나면 무난하게 사냥에 성공할 것 같았다.
“부우우욱!”
“부욱! 부욱!”
기계 괴수들이 꼭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길게 소리를 질렀다.
그와 함께 대치중이던 기계 괴수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주포를 꺼내 겨누는가 하면, 손에 든 무기들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제 시작이다.
수한은 용기사의 몸을 낮추며 기계 괴수를 노려보았다.
라오그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은신해 있다가 뒤를 노리겠다는 의도가 무한 의식을 통해 전해졌다.
용기사를 천천히 전진시켰다.
입을 벌린 채 주포를 겨누었다. 기계 괴수도 용기사에게 주포를 겨냥한 채 접근해 왔다.
서로의 주포가 서로를 조준하고 있었다.
타는 듯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수한은 눈을 부릅뜨고 기계 괴수를 노려보았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주포 끝이 동력핵이 있는 가슴이 아니라, 수한이 타고 있는 머리 부분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를 낮췄다.
그러자 기계 괴수가 주포 각도를 미미하게 조절했다. 주포의 일직선 끝에, 여전히 용기사의 머리 부분이 걸렸다.
자칫 한 방을 허용하면 본인이 위험해진다.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철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1킬로미터, 8백 미터, 5백 미터, 3백 미터.
이윽고 백 미터.
약속이나 한 듯, 둘은 서로를 보고 정지했다.
눈이 마주쳤다.
용기사의 황금색 눈과, 기계 괴수의 청색 눈이 상대를 으스러뜨릴 듯 강렬하게 빛났다.
어느 순간 땅을 박찼다.
고층 건물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존재들이, 서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꽈앙!
천둥이 울렸다.
강철이 찢어지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맹렬한 충격에, 수한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 했다. 겨우 정신을 다잡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반면 기계 괴수는 몸을 한 번 움찔했을 뿐 멀쩡했다. 오히려 기세를 올리며 용기사에게 돌진해 왔다.
다리가 많으니 안정적이고, 무게도 훨씬 무거우니 이런 맞대결에선 유리했던 것이다.
수한은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용기사를 조종했다.
몸을 뒤로 눕혔다.
철퇴 따위 그냥 놔 버렸다.
두 손으로 기계 괴수의 상체를 붙잡았다. 하체에 힘을 주었다. 만세 부르듯 두 팔을 높이 치켜들며, 기계 괴수를 위쪽으로 던졌다.
기계 괴수가 덤벼들던 힘을 역이용한 기술.
그 거대한 덩치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용기사가 몸을 회전시켰다. 풍차 돌리듯 팔을 돌리며 기계 괴수를 냅다 대지에 내리꽂았다.
꽝!
또 한 번 폭음이 울렸다.
기계 괴수가 발버둥을 쳤다. 그 서슬에 기계 괴수의 다리 하나가 강하게 용기사를 때렸다. 강렬한 충격에 용기사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수한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거신 강림을 구현할 수 있으면 좋은데 오래 지속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잘못하면 발현 즉시 탈진하여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차선을 택해야겠지.
철퇴를 집어 들었다.
화신을 발현했다.
용기사의 몸 전체에서 웅장한 황동색 빛이 일어났다.
기계 괴수가 오뚜기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 탄력을 이용해 용기사를 들이받았다.
수한은 용기사를 정교하게 조작했다. 극초음속을 발현하면서 옆 방향으로 발을 놀렸다. 용기사가 반 바퀴 돌면서 기계 괴수의 돌진을 간신히 피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피했다 싶은 순간 기계 괴수의 팔이 날아왔다.
광선검이 불을 뿜듯 시퍼런 광채를 잔뜩 뿌리고 있었다.
상체를 뒤로 눕혔다.
광선검이 아슬아슬하게 머리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틀었다.
철퇴를 쥔 오른손을 뒤로 당겼다. 왼쪽으로 몸을 회전시키면서 그대로 철퇴를 올려쳤다. 천지개벽 초능이 발현되며, 철퇴에 어린 청색 광채가 파멸적인 적색으로 바뀌었다.
철퇴가 정확히 기계 괴수의 몸통을 직격했다.
뻐억!
방어막을 부수고, 금속 장갑을 뒤흔들었다.
내부 분쇄에 특화된 파멸의 철퇴.
아무리 그래도 일격에 어쩔 수는 없었다. 기계 괴수가 수한이 공격한 쪽에 있는 팔로 반격을 가했다.
시퍼런 광구가 날아오고, 광선창이 독사 같은 어금니를 들이댔다.
수한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공격을 일일이 피했다.
몸을 돌리고, 뒷걸음질치고, 안 되겠으면 철퇴를 이용하여 걷어냈다.
한편으로는 광선포를 쏘아 마비 속성을 걸었다. 그러자 기계 괴수의 몸놀림이 확연히 둔해져서, 좀 더 쉽게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크아앙!]
갑자기 라오그뉴가 뛰쳐나왔다.
기계 괴수의 시선이 온통 용기사에게 집중된 틈을 노린 것이다.
나타날 때는 작은 고양이 형체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본체로 돌아갔다. 기계 괴수나 용기사에 비하면 작아도, 충분히 커다란 사자가 기계 괴수를 공격했다.
기계 괴수가 급히 대응했다.
라오그뉴가 달려드는 방향의 무기를 휘둘렀다. 광선포를 꺼내 쏘았다. 화염도 뿌리면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라오그뉴는 허공을 달리며 그 공격을 모조리 피했다. 티끌만한 틈이라도 있으면 비집고 들어갔다. 몇 번 공격을 허용하면서 상처를 입었지만, 그 정도는 가뿐히 무시했다.
마침내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연타가 들어갔다.
소나기 같은 연격이 기계 괴수의 전신을 무차별적으로 두들겼다.
“부우우우!”
기계 괴수가 성이 나 팔을 휘젓지만, 그걸 맞추기에는 라오그뉴의 움직임이 너무나 빨랐다.
결국 시꺼먼 연기를 뿜어 접근을 막으려고 했다.
그때, 아르텔라가 개입했다.
두 손을 펼치자 손 안에서 회색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그 연기가 용의 형상을 갖추더니, 허공을 질주하여 라오그뉴의 몸을 덮었다.
소환수가 라오그뉴를 보호했다. 일정 공간을 장악하고 검은 연기를 밀어내는 것이다.
라오그뉴가 사태를 파악하고 더욱 거세게 공격을 퍼부었다.
무지갯빛 섬광이 펑펑 터졌다.
그렇다고 라오그뉴에게 전념할 수도 없었다. 용기사가 반대쪽에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수한은 파멸의 철퇴를 연거푸 내리찍었다. 기계 괴수도 손에 든 무기를 이용해 계속 막아냈다.
무기는 기계 괴수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용기사는 천지개벽과 극초음속을 쓰고 있어 한 방 한 방의 위력이 크고 다음번 공격도 더 빠르게 가했다. 결국 막상막하의 접전이 벌어졌다.
수한은 쉬지 않고 철퇴를 내리쳤다.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면 대결로는 용기사가 기계 괴수에게 한수 접어줘야 했던 것이다.
상관없는 일이다.
수한은 치명적인 일격만 허용하지 않으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기계 괴수가 노호하며 용기사를 덮쳤다.
지근거리에서 덮친 거였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기계 괴수가 용기사를 깔아뭉갰다.
라오그뉴가 다급히 움직였지만, 수한은 오히려 무한 의식으로 제지했다.
[전 괜찮습니다. 거기서 벗어나세요!]
동시에 용기사의 입을 벌렸다.
이미 주포가 회전하며 돌출되고 있었다.
수한의 몸에서 두 가지 힘이 폭발하듯 분출되었다. 장갑에서도 두 가지 힘이 나오고, 네 개의 힘이 곧 뒤섞였다.
주포가 격렬하게 벼락을 토해냈다.
코앞에서 쏘아진 뇌룡 숨결.
기계 괴수는 피하지 못하고 그 공격을 뒤집어썼다. 직격 당한 부위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간신히 공격을 피한 라오그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 나도 맞을 뻔 했잖아!]
하지만 위기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용기사는 기계 괴수 밑에 깔려 있었다.
기계 괴수가 팔을 하나 높이 치켜들었다.
수한은 눈을 부릅떴다.
손끝에 파멸의 철퇴가 들려 있었다. 철퇴에 어린 청색 기운이 확연히 짙어졌다.
저게 머리를 강타한다면 용기사는 견뎌도 수한은 견딜 수 없다.
방어막을 강화했다. 화신을 더욱 강하게 발현했다. 그러는 한편 왼팔을 들어 앞을 가렸다.
철퇴가 떨어졌다.
종말을 선언하는 네 천사처럼, 단호하게 죽음을 결정했다.
꽈앙!
철퇴가 용기사의 왼팔을 타격했다.
왼팔이 부러졌다.
대신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철퇴의 힘이 완전히 죽고, 용기사의 얼굴 앞에 철퇴가 정지했다.
기계 괴수가 철퇴를 들어올렸다.
청색의 광채가 짙게 어렸다. 그것도 잠시, 또 폭격하듯 용기사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이번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철퇴가 용기사의 머리를 직격했다.
머리가 부서졌다.
완전히 으깨져 속으로 움푹 들어갔다. 언뜻 보기에도 그 안에 탑승한 사람이 살아있기는 힘들 것 같았다.
[아악, 오빠!]
새미가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용기사의 머리에서 튀어나왔다.
용기사를 그대로 축소한 것처럼 생긴 한 남자.
다름 아닌 수한이었다.
그 짧은 순간 결단을 내리고 용이의 융합을 풀게 한 후, 용갑으로 변형시켜 착용했다. 그리고 다차원 조작 신발의 능력으로 공격을 피하며 뛰쳐나온 것이다.
기계 괴수의 공격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모조리 피했다.
크기가 훨씬 차이가 나니 피하는 게 무척 쉬웠다.
기계 괴수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 폭격하듯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각종 속성이 중첩되고 조합된 채 기계 괴수를 두들겼다.
수한은 기계 괴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잡힐 것 같으면 뇌룡 질주를 사용했다. 그러면 수한의 몸이 번개 덩어리로 변하여 속도가 훨씬 더 빨라졌다. 관성을 무시하듯 지그재그로 비행하니, 둔한 기계 괴수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라오그뉴에게 전념하기도 힘들었다.
라오그뉴도 수한에 못지않게 잽싸고, 걸핏하면 수한이 눈앞을 날아다니며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결국 황금 같은 시간을 모두 소모해 버렸다.
[훌륭하다!]
라엘라가 날아왔다.
수한은 급히 몸을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라엘라를 비롯한 세라프들이 차례차례 수한을 지나쳤다.
다른 기계 괴수는 이미 결딴이 난 상태였다. 동력핵이 뽑히고, 팔과 다리가 죄다 잘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세라프들이 강하게 기계 괴수를 몰아붙였다.
기계 괴수가 단번에 수세에 몰렸다.
정상적인 상태였을 때도 라엘라 하나와 백중세를 이룰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떼로 몰려오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차츰차츰 여기저기가 망가지며 금속 장갑이 벗겨졌다.
결국 라엘라에 의해 동력핵이 뽑혀 나왔다.
기계 괴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로 쓰러졌다.
수한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