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신의 성지 -2- >
세라프들이 밖을 내다보다가 말했다.
[너무 거리가 멉니다. 접근해야겠습니다.]
[그랬다가 제국인들에게 탐지당할 지도 모릅니다. 제국은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 있어요.]
[감수해야지요.]
[저, 방법이 있어요.]
대화를 나누는 중 아르텔라가 끼어들었다.
[무슨 방법입니까?]
[저들은 클로아님의 성지에 들어와 있어요. 클로아님의 시선을 통해 저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게 가능해요.]
간단한 얘기였다.
아르텔라는 용신 클로아의 무녀.
성지 근처에서라면 클로아의 힘을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 힘을 이용, 은밀하게 제국인의 상황을 살피고 수한의 무한 의식을 통해 공유하자는 것이다.
제국인들이 그 기색을 느낀다고 해도, 자신들을 보는 게 용신 클로아일 거라고만 생각할 테니까.
라엘라가 찬성을 했다.
[좋다. 그렇게 해보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르텔라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문득,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발 밑.
저 산 아래에 웅크린 어떤 존재가, 아르텔라를 통해 수한과 연결된 것이다.
[……]
어떤 거대한 울림이 수한의 정신으로 파고들었다.
뜻을 알 수가 없다.
뭔가 호소하는 듯하고, 부르짖는 듯하고, 한탄하는 듯한데, 그 주체가 너무 거대하여 인간의 정신으로는 그 뜻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세라프들도 그런 모양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당신이 클로아입니까?]
수한이 그런 질문을 던져보지만, 망망대해에 돌을 던진 듯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
당황스러워 하는 것과 별개로, 아르텔라가 그 존재의 의식을 이끌었다. 기계용 안의 일행이 아닌, 신전 안과 신전 주변을 동시에 살폈다.
보였다.
어떤 존재가 들어와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뭘 하고자 하는지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다.
어디 그 뿐이랴.
벽을 기어가는 벌레 한 마리, 음습한 곳에 자리 잡은 이끼 조금, 심지어 대지에 새겨진 기억까지 읽어내는 게 가능했다.
라오그뉴가 혼란스러워했다.
[뭐, 뭐야? 이게 신이라고? 말도 안 돼! 하늘신 제온님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 광대함에 전율하면서도, 수한은 냉정하게 얻은 정보를 살폈다.
제국인으로 추정되는 이족보행 생명체는 정확히 네 명.
밖에 있는 은색 구조물의 수와 같았다.
한 명 한 명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옷에서 나오는 파장 때문에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왼쪽 손목에 깃든 힘을 느끼는 것은 가능했다.
제국의 무기, 레벨 업 도우미.
네 명 다 비슷한 느낌의 레벨 업 도우미를 가지고 있었다. 1명은 여섯 종류의 힘이 한꺼번에 느껴졌고, 다른 이들은 네 종류의 힘이 느껴졌다.
6익급 1명, 4익급 3명.
이 정도면 해볼 만 하다.
수한이 가진 것은 8익급이니까. 더구나 라엘라까지 있지 않나.
라엘라가 조용히 정신 감응을 보냈다.
[제가 6익급을 맡겠습니다.]
[그럼 저는 4익급들을 맡지요.]
[나도 1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어!]
수한과 라오그뉴, 새미, 라엘라와 적색 날개 세라프 둘만 먼저 공격을 나서기로 했다.
다른 세라프들은 매복.
혹시 제국인들이 도망치면 요격하여 잡기로 한 것이다. 케루아 시에서 지원군이 오면 그것을 막는 역할도 수행하고.
모두 조심스럽게 기계용에서 빠져나왔다. 구름 속에 몸을 숨긴 채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라오그뉴도 이제는 비행 기능이 있는 장비가 있어 가볍게 몸을 날렸다.
수한은 심호흡을 했다.
아르텔라를 통해 신전을 부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뒤였다. 선제 공격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시작은 뇌룡 숨결부터.
기습적으로 힘을 끌어올렸다.
돌출된 주포에 맹렬한 힘이 어렸다. 그 힘이 스스로 증폭되며 거대한 벼락으로 화했다.
신전 안의 제국인들이 금방 상황을 눈치챘다.
즉시 공간을 뛰어넘었다. 밖으로 나오더니, 수한이 벼락을 뿜기 전 은색 구 안으로 스며들었다.
번쩍!
번개의 용이 대기를 가르며 쏟아졌다.
제국인들이 한 발 더 빨랐다.
은색 구 네 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새떼가 흩어지듯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결국 뇌룡 숨결은 덧없이 신전만 무너뜨리고 말았다.
쌔액!
은색 구들이 방향을 바꾸어 기계용을 향해 날아왔다.
방향 전환이 자유롭고, 속도가 매우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다.
일제히 황동색 빛을 뿜었다. 아울러 희미한 아지랑이가 일렁이며 이동 속도가 배로 빨라졌다.
그것을 본 수한의 눈이 커졌다.
강체 계열과 신속 계열 이능, 아니 초능이었다. 저대로 달려들어 기계용을 강타하기만 해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은색 구들과 싸우기에는 기계용의 덩치가 너무 크고, 움직임이 너무 둔중하다.
수한은 결단을 내렸다.
신발이 언뜻 회색빛을 뿌렸다. 다음 순간, 수한의 모습이 사라지며 수십 미터 바깥에서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은색 구 네 개가 기계용을 강하게 때렸다.
꽈앙!
폭음이 울렸다.
맞은 부위가 산산조각 났다. 앞다리가 하나 날아가고, 배가 움푹 들어갔다. 등도 얻어맞아 날개가 처참하게 부숴졌다.
수한이 예상했던 것보다 피해가 컸다. 거신 강림이나 천지돌파로 맞받아쳤으면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융합을 푼 용이가 빠르게 날아왔다. 공중에서 용갑으로 변형되며, 수한의 전신에 부착되었다. 이젠 둘 다 익숙해져서 눈 깜짝할 사이에 착용이 끝났다.
은색 구들이 수한을 쫓아왔다.
지독하게 빨랐다. 성좌와 극초음속을 동시에 사용해도 따돌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뇌룡 질주를 사용했다. 수한의 몸이 번개로 변하며 수직으로 솟구쳤다. 은색 구들이 수한을 쫓아왔지만, 뇌룡 질주 상태에서는 아주 약간 수한이 더 빨랐다.
[이놈들!]
라엘라가 세계검을 겨누고 달려들었다.
신속 계열 이능을 극도로 발휘하고 있었다. 날개에 깃든 힘까지 발현되니, 은색 구 하나를 금방 따라잡았다.
세계검이 은색 구에 꽂히기 직전, 은색 구의 표면에 칼날 같은 가시들이 돋아났다. 가시마다 적색 빛이 어리며 맹렬한 힘이 분출되었다.
그 상태에서 은색 구가 핑그르르 돌았다. 구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 위에 세계검이 틀어박혔다.
막혔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이건만, 방어를 뚫기는커녕 라엘라가 튕겨져 나가며 피를 토했다.
라엘라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은 은색 구를 노려보았다.
[6익급이로구나.]
최소한 6개의 SS급 초능을 가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라엘라로서도 쉽게 볼 수 없다. 당장 수한만 해도 용기사를 타고 조합 기술을 사용하면 짧은 순간이나마 라엘라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으니까.
라엘라가 고함을 지르며 돌진했다.
[더러운 제국 놈들! 끝장을 내주마!]
라엘라의 전신이 붉게 달아올랐다. 흡사 몸이 화염으로 변해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핏빛으로 변한 구가 회전하며 라엘라를 덮쳤다. 속도는 줄었지만 파괴력은 더 강해졌다. 라엘라와 어우러지며 불꽃 튀는 혈전이 벌어졌다.
그 사이, 수한은 다른 은색 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확실히 4익급은 6익급보다 속도가 느렸다. 뇌룡 질주를 가끔 발현하는 것만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자 은색 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방으로 흩어져 수한을 포위하려고 했다. 붉은 날개 세라프 둘이 적시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수한도 위험했을 것이다.
수한은 자신을 쫓아오는 은색 구에게 아바돈과 공허 포식자, 별빛 폭격을 난사했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 마비 속성을 중첩한 참이었다.
하지만 속도가 줄다가도 은색 구들이 흰색 빛을 뿌리면 다시 속도가 올라갔다. 의지 계열 초능으로 마비를 푸는 것 같았다. 세 개의 은색 구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보며, 수한은 은색 구 안의 제국인들이 무슨 초능을 가지고 있는지 헤아렸다.
‘강체, 신속, 의지, 정신 계열이겠구나.’
그리고 라엘라가 상대하는 6익급은 거력 계열과 1개의 초능을 더 가지고 있겠지.
참 곤란했다.
강체 계열과 의지 계열을 다 갖고 있으면 어떤 상황이든 방어가 가능했다. 무장이 부실하다는 게 단점인데, 육탄 공격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했다.
‘아!’
문득, 수한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 은색 구가 제국의 전투 병기일까?
그럴 리가 없다.
전투 병기라면 뭔가 무장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수한처럼 속성 부여를 사용하면 무서운 공격을 퍼부울 수 있을 텐데.
어쩌면 개인용 교통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런 수한의 생각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몇 번 부딪친 은색 구들이 일제히 방향을 돌렸다.
케루아 시 방향.
쉽게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도주하는 것이다.
라엘라가 소리 높여 외쳤다.
[막아!]
대기하고 있던 세라프들이 나섰다.
은밀히 힘을 모으고 있다가 단번에 후려쳤다. 강렬한 섬광이 터지며 은색 구를 연거푸 때렸다.
직접적인 공격 말고도 속박 관련 이능이 비처럼 쏟아졌다. 은색 구들이 일제히 황동색과 흰색의 빛을 뿜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움직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수한은 은색 구 중 하나에 유도 속성을 걸었다. 방금 전까진 의지 계열 초능으로 해제해 버렸는데, 세라프들의 합동 공격에 조금 늦게 해제하고 있었다.
새미가 손을 떨쳤다.
어느새 먹구름이 주변에 자욱하게 몰려 있었다. 거기서 벼락이 무수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세라프 종족의 공격도 영향을 받았다. 무한 의식으로 상황을 전달 받은 라엘라가 검을 던졌다. 검이 무섭게 회전하며 하얗게 빛나는 구를 향해 날아갔다.
그 모든 공격이 집중되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반항하듯 황동색과 흰색 광채가 뿜어졌지만 결국 뚫리고 말았다. 세계검이 가장 먼저 파고들며 구 안의 모든 것을 박살내 버렸다.
다른 은색 구들이 움찔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움직였다.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려고 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세라프들이 속박하는 힘을 더욱 강화시켰다.
은색 구들이 안간힘을 썼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개중 6익급이 탄 은색 구가 가장 심했다.
표면이 한 꺼풀 벗겨지더니 긴 채찍 같은 것을 만들었다. 채찍에 흰색 빛이 어리더니, 날카롭게 휘둘러 집중된 속박의 힘을 일일이 잘라냈다. 그 다음 움직이기 시작하자, 더 이상은 붙들 수가 없었다.
라엘라가 은색 구를 추격했다.
[세라프의 전당을 폭파하면 놈도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빨리 쫓아와라.]
[알겠습니다.]
수한은 차근차근 은색 구를 공략했다.
마비 속성을 쏘면서, 한 편으로는 유도 속성을 걸었다. 그러면 은색 구에서 흰 빛이 일어나 두 속성을 해제했다.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제국의 전력은 역시 강했다. 겨우 둘을 상대하는 것인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 번은 육탄 공격에 세라프 하나가 당해 반죽음 상태가 되었다.
[크앙!]
라오그뉴가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한 덕에 끝이 났다. 은색 구 하나에 매달려 연타를 먹이자 방어막과 두 초능을 박살낼 수 있었다.
강해 보이던 은색 구의 허점.
일단 달라붙으면 반격하기가 어려웠다. 어딘가에 세게 부딪혀 쥐포로 만드는 수밖에 없는데, 하늘 위에선 그것도 어려웠고.
[먼저 가겠습니다.]
[같이 가!]
수한이 먼저 몸을 날렸다.
라엘라가 걱정되었다. SSS급 이능력자이니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금세 케루아 시에 도착했다.
라엘라가 집중 공격을 당하는 것이 보였다.
케루아 시에 있던 기계 괴수들이 라엘라를 향해 광선포와 미사일을 쏘아올렸다. 은색 구도 여전히 하늘을 날며 라엘라를 압박했다.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세계검을 날려 세라프의 전당을 폭파시킨 뒤였다. 은빛 기둥만 몇 개 남아 있었다. 은색 구에 탄 제국인도 탈출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라엘라님!]
[오, 왔구나!]
수한이 도착하자 라엘라가 반색했다.
은색 구에 언뜻 옅은 금색이 어렸다. 그 빛이 수한이 있는 쪽으로 뻗어나오더니, 뒤에서 줄줄이 날아오는 세라프 종족과 새미, 라오그뉴를 포착했다.
투시 계열 초능.
아무리 기계 괴수의 지원을 받아도 혼자 상대하기는 힘든 전력이다.
은색 구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
기계 괴수들이 공격하는 것을 무시하고, 라엘라가 은색 구를 쫓기 시작했다.
은색 구가 속도를 높였다.
기계 괴수들이 공격하는 탓에 라엘라가 조금 더 느렸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거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천금과도 같은 시간.
은색 구의 표면에서 청색 빛이 흘러나왔다. 청색 빛은 마치 안개처럼 흩어지며 은색 구 전체를 감쌌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꽈배기처럼 왜곡되며, 원근감이 이지러져 은색 구가 저 멀리 있는 것처럼 작아졌다.
청색 빛이 왜곡된 공간을 감쌌다.
다음 순간, 시퍼런 광채가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수한은 눈을 부릅 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청색 광채가 터지면서 커다란 청색의 원이 생겼다. 은색 구가 속도를 올리며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언제 그랬냐 싶게 청색 원이 사라져 버렸다.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제국의 차원문.
은색 구는 다른 구조물의 도움이 없이도 차원문을 생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