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00화 (201/254)

< 클로아 [8권 끝] >

그렇게 6익급 무기를 가진 제국인을 놓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제국인들을 잡은 것으로 만족해야지. 비록 생포하지는 못했지만, 온전한 시체를 확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합류한 이들과 함께 기계 괴수를 사냥했다.

어렵지 않았다.

전력에서 훨씬 더 우세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몽땅 동력핵을 도려냈다.

한 군데 모여 뒤처리를 했다.

[큰일입니다. 제국인들이 목격되는 게 빈번해지는 것 같습니다.]

수한의 말에 라엘라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수확이라는 단어가 들려오고 있다.]

[수확이라…… 확실히 좋은 어감은 아닙니다.]

[최소한 제국의 대규모 공세가 목전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전에 최대한 준비를 해야겠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도 감당하기 힘든데 여기서 더 공세가 강해진다고?

방금 봤던 은색 구는 단순한 개인용 차원 도약 수단이었다. 그런 것들한테 기계용이 순식간에 찢어졌는데, 진짜 전투 병기들이 나타나면 어느 정도 위력을 보일지 상상이 안 된다.

[은색 구는 우리가 가져가겠다.]

라엘라가 통보하듯 말했다.

대신 원래 가져가기로 했던 거대 기계 괴수의 동력핵은 미르 공격대를 준다고 했다. 앞으로 잡을 기계 괴수도 마찬가지였다.

나쁜 소리는 아니었다. 미르 공격대가 은색 구를 가져가도, 연구할 인력과 기술이 부족하니까.

[셋 중 하나만 저희에게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 레벨 업 도우미와 상성을 보고 싶습니다.]

[아, 그런 문제가 있구나.]

방금 전투를 벌였던 제국인들은 복색이나 레벨 업 도우미를 볼 때 칼라트라 소속인 듯했다.

그렇다면 수한이 충분히 은색 구를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한의 지적에 라엘라가 생각을 못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 결과를 공유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해준다면 은색 구 중 하나는 그대들에게 넘기도록 하겠다. 우리가 연구한 결과도 공유하도록 하지.]

[좋습니다.]

미르 공격대로서는 최상의 조건.

수한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용을 수리한 후, 은색 구를 수습했다. 작동은 나중에 시켜보기로 하고 다른 기계 괴수도 확보했다.

라엘라가 한 가지 의견을 냈다.

[세라프의 전당을 재건하는 게 어떠냐? 그대도 알겠지만, 대형 기계 괴수 한 마리면 전당을 재건할 수 있다.]

[좋습니다. 저것들 가지고 드라코 시로 돌아가느니, 그게 여러모로 좋겠지요.]

[하루 정도 걸릴 겁니다.]

그 사이 용신의 성지를 다녀오기로 했다.

라엘라는와 미르 공격대만 용신의 성지로 향했다. 다른 세라프들은 전당 재건에 매달렸다.

수한, 새미, 라오그뉴, 아르텔라, 이렇게만.

아르텔라가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질라 행성이 기계 괴수들에게 공격당하기 전만 해도 아르텔라는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온 격이니 흥분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기계용이 신전 폐허 앞에 내려앉았다.

아르텔라의 얼굴이 흐려졌지만, 이내 얼굴을 펴고 기계용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한도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기계용 밖으로 나갔다.

새미가 수한에게 속삭였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성지 전체에서 언뜻 희미한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까 아르텔라를 통해 느꼈던 존재.

용신 클로아.

그가 성지를 방문한 이들을 주시하는 듯했다.

아르텔라가 손짓을 했다.

“이쪽이에요!”

신전 안으로 들어가자는 거였다.

크게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 있었다. 대부분 무너져 내렸지만,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는 온전했다. 제국인들이 치워놓은 모양이었다.

지하로 들어갔다.

제법 넓었다. 관리가 잘 되고 있었는지 공기도 쾌적했다.

동시에 클로아의 존재감도 더욱 강해졌다. 이젠 이능력자가 아니라 일반인이 와도 그걸 느낄 정도가 되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성지 가장 깊은 곳, 클로아님의 화신이 머무는 곳으로 가요.”

클로아의 화신?

그런 게 있었나?

수한은 잠자코 아르텔라의 뒤를 따랐다.

라엘라도 주변이 생소한 모양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없이 걷기만 했다.

복도를 따라 한참 동안 걸었다. 그러자 커다란 석실이 하나 나왔다.

석실 중앙, 거대한 석상이 하나 보였다.

서양에서 말하는 드래곤 형태.

도마뱀을 닮은 몸통에, 날개를 한 쌍 가지고 있었다. 주둥이는 길쭉하고 어금니가 입 밖으로 돌출되었다. 머리에는 뿔이 달렸고, 몸통에는 우둘투둘한 비늘이 빼곡했다.

특이한 점은, 묘하게 기계와 생체가 섞인 듯한 모습이라는 점. 벌린 입 속의 둥근 혀가 꼭 광선포를 빼닮았다. 부릅뜬 눈도 파충류의 눈보다는 카메라 렌즈에 더 가까웠다.

꼭 아르텔라의 사무실에 놔둔 신상을 보는 듯했다.

[나랑 닮았어!]

잠자코 걷고 있던 용이가 날개를 퍼덕였다.

수한은 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석상이 온전하지 않았다. 머리와 가슴이 있는 앞쪽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꼬리 부분부터는 누가 망가뜨린 것이다.

뭔가 싶어 보니 석상 안쪽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지하로 내려가는 구멍.

그것을 확인한 아르텔라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 간악한 자들이 여기까지……”

아르텔라가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다.

좁은 복도가 나왔다.

조명이 없는지 칠흑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시야를 확보할 방법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렬로 서서 지하를 향해 내려갔다.

이번에는 무척 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대한 공동.

아까 석상이 있던 석실과는 규모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수백 배는 더 커서, 지구의 야구 경기장 한두 개는 충분히 들어올 것 같았다.

공동 가운데, 구조물이 하나 보였다.

구 형태.

계란처럼 매끈하진 않았다. 울룩불룩했다. 여기가 튀어나와 있나 하면 저기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거칠거칠하게 각이 져 있는데, 은은한 빛이 구조물 전체에서 새어나왔다.

수한은 그 구조물을 보고 어떤 물건을 연상했다.

기계 괴수의 동력핵.

크기가 훨씬 더 크고, 좀 더 울퉁불퉁하다는 것 말고는 매우 비슷했다. 심지어 뿜어져 나오는 광채도 동력핵과 비슷해 보였다.

아르텔라가 그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클로아님의 화신께서는 무사하세요!”

저게 화신이라고?

아르텔라가 일행을 심장 가까이 인도했다.

그러자 천장과 바닥에서 희뿌연 빛이 일어났다. 일행을 위협하듯 다가오는데, 아르텔라가 주문을 외우며 손을 휘젓자 금방 사그라졌다.

아르텔라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어요. 그래도 마지막 방어진은 살아 있네요.”

“이게 마지막이었다고요?”

“네. 클로아님의 유해를 노리고 덤벼드는 악령과 악마가 많아서 계속 방어진을 설치했거든요. 클로아님의 힘을 직접 쓰는 방어진이라서 지금까지 버틴 것 같아요.”

구조물을 향해 다가갔다.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빛을 뿌리는 것 말고는 아무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아르텔라가 거기에 손을 가져다댔다.

구조물에 어린 빛이 강해졌다.

더불어 존재감도 더욱 상승했다. 무한 의식으로 연결했을 때처럼 진하게 느껴지더니, 개중 어떤 존재가 부상했다.

[누가 나를 찾느냐?]

위엄 있는 울림이 일행의 머리로 동시에 파고들었다.

여전히 거대하지만, 당초 접했던 것처럼 인식을 초월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아까의 그것이 눈부신 태양이어서 마주 볼 수가 없다면, 이것은 보름달 정도 될까.

그 존재의 의식이 아르텔라를 주목했다.

[오, 내 딸이로구나. 침략자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셋은 죽이고, 하나는 쫓아냈습니다.]

[잘 했다. 실로 두려운 자들이었어. 본신을 잃은 나로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존재가 말을 할 때마다 구조물에 빛이 깜빡였다.

아르텔라와 적당히 얘기를 나눈 후, 이번에는 용이를 살폈다.

용이를 보자마자, 충격적인 한 마디를 내뱉는다.

[네가 새로운 용신이냐?]

뭐라고?

수한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잘못 인식했나하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용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말이야? 나 용신 아닌데?]

[아직은 모를 것이다. 때가 되지 않았으니까. 수확의 때를 지난 다음에야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겠지. 부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만……]

사뭇 의미심장한 말.

수한이 나서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만 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만 했다.

용이까지 본 후, 마지막으로 라엘라를 주시했다.

[핏빛 날개 라엘라?]

[날 아나?]

라엘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씁쓸한 감정이 존재에게서 전해졌다.

[알다마다. 그대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뒷모습?

꼭 과거에 라엘라를 만났던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궁금할 만도 한데, 라엘라는 굳이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만 황금색 눈을 빛내며 클로아를 훑어보았다.

투시 계열 이능으로 뭔가를 확인하는 것.

클로아는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내면을 모두 개방한 채,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내 아이들을 학살한 침략자들을 모두 죽이고 돌아와라. 너희에게 줄 것이 있다.]

[줄 것이요?]

[그렇다. 그 아득한 세월을 넘어, 드디어 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겠구나……]

그 말을 끝으로, 구조물에 어린 빛이 꺼졌다.

아르텔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신께서 잠드셨습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야 깨어나실 겁니다.”

“침략자들이라면, 뭘 말하는 겁니까?”

“기계 괴수들이요.”

“모두 죽여야 한다고 했으니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수한은 구조물을 흘깃 쳐다보았다.

새로운 용신이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느니 한 것을 보면 보통 물건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튜니에가 언급했던 물건 중 신의 심장을 줄지도 몰랐다.

수한은 용이를 살폈다.

설마 나중에는 이 녀석이 새로운 용신이 되는 걸까?

이상한 것 투성이였다.

용신 클로에의 정체도 그렇고, 저 구조물도 그렇다. 아무리 봐도 생명체의 장기는 아닌 것 같고, 기계 괴수의 동력핵을 닮았지 않나.

혹시 용신 클로아도 용이처럼 기계용이었던 걸까?

그런 질문을 던지자, 아르텔라가 용신 클로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클로아님께서 우리 세계에 도래한 것은 수만 년 전이라고 해요.”

내용 자체는 일반적인 신화와 별다를 게 없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야만적인 세계에 신이 내려왔고, 그 신에 의해 지성 종족이 출현하고 문명이 설립되었다는 내용.

그 가운데 수한의 주의를 끈 것은, 클로아가 강철의 신체와 보석 눈동자를 가졌다는 대목이었다. 특히 태고의 괴수들을 입에서 빛을 뿜어 징치했다는 대목에서, 한 가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클로아는 기계용이었습니까?”

많은 의미를 함축한 물음.

아르텔라가 수한의 눈을 마주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몰랐지만,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알고 있는 클로아님과 용이님의 특징이 많은 점에서 비슷해요.”

“이상하네요. 클로아는 아르텔라님의 선조라고 들었는데요.”

“그건 맞아요. 저희 기미크 종족은 클로아님이 도래하시기 전에는 이 세계에 없었던 종족이거든요. 느주브 반도의 뒬르 종족이나 샤카 군도의 뒤렝 종족은 원래부터 있었지만요.”

이거야 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조용히 듣고 있던 라엘라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게 있다.]

[뭡니까?]

[믿기 힘든 내용일 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요.]

[알겠다. 내가 살펴본 결과, 클로아는 마법 생명체이고 우리 종족에 의해 만들어졌다.]

[예?]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수한은 라엘라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클로아를 세라프 종족이 만들었다고?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정말로 그랬다면 수한도 진작 알았을 것이다.

라엘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클로아에게 진리의 빛 마법 서명이 남아 있었다. 학술원 인증도 붙어 있었고.]

[진리의 빛이요? 그럼 튜니에님이 클로아를 만든 겁니까?]

[클로아만 따지고 보면 그렇다. 그런데 분명히 진리의 빛께서 클로아 같은 존재를 만든 적은 없으니 그게 이상하다는 거다. 더구나 클로아는 Ex 등급을 벗어난 존재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거지.]

모든 것이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라엘라가 조사한 게 맞는다면, 그게 의미하는 사실은 자명했다.

어떤 식으로든 시간축이 뒤틀어져 있다는 것.

‘설마 순환되는 것은 아니겠지?’

개마고원에서 레벨 업 도우미를 얻고, 알바트로스와 타이탄을 거쳐 미르 공격대를 창설한 이 모든 게 한낱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그런 다음 처음부터 시작?

설마 제국의 기술력이 거기까지 갔을까 싶었다. 그런 게 가능하면 우주제국 정도가 아니라, 신들의 집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르겠다.

일단은 기계 괴수들부터 잡아야겠다.

그러고 난 다음 대화를 나누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그렇게 얻은 정보가 나중에는 등대 역할을 할 터.

몸을 돌려 신전 밖으로 나갔다.

[8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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