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01화 (202/254)

< 시공 분열 >

아까 내려왔던 통로를 거쳐 돌아 나왔다.

기계용에 탑승하려는데, 아르텔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장님, 이 행성에 있는 동안 전 여기에 남아 있어도 될까요? 신전을 복구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세요.”

수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누군가는 남아 성지를 지켜야 했다. 성지 지하에 있는 방어진도 복구해야 하니, 아르텔라가 남는 게 가장 좋았다.

하루가 지나자 세라프의 전당이 재건되었다.

소식을 들은 시규가 세라프의 전당을 통해 용신의 성지에 도착했다. 지원 요원 중 절반은 드라코 시에 남겨두고, 나머지 절반을 데려온 것이다.

시규가 한쪽에 쌓아놓은 기계 괴수들을 보고 감탄했다.

“이번 원정도 아주 대박이네요. 그런데 사장님, 저건 뭡니까?”

손가락 끝이 제국인들이 타던 은색 구를 향하고 있었다.

수한은 빙긋 웃었다.

“제국인들이 쓰던 장비입니다.”

“예?”

시규가 눈을 치떴다.

수한은 어제 벌어졌던 제국인들의 전투에 대해 설명했다. 아울러 용신에게 들은 내용도 이야기했다.

시규가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원정이 좀 길어지겠네요.”

“그럴 겁니다. 일단 세라프들과 협의해서 최대한 빨리 행성을 수복하는데 중점을 둘 생각입니다. 클로아가 가지고 있는 게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아서요.”

“사장님 뜻대로 하십시오. 저희 지원부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하,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세라프들도 수한의 의견에 찬성했다.

충분히 오래 질라 행성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들도 어서 일을 처리하고 헤븐 행성으로 귀환하고 싶다고 했다.

용신의 영지 인근을 청소하는 것은 쉬웠다.

기껏해야 소형, 중형 기계 괴수만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채 하루 만에 인근의 기계 괴수를 몽땅 잡아 케루아 시로 돌아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머릿수가 너무 부족했다. 기계 괴수 사냥은 쉬웠지만, 자리를 비운 동안 케루아 시와 용신의 성지를 지켜야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수한은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드라코 시는 크롱 제국 출신이 많습니다. 거의 90%는 될 겁니다. 그들을 이주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클로아님의 신도 중에 케루아 시와 성지에서 살고 싶은 사람을 지원 받으면 될 거예요.]

듣고 있던 아르텔라가 얘기했다.

그럴 듯한 이야기였다. 세라프 몇 명을 남겨놓고, 드라코 시로 이동했다. 그곳 주변의 기계 괴수들을 잡는 한편 지원자를 받았다.

안전만 보장된다면 케루아 시나 성지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다. 지원자들이 넘쳐 났다.

그 중에는 크롱 제국의 황제도 있었다.

드라코 시에 있으면서, 영향력을 높이려고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수한의 말을 듣고 자신감을 얻은 트라이벌과, 느주브 반도인들이 힘을 합쳐 대항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황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이능력자들도 승급하면서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크롱 제국의 부활은 요원해 보였다.

그래서 자기 세력을 이끌고 케루아 시로 이주하겠다는 것이다. 비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그게 자기들 왕국을 건설하는데 더 좋을 테니까.

[뜻대로 하세요.]

수한은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질라 행성의 기계 괴수들을 모두 잡으면 엄청난 면적의 땅이 남는다. 생존자들을 흩어놔도 한 줌에 불과하니, 갈라진 두 세력이 마주하려면 수십 세대는 걸릴 것이다.

이윽고 드라코 시 인근의 모든 기계 괴수를 사냥하는데 성공했다.

상당히 많았다. 크람 행성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질을 따지면 오히려 더 높았다.

15마리.

대형이 4마리, 중형이 7마리, 소형이 4마리였다.

진작 잡았던 거대 기계 괴수들까지 하면 총 19마리를 잡은 셈이다.

뿌듯한 포만감이 느껴졌다.

이번 원정도 크나큰 성과를 거뒀다.

무엇보다도 세라프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자기들이 사냥한 것도 몽땅 미르 공격대에게 선사한 것이다.

드라코 시 인근을 청소한 후, 대륙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예전에 두 세라프와 함께 했던 길과 같았다. 폐허가 된 도시 몇 군데를 거쳐, 브종 시에 당도했다.

대륙 깊이 들어갈수록 기계 괴수를 찾기 힘들어졌다. 드라코 시 인근에는 바글바글 했지만, 대륙에는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케루아 시까지 진군하면서 잡은 기계 괴수가 겨우 여섯 마리에 불과했다. 그나마 모두 소형이어서, 시간 대비 효율로 따지면 좀 아쉬웠다.

뭐 어떤가.

이미 원정의 초기 목표는 달성했는데.

지금은 질라 행성 전역을 수복하고, 용신 클로아와 다시 이야기를 하는 게 중요했다.

케루아 시에 도착한 뒤 휴식을 취했다.

라엘라와 다른 세라프들이 할 말이 있다며 찾아왔다.

[우리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다. 이제 그대의 공격대만으로도 남은 기계 괴수들을 처치할 수 있을 테니까.]

[세라프의 전당은 더 만들지 않으실 겁니까?]

[당분간은 바티오와 케루아, 두 곳에만 운용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나중에 인구가 늘고 이능력자들이 많이 생기면 그때 숫자를 늘릴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클로아님의 이야기는 듣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우리 중 쥘베르는 남는다.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 쥘베르를 동석시켜주었으면 한다. 당분간 질라 행성에 남아 있을 테니, 우리까지 참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루 빨리 질라 행성의 기계 괴수들을 사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휴식을 취한 후, 공격대와 함께 움직였다.

아르텔라가 클로아의 힘을 이용하여 행성 구석구석을 뒤진 뒤였다. 앞으로 남은 기계 괴수의 수와 위치를 미르 공격대에게 정확히 전달했다.

총 11마리.

중형 2마리에 소형 9마리가 전부였다.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그렇지, 만약 한 곳에 있었다면 하루도 걸리지 않아 해치웠을 것이다.

분주하게 날아다니며 기계 괴수들을 사냥했다. 사냥한 다음에는 용이와 융합시켜 케루아 시로 왔다. 전리품을 지구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사냥이 끝났다.

1달이 조금 넘게 걸렸다. 2월 1일에 질라 행성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3월 10일이 되자 모든 기계 괴수를 잡은 것이다.

“이제 클로아한테 갈 거야?”

새미가 묻자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겠지.”

라오그뉴와 마엘른도 따라붙었다. 소식을 들은 쥘베르도 합류했다.

그렇게 다섯이서 용신의 성지로 갔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아르텔라와 함께, 예전에 한 번 갔던 통로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그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했나 보다.

지하 공동의 구조물에 옅은 빛이 어려 있었다.

아르텔라가 구조물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빛이 화악 타오르며 저번에 만났던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냈다.

존재, 클로아의 화신은 일행을 치하했다.

[훌륭하다. 침략자들을 모두 격퇴했구나. 비록 그들이 남긴 괴물들이 남아있지만, 그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말해 보아라.]

[라엘라님께 들은 얘깁니다만, 클로아님은 세라프 종족의 튜니에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수한은 바로 직구를 던졌다.

존재는 순순히 대답했다.

[사실이다. 진리의 빛께서 나를 창조하셨지. 그게 벌써 수만 년 전이구나. 그때 그대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존재의 시선이 쥘베르에게 순간적으로 머물렀다.

쥘베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의 창조 순간에, 나도 같이 있었다고? 진리의 빛께서 원형 기계용을 창조하실 때 내가 옆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만, 그게 그대는 아닌 것 같다.]

수한도 입을 열었다.

[제가 만나본 튜니에님은 클로아님 같은 강력한 존재를 만드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기계용을 만들고, SS급과 SSS급으로 진화시키는 정도입니다.]

존재가 답변했다.

[그럴 거다. 나는 이 시간대의 튜니에님에 의해 탄생한 게 아니니까.]

핵심적인 단어가 나왔다.

이 시간대.

수한은 빛을 발하는 구조물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클로아는 미래에서 온 게 아닐까?

지금처럼 기계용에 대한 기술을 축적한다면, 아주 나중에는 클로아처럼 강한 존재를 탄생시킬지도 모른다.

수한의 생각이 존재를 향해 흘러들어갔다.

존재는 모호한 답변을 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네?]

[간단하다. 이 세계의 미래가 내가 태어난 세계의 과거로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대의 행성에도 평행차원 개념은 있지 않나? 그걸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클로아가 태어난 것은 헤븐 행성의 달력을 기준으로 약 1만 년 후라고 했다.

그곳의 헤븐 행성도 기계 괴수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역시 종족 연합을 구성했고, 갖은 방법을 강구하여 제국에 맞섰지만 끝내 파국을 맞이했다.

그 와중에 소수의 인원이 탈출을 감행했다. 대부분은 제국의 추격에 붙잡혔지만, 클로아는 자신의 조종사가 희생한 덕에 가까스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존재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붙잡히기 직전, 무턱대고 시공 도약을 시도한 게 주효했다. 수확이 시작되면 제국에게 멸망당할 게 분명해서, 먼 과거로 가서 제국이 성립하기 전 그들을 멸망시키자는 시도가 진행 중이었다. 전례도 있었고. 비록 수확이 예측보다 빨리 시작되어서 실패로 돌아갔다만.]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시공 도약을 한 것은 좋았는데 부작용이 생겼다. 내 안에 타고 있던 종족 연합 최고 평의회 의원들의 영혼이 나와 합쳐진 것이지.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기계용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생체이면서도 기계,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이면서도 혼돈처럼 불안정한 존재이다. 그때는 나를 무엇이라 정의해

야 할 지도 몰랐지.]

그러면서도 야만적인 질라 행성의 참상을 보고 문명을 전수했다. 한편 융합된 각 종족의 유전자 정보를 활용한 화신을 만들어 자신의 후손을 퍼뜨렸다. 그 후손은 기존의 종족들과 결합하며 완전히 새롭게 변모했다.

그게 크롱 제국을 만들어 번성하던 기미크 종족.

그렇게 되자 지금 수한과 얘기 중인 존재도 깨어났다. 생체 정보를 모은 화신을 만들자, 기계 정보가 모인 화신도 생긴 것이다.

다름 아닌 원래 기계용의 인공지능이었다.

이제는 인공지능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 뒤부터는 클로아에게도 절제라는 단어가 생겼다.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차갑게 제동을 걸게 된 것이다.

만약 이 존재가 없었다면 지금 질라 행성의 모습은 많이 달랐을 터였다. 분별없는 애정이 넘쳐흘러 오히려 지옥이 만들어졌겠지.

수한은 존재에게 들은 내용에서 어떤 사실을 유추해냈다.

[지금 제국에게 공격 받는 헤븐 행성과 종족 연합이 한두 개가 아니겠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나도 탈출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제국은 시공 분열에 의해 새로운 차원을 생성하는 기술을 가진 것 같다. 뭔가 제약이 있는 모양이다만 그걸 알아낼 수는 없었지. 제국에 맞서 싸우려면, 어떻게든 그 제약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한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존재가 용이를 불렀다.

[어린 기계용아, 이리로 오거라.]

[응? 나?]

[그래.]

용이가 쭈뼛거리다 수한을 올려다보았다.

수한이 예상했던 전개였다. 괜찮다고 살짝 앞으로 밀어주었다.

용이가 주춤주춤 구조물을 향해 다가갔다.

구조물이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그러더니 가운뎃부분이 문이 열리듯 벌어졌다.

존재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이미 실패했다. 내가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주인은 진작 우주의 먼지가 되었고, 탈출에 성공한 이들의 영혼은 이 행성과 합쳐지다시피 하여 이 행성 밖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게 되었지.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동일한 파국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날 받아들여라. 내 지식

과 경험을 받고, 새로운 기회를 얻어라.]

수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존재의 기억이 물 밀 듯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까마득히 오래 전.

존재, 아니 기계용 클로아가 제국에 맞서 싸우던 시절.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클로아는 미래의 분화된 시간대에서 탈출하여 한 행성의 용신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를 만났다.

그 존재는 클로아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자신의 기억, 경험, 지식, 심지어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동력핵까지도.

이젠 클로아의 차례였다.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강구한 몇 가지 비책 중 하나.

그것이 지금 이곳에서, 용이를 통해 싹을 틔우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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