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멸의 용이 -1- >
용이가 구조물 안으로 들어갔다.
벌어졌던 틈이 오므라졌다. 구조물이 꾸물거리며 그 위를 덮었다. 그리하여 마치 거대한 알처럼 변했다.
용이가 모든 힘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이다. 수한은 다른 이들과 함께 신전 밖으로 나왔다.
아르텔라는 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클로아님을 세라프 종족이 만들었다는 건가요?”
수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세라프 종족이 만든 기계용 클로아와 용신 클로아는 엄연히 다른 존재입니다.”
아까 만난 존재의 말에 의하면 최소한 Ex급 세라프와 SSS급 이능력자 십여 명이 합쳐진 것 같았다. 기계용 클로아의 자아도 마찬가지였고.
그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용신 클로아는 이전의 기계용 클로아는 물론 어떤 존재와도 다른 존재라고 봐야 했다.
아르텔라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수한은 그나마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지구인이니 사태를 냉정하게 볼 수 있지만, 아르텔라는 그게 아닐 테니까.
쥘베르도 복잡한 얼굴이었다.
하긴 시공 분열에 의한 차원 생성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나. 그저 다른 차원에 만들었을 줄 알았지.
새미가 아르텔라의 눈치를 살피며 수한에게 물었다.
“그럼 용이가 이제 Ex급 되는 거야?”
“아마 그럴 걸. 그런데 충분한 건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어. 튜니에님은 신의 심장이 필요하다고만 했지, 그것만 있으면 된다고는 하지 않으셨거든.”
“그러게. 뭐, 저걸로 부족하면 헤븐 행성으로 데려가면 되지 않겠어?”
“하긴 그렇지.”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지원 요원들이 분주히 전리품을 지구로 보내고 있었다. 밤낮 없이 일을 했지만, 아직도 전리품이 세라프의 전당 옆 공터에 그득하니 쌓였다.
용이가 구조물에 들어가 있으니 수한도 도울 길이 없었다. 그저 그들을 독려하는 게 전부였다.
수한은 언제쯤이면 두 작업이 끝날지 계산해 보았다.
신전 지하의 상황을 보니 용이는 2주 정도면 심장을 완전히 흡수할 것 같았다. 전리품을 지구로 보내는 것도 그와 비슷했다. 처음에 2달 일정을 잡고 질라 행성으로 들어왔는데, 거의 비슷하게 끝나는 것이다.
2주 동안, 소일거리 삼아 변이체들을 잡고 다녔다.
드라코 시는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케루아와 용신의 성지 인근은 변이체가 넘쳐흘렀다. 반면 크롱 제국인의 이능력자는 아직 부족한 편이었다.
2주는 빠르게 지나갔다.
모든 전리품을 지구로 보냈다. 신전 지하의 용이도 흡수를 거의 끝내가고 있었다. 변이체도 많이 잡아서, A급 이상의 변이체만 수백 마리 가깝게 잡은 것 같았다.
수한은 신전 지하로 내려갔다.
구조물에 변화가 있었다.
원래는 직경 10미터는 되었던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그런데 이젠 직경 2미터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울퉁불퉁하던 표면도 제국인들의 은색 구처럼 매끄럽게 변했다.
스며 나오던 빛은 사라졌다. 대신 거무튀튀한 광택이 구조물 전체에 어렸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용이의 몸을 보는 듯한 광택이었다.
수한은 구조물을 매만졌다.
따스한 어떤 느낌이 전해졌다.
직감적으로, 힘의 흡수는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루 내에 알이 갈라지며 용이가 깨어날 거라는 것도.
그 사실을 공격대 전체에 알렸다. 핵심 간부들은 함께 지켜보기로 하고, 다른 인원들은 먼저 지구로 귀환시켰다.
용이가 깨어나는 날이 되었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신전 지하로 들어왔다. 시간을 확인하면서, 용이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끼긱, 끼기긱.
마침내 알에서 묘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수한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알을 쳐다보았다.
설마 잘못되지는 않겠지?
옆에 있던 새미가 수한의 손을 붙잡았다. 걱정 말라는 듯 부드럽게 매만지자, 들끓던 수한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알의 표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금.
차츰 벌어졌다. 나중에는 알 전체로 파급되어 거미줄과 같은 형상이 되었다.
쩌어억.
수박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가장 먼저 그어졌던 금이 커지며 알이 양쪽으로 쪼개졌다.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덕분에 시야가 가려졌지만, 수한은 연기 사이에서 커다란 기계용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다 성장한 백두산 호랑이와 비슷한 크기.
어깨가 수한의 허리 위까지 올라왔다. 몸길이는 수한의 키 보다 긴 것 같고, 눈동자가 보석처럼 맑았다. 몸의 금속 재질은 여전하고, 표면에 난 비늘도 선명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축 처져 있었다.
흡사 병에 걸린 것 같다고 할까. 눈에 힘이 하나도 없고, 평소 몸에 흐르던 광택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체온도 차가워졌다. 예전에는 사람이나 동물처럼 몸이 따뜻했는데, 이젠 겨울날 밖에 내놓은 철골을 만지는 듯했다.
수한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너 괜찮니?]
[몸이 너무 갑자기 커졌나 봐. 너무 무거워……]
용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수한이 느끼기에도 용이가 자기 몸을 버거워하는 게 보였다. 고층 건물 크기의 기계용도 능란하게 다루던 용이이니, 단지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장비창을 확인했다.
용이의 등급은 불멸(-).
신화 다음 등급, 즉 Ex 급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뒤에 붙은 ?는 뭐냐? 아직 불완전하다는 것일까?
용이가 길게 하품을 했다.
[하아아암, 나 잠 좀 잘게. 너무 졸려……]
그러더니 금방 눈을 감고 곯아떨어졌다.
수한은 운명의 눈으로 용이의 상태를 살폈다.
보니까 몸은 완성되었는데 내부에 그걸 유지할 힘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수면 상태로 들어가 유지에 필요한 힘을 줄이려는 것이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안을 채워주면 된다.
그 정도 방책은 세라프 종족에게 있을 터. 원정도 끝났으니 헤븐 행성을 방문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을 어떻게 데리고 나가지?
다 자란 호랑이 크기가 된 용이였다. 무게도 상당했다. 새미 같은 경우는 머리를 끌어안는 것도 버거워 했다.
결국 수한이 그냥 짊어지고 나갔다.
“끄응, 요 녀석 꽤 무겁네.”
그나마 수한이 거력 계열 초능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짊어지기는커녕 조금도 옮기지 못했을 테니까.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우리 공격대가 더 강해지겠네요!”
“이제 거대 기계 괴수도 무리 없이 운용할 수 있겠는데요? 나중에는 왕급도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모두 감사합니다. 다 여러분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덕분입니다.”
수한은 인사를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이것으로 볼 일은 다 보았다.
아마 앞으로 수한이 질라 행성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다. 변이체는 행성 전역에 깔려 있지만, 그거야 원정대만 보내도 충분할 테니까.
지구로 가기 전, 드라코 시를 들렀다 가기로 했다. 드라코 시가 만들어지는데 수한과 새미가 많은 역할을 한 터라 그냥 가기 섭섭했던 것이다.
떠나기 전, 수한은 신전에 머물고 있던 아르텔라를 찾아갔다.
애초에 아르텔라는 클로아의 계시를 받고 수한을 따라왔다. 이제 클로아의 정체도 알았고, 질라 행성을 수복하는데 성공했으니 과연 미르 공격대에 남아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르텔라는 담담한 기색으로 답변했다.
“저는 여전히 미르 공격대 소속입니다.”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수한은 빙긋 웃었다.
2주 동안 신전 한쪽에서 고민을 하더니, 드디어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하긴 클로아가 원래는 마법 생명체에서 시작했다고 해서 지금의 위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질라 행성에 와서 쌓은 업적도 마찬가지고.
아르텔라는 용이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미르 공격대에는 클로아님의 화신이 함께 합니다. 저는 클로아님의 무녀이니, 그분을 쫓아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수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물처럼 고요한 아르텔라의 얼굴이,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좀 달라보였다.
강해진 것 같다.
내적으로 외적으로나 전부 다.
뭐라고 뚜렷하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데,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얼굴이 좋아졌습니다.”
수한의 말에, 아르텔라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제 사명을 깨달았거든요.”
“사명이라, 좋은 말입니다.”
아르텔라도 짐을 챙겼다.
사실 챙길 물건도 없었다. 원래 아르텔라가 쓰던 것은 기계 괴수들이 처음 쳐들어왔을 때 이미 작살이 났으니까.
원래 가지고 왔던 물건들만 챙겨 신전을 나섰다.
지원 요원들은 이미 돌려보낸 상태. 시규만 뒤처리를 위해 남아 있었다. 용이가 수면 상태이니 세라프의 전당을 이용하여 바티오 시로 이동했다.
이미 소식을 전한 터라 드라코 시의 요인들이 바티오 시에서 수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티오 시의 세 공작 가문까지 합쳐지니, 그 수가 상당했다.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연회에 참여하면서 보니, 세 공작 가문의 위상은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처음 질라 행성에 왔을 때만 해도 상인들에게 치여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공작 가문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정국을 주도하는 것은 물론, 상인들이 찾아와 허리를 굽실거렸다.
[정말 많은 것이 바뀐 것 같아요.]
리웨르가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트라이벌이 껄껄 웃었다.
[바뀔 수밖에 없지. 바뀌어야 하고. 구태의연한 모습 그대로 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어.]
수한은 드라코 시 및 케루아 시와 협약을 맺었다.
원정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크람 행성으로만 원정대가 왕복 중인데, 원정 목록에 질라 행성도 추가시키기로 한 것이다.
케루아 시를 지배하는 제국의 황제도, 드라코 시의 대표인 트라이벌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들로서도 미르 공격대와의 끈이 단절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협약 내용은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나중에 차원 무역은 물론, 전후 복구에도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미르 공격대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언젠가는 가능해질 테니까.
다음날, 수한은 질라 행성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많은 이들이 마중을 나왔다.
바티오의 세 공작, 국경 도시의 세 영주, 트라이벌을 비롯한 드라코 협회의 간부들, 저번 원정에 동행했던 리웨르와 바티오의 시민들까지.
그들이 세라프의 전당 앞에 모여 정중히 인사를 했다.
새미가 그들을 보며 수한에게 말했다.
“정말 잘 됐다. 저번 원정 때는 다 죽을 줄 알았는데, 이제 어엿한 종족 연합의 일원이 된 것 같아.”
“아직은 갈 길이 멀지. 지금 질라 행성의 지성 종족을 다 합쳐도 인구가 5백만이 안 돼.”
“5백만? 그럼 서울 인구보다 적은 거야?”
“부산이랑 대구 합치면 6백만이 넘어. 이 넓은 행성에 5백만이면, 정말 한줌 밖에 안 되는 거지. 아마 수천 년은 지나야 예전 성세를 회복할 것 같아. 그 전까지는 변이체 천국이지 뭐.”
“안 됐다.”
“그래도 완전히 멸망한 것보다는 나아.”
수한은 질라 행성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륙 방향을 향해 기도를 하던 아르텔라가 합류했다. 그것을 끝으로, SUV를 몰아 세라프의 전당 안으로 들어갔다.
수한은 뒷좌석에 앉혀 놓은 용이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라오그뉴가 심심한지 꼬리로 용이를 때려보지만,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고르릉고르릉 자고 있었다.
라오그뉴가 걱정을 했다.
[얘 이러다 죽는 건 아니지?]
“하하, 그럴 리가요.”
수한은 그저 웃어 넘겼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운명의 눈으로 보니, 용이의 몸에 담긴 힘이 조금씩 소모되는 중이었다. 체내에서 생성되는 힘보다, 몸과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힘이 더 컸던 것이다.
그나마 수한이 힘을 주입하면 소모된 힘을 보충해 줄 수 있었다. 그게 불가능했다면 협약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진작 헤븐 행성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이윽고 붉은 빛이 세라프의 전당 안을 가득 채웠다.
이로써 3번째 원정을 성공한 것이다.
총 매출로 따지면 크람 행성 보다는 못하지만, 시간 대 매출로 따지면 이번 원정이 역대 최고였다.
더구나 이번에는 아주 특별한 전리품을 가져오지 않았나.
바로 제국인들이 쓰던 은색 구.
이걸 연구해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지 어떨지는 모른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용이를 이용해 변형시키면 쓸 만할 것이다.
수한은 사옥의 사장실에서 백기수 이사에게 그간의 보고를 들었다.
미르 공격대의 행보는 순조로웠다.
새로 받아들였던 이능력자들이 크람 행성에서 연이어 원정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부상당한 사람은 가끔 나왔지만 빠른 대처 덕분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흡수 보조제를 충분히 보급해서 그런지 AA 등급이 되는 이능력자가 몇 명 나왔다. 그들은 당장 다음부터 수한이 직접 이끄는 원정에 참가하기를 희망했다.
“다음 원정이라,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실은 슬슬 가브낙 행성을 가볼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예?”
기수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