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 공유 -1- >
세라프들이 다가왔다.
최고 의원, 즉 Ex급 세라프 세 명.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항상 우윳빛으로 빛나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한은 그들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대가 우리 종족에 준 도움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대에게만 좋은 것도 아닙니다. 종족 연합 전체를 위해서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수한도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튜니에가 언급한 백만 기계용 군단.
그 군단을 지휘할 기체가 필요하지 않겠나. Ex급 기계용이라면 훌륭하게 그 역할을 수행할 터였다.
베스티가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며 일행을 이끌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잠깐 생산국 안으로 들어갔다.
생산국은 거대한 공장이었다.
자동화된 기계들이 각종 물건을 빠르게 찍어냈다. 깊은 곳에서는 세라프 장인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진귀한 물품을 만들어냈다.
베스티가 대접한 것은 다름 아닌 엘프 차.
튜니에가 눈을 감고 차의 향을 즐기며 말했다.
[역시 차는 미드가르드 엘프 차가 좋습니다. 재현해 보려고 한 적도 있지만, 이상하게 이 맛이 안 났어요.]
[기후, 지리, 재배 방법을 똑같이 해도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으니까 그렇지요. 엘프들은 자기 가족처럼 차를 재배하니, 그 생명의 농밀함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행들 모두 기분 좋게 엘프 차를 맛보았다. 지구에서 마시던 엘프 차와 다를 것은 없지만, 헤븐 행성에서 마시는 거라 그런지 각별한 느낌을 받았다.
용이도 앞발로 찻잔을 조심스럽게 잡더니 홀짝홀짝 마셨다. 저래도 괜찮은가 싶어 보는데, 용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맛있는 거야 맛없는 거야?]
이제 음식물 섭취도 가능해진 모양.
용이는 엘프 차를 물마시듯 다 마셔버렸다. 그러고도 옆에 앉은 새미의 차에 눈독을 들이자, 새미가 웃으며 자기 찻잔을 용이에게 밀어주었다.
모두 차를 다 마시자, 튜니에가 슬슬 본론을 꺼냈다.
[저희는 클로아가 탈출한 세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클로아의 표현에 따르면 그 시간대.
용이는 입에 머금고 있던 찻물을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수한을 쳐다보았다.
말해도 되겠느냐는 태도.
수한은 담담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알게 된 사실을 세라프들과 공유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용이는 꼬리를 허공에 휘저었다.
[클로아가 중요한 건 다 말했던 것 같은데…… 그냥 클로아의 기억을 다 보여줄까? 말로 하는 것보다는 그게 좋을 것 같아.]
[그게 좋겠다.]
수한은 무한 의식을 발현했다.
여기 앉은 세 세라프와 용이까지 모두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기억이 밀물처럼 들어오기 시작했다.
용이의 말대로 특별한 것은 없었다. 처절했던 투쟁의 기억만이 밀려들었다.
거의 대부분 수한이 겪고, 예측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기갑 거인들이 침략해오고, 세라프 종족을 필두로 종족 연합이 구성되고, 온갖 방법으로 저항하지만 끝내 대규모 공격에 의해 멸망……
어라, 잠깐만.
기갑 거인이라고?
기계 괴수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둔중한 몸을 느릿느릿 움직이며 파괴 광선을 쏘아댔다.
[기계 괴수가 아니네요.]
[클로아가 살았던 세계, 아니 시간대만이 아닙니다. 선대의 용신들이 살았던 시간대별로 제국의 무인 병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과연 그러했다.
용이의 기억 속에서, 다양한 무인 병기가 보였다.
장갑 인형, 강철 괴물, 금속 포식자, 공중 전함, 기계 식물 등등.
다만 각 시간대 별로 침략해오는 무인 병기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에 속한 세력 중 하나만이 공격해 오는 것이다.
수한은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종족 연합이 제국의 농장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그렇다면 제국의 각 세력이 각자 시간대 하나를 맡아 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할 수가 없다.
세라프들이 수한의 생각에 동의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트리모, 로아프, 느와, 다토, 울트라, 나이플이라……]
[제국 내 세력의 이름이겠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힘이 빠졌다.
칼라트라만으로도 솔직히 벅찼다. 그들이 힘을 본격적으로 투사한다면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런 칼라트라와 위력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계열의 세력을 확인하니 힘이 쭉 빠졌다.
용이가 탁자 위에 자기 턱을 얹으며 말했다.
[정면 대결로는 못 잡아. 백만 기계용 군단이라고 했지? 클로아가 살던 곳에서도 비슷한 걸 만들었어. 기계용만이 아니라, 기계 독수리, 기계 호랑이, 기계 상어, 기계 곰까지 만들어서 수확의 날에 헤븐 행성에 모여 방어에 나섰어. 그래서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이미 다들 답을 알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그 장면을 보았으니까.
용이가 한숨을 폭 쉬었다.
[모두 잡혀갔어. 한 명이라도 죽으면 아깝다고 정신 감응을 막 날려대더라. 더구나 기계용이나 그 형제들은 장식품으로 쓰면 좋겠다고 몽땅 수거해 갔어. 그러고도 제국 전함 몇 척을 부순 게 다야. 놈들의 대장들은 정말 무시무시했다고.]
각 용신들에게 저장된 수확의 날에 대한 기억은 비슷비슷했다.
한날한시에 거대한 전함들이 출현한다.
전함들은 이능력자들을 최대한 많이 포획하여 데려간다. 그 대상은 S급 이상의 고위 이능력자들이고, 그 이하는 모조리 죽였다.
가끔 전함을 쓰러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전함 내의 제국인과, 탑재된 무인 병기들을 당해내기는 힘들었다.
헤븐 행성도 마찬가지.
특별히 강한 전력이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제국의 Ex급 이능력자들은 혼자서 세라프 최고 의원을 두셋씩 상대하곤 했다.
수한이 질문을 했다.
[1만년 후면 세라프 종족도 많이 발전했을 텐데 그렇게 당했다고?]
[지금이랑 별 차이 없던데? 기껏해야 세라프의 전당 대신에 세라프의 원형 문으로 차원을 이동하고, 여러 가지 인공 탈것을 사용하는 정도? 아, 그 중에 큰 거는 원형 문 안 쓰고도 차원 이동하긴 하더라.]
[뭐야, 상당히 다르잖아.]
용이는 자신에게 저장된 정보를 튜니에에게 전달했다.
원형 문은 9개의 조각으로 이뤄져 있었다. 평소에는 지상에 쌓여 있다가 발동하면 줄줄이 배열이 된다. 그런데 그 크기가 제한이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달 크기까지 커질 수가 있었다.
반드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세라프의 전당과 비교하면 한 층 더 발전된 상태.
수한도 옆에서 정보를 받아먹었다. 조금만 연구하면 수한도 원형 문 설치가 가능할 듯 했다.
튜니에가 용이를 바라보았다.
[다른 거 뭐 기억해둔 건 없니?]
[잠깐만. 과거 시간대도 있고 미래 시간대도 있어서 몇 가지는 발전됐는데 몇 가지는 아냐.]
용이는 몇 가지의 개념을 더 쏟아냈다.
발전된 개인용 무구, 기갑 장비, 차원 전함, 발전된 힘의 결정 추출기, 시공간 왜곡 장치, 이능 각성 보조 장치, 기계용 제작에 대한 자료 등등.
특히 이능 각성 보조 장치는 아주 훌륭했다. 힘의 결정만 충분하면, 정체된 각 종족의 이능력자들을 일괄적으로 1개 등급씩 더 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여섯 시간대에서 연구한 것들이니 무척 방대했다. 튜니에는 자신의 지팡이에 용이가 건넨 정보를 쑤셔 넣었다.
용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다 된 것 같아. 다른 건 특별히 별다를 게 없어.]
[고맙다.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클로아의 시간대에서도 처절하게 당하지 않았나.
그런데 수한은 엉뚱한 것에 관심을 가졌다.
[클로아의 시간대에서는 종족 연합에 지구가 없네?]
[그러고 보니……]
[다른 시간대도 마찬가지네요.]
미래 시간대 모두 마찬가지였다.
미드가르드 행성이나 노르헤임 행성, 질라 행성, 쥬페르 행성 등 수한이 방문했던 모든 행성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지구 하나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과거 시간대에서는 지구가 보였다. 매우 미개해서 제대로 된 활약은 못했어도, 어쨌든 종족 연합에 참가는 하는 것이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튜니에가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어쨌든 이 기술들을 적용하면 종족 연합의 전력이 크게 강해지겠습니다. 기계 괴수 정도는 금방 쓸어버릴 수 있게 될 거예요.]
[일단은 세라프의 전당부터 원형 문으로 교체를 해야겠소. 원형 문은 딱히 무게 제한도 없고 가동에 필요한 자원도 훨씬 적은 것 같으니까, 그것만으로도 크게 도움이 될 거요.]
[물류의 혁명이 일어나겠네요.]
[종족 연합의 사이가 더 긴밀해지고, 결속력도 강해지겠어.]
세라프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한편, 수한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제국은 왜 이런 식으로 시간대 별로 농장을 만들어 운영하는 걸까?
용이의 기억 속에서 본 바로는, 다름 아닌 세라프들과 이능력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수를 늘려서 그 피와 살점을 채취하는 것이다.
그에 대해 묻자, 세라프들이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튜니에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하긴, 그대도 슬슬 알아야겠지요. 간단합니다. 우리 종족의 피와 살을 마시면 수명이 늘어나거든요.]
고작 그거?
그렇게 생각했는데, 헤라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우주에는 수명을 늘리는 물건이 많이 있습니다. 영원의 샘물, 생명의 불꽃, 불멸의 정수 같은 게 그런 거지요. 하지만 그 어떤 물건도 종족 본연의 수명을 늘려주지는 못합니다. 가령 그대 지구인들을 예로 들자면, 어떤 방법을 써도 150년이 한계입니다. 육체를 갈아타거나 뇌까지 기계나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
지 않는 한, 150살 정도가 되면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 종족의 피와 살을 섭취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아무 부작용 없이 수명을 늘릴 수가 있지요.]
[다만 섭취하면 할수록 필요한 분량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피 한 방울과 아주 작은 살점이 하나만 필요했다면, 나중에는 심장 하나를 다 먹어야 될 정도가 됩니다.]
[그마저도 더 강한 세라프의 피와 살이 필요해지지요. 최고 의원, 그러니까 Ex 등급은 되어야 무한정 수명을 연장하는 게 가능한가 봅니다.]
[영생 때문에 이 정도 규모로 시공간을 분열시켜 새로운 차원을 만들었다고요?]
하긴 제국의 황제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수한은 세라프들이 어색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튜니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부분은 우리 종족의 치부이지만, 그대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맞소. 지구인 이수한은 앞으로 큰 일을 할 테니까.]
[그 동안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제국의 성립에 우리 종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뭐라고요?]
순간, 예전에 마니엘라와 만나서 처음 신체 검사를 받았을 때의 기억이 났다.
세라프 종족이라고 정의롭고 선량한 것만은 아니라고 했지.
과거에 쌓은 업보가 많고, 그 업보가 현재 세라프 종족을 짓누르고 있다고 했던가.
튜니에가 세라프 종족의 비사를 털어놓았다.
[약 100만 년 전, 우리 종족이 막 우주로 진출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의 세라프 종족은 의욕에 차 있었다.
헤븐 행성을 도는 위성들은 진작 우주 기지화 되었고, 태양계 내의 여러 행성에도 식민지를 건설했다. 거대한 우주선을 이끌고 우주 전역을 누볐다.
처음에는 태양계를 벗어나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태양계를 넘어 다른 태양계에 도달하고, 나중에는 은하계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자연히 외계 종족과 만났다.
대부분 매우 미개한 수준이었다. 문명을 이루기는커녕, 기껏해야 돌도끼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게 전부였다. 언어도 발달하지 않아서,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우리는 문명을 전파했습니다.]
어차피 고차원적인 개념은 이해하지도 못했다. 농경과 목축, 문자와 언어, 금속에 대해 전파하는 것도 벅찼다. 오히려 야성이 살아 있어서인지 각종 마법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여 새로운 기술로 만들었다.
수혜를 받은 종족들은 세라프 종족을 신처럼 섬겼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별의 바다를 넘나드는 거대한 배를 타고 내려와, 그들을 배불리 먹게 해주고 온갖 병을 치유해주었으니까. 위험한 야생 동물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했고.
그때가 세라프 종족이 가장 번영하던 시절.
세라프 종족이 지구인 수준의 생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진작 우주 전체를 제패했을 것이다.
대신 거미줄과 같은 차원 이동망으로 각 행성을 연결했다. 지금처럼 단번에 이동하지는 못해도, 빠르게 우주를 누비며 영향력을 확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