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05화 (206/254)

< 기억 공유 -2- >

그러면서 자만심이 싹텄다.

우주 제일의 종족이자 문명의 전파자이면서, 지성을 선도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자만심.

세라프 종족은 금기의 영역에 손을 댔다.

생체 실험을 한 것이다.

다른 종족을 해부하고, 접붙이기를 하는 수준도 아니었다. 유전자도 제멋대로 주무르고, 멀쩡한 행성의 환경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후 다른 행성의 종족들을 풀어놓고 그 생태를 살폈다.

튜니에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종족의 과오지요.]

당시에는 무슨 그런 실험을 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나중에는 그렇게 육성한 행성의 종족들끼리 전쟁을 벌이게 해서 승패를 놓고 도박을 벌이기도 했다고.

종족 전체가 신이라도 된 듯 도취되어 있었다. 이런저런 부작용이 곳곳에서 나타났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지구를 발견했다.

이 시기의 세라프 종족은 초기 우주 개척 시기에 가졌던 선의를 모두 잃어버린 뒤였다. 지구를 자신들의 장난감으로 여기고, 별별 짓을 다했다.

하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지구인이 너무 연약했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강하지도 않고, 이능 반응이 강하냐면 그런 것도 아니고, 외모가 아름답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수명도 어중간하고, 한 배에 대개 자식 하나를 낳으니 실험체로 쓰기도 부족했고.

지능은 높은 편이었지만, 그 정도의 지능을 가진 종족은 우주에 얼마든지 있었다.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방치해 두었다. 쓸모가 없으니 아예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겨우 수천 년 놔두었을 뿐인데, 지구인들이 우주로 진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세라프 종족의 보살핌 없이 우주로 진출한 종족은 지구인이 처음.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가 없는 일.

이유는 간단했다.

이능 적성은 원체 없다시피 했으니, 세라프들이 남긴 기술 중 기계 문명에만 매달렸다. 그리하여 문명을 급속도로 발전시키고, 우주 진출에 성공했다.

세라프 종족에 대한 기록은 그들 사이에서 전래되고 있었다. 일종의 신처럼 묘사했는데, 그들은 명철한 이성으로 진실을 꿰뚫어 보았다.

흔히 생각하는 고위 영격체가 아닌, 발전된 문명을 가진 종족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연히 다른 종족처럼 세라프 종족을 숭배하지 않았다. 아예 대등한 입장에서 협약을 맺고자 했다.

격론이 벌어졌다.

지구인을 대등한 종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무리부터, 당치도 않는 소리라며 지구인은 어디까지나 하등한 종족이니 지구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무리까지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결국 세라프 종족은 지구인의 우주 진출을 금지했다. 태양계 안에서만 활동할 것을 강요하며 그 밖으론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광기의 시대였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세라프 종족은 지구인을 계속 압제했다.

두려웠던 것이다.

우주의 패권을 빼앗길까 봐, 스스로가 지구인에게 정복당해 자기들 손에서 노는 여러 종족들처럼 될까 봐……

그게 화근이 되었다.

참다못한 지구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인구가 무려 조 단위로 늘어난 뒤였다. 태양계 하나만으로는 수용이 불가능했다. 물도 식량도 부족했다. 이렇게 사느니 싸우다 죽자는 각오로 덤벼들었다.

당연히 지구인이 밀렸다.

기계 문명은 지구인이 세라프 종족을 많이 따라잡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능은 어쩔 수가 없었다. 종족의 적성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지구인은 우주 전체에서도 최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세라프 종족은 태양계 외곽에서부터 공격해 들어갔다. 외곽 행성의 식민지를 차례차례 부수며 지구로 접근했다.

정체절명의 순간.

지구에서 이능력자들이 출현했다.

처음에는 약했다. 우주 전쟁에서는 써먹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전쟁이 거듭하면서, 화성 식민지까지 부수고 달 요새에 접근했을 때 지구의 이능력자들은 세라프 종족을 위협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개개인은 기껏해야 S급 정도인데,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다. 꼭 공장에서 찍어내는 수준으로 쏟아져 나왔다.

수한은 왜 그런지 금방 이유를 알아차렸다.

[레벨 업 도우미를 발명했나 봅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초기 형태라 한두 개의 이능을 개발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전황이 획기적으로 반전되었다.

일진일퇴,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것이다.

더구나 네 개의 이능을 개발할 수 있는 무기가 곧 실전 배치된다고 했다. 이 무기는 기존보다 더욱 강해져서, S급이 아니라 SS급까지 제 주인을 성장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정보까지 들어왔다.

그 소식을 들은 세라프 종족은 집단 패닉에 빠졌다.

그리하여 최악의 선택을 했다.

지구인들이 살고 있던 태양계 전체를 날려버린 것이다.

무심히 듣고 있던 수한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세라프들을 쳐다보았다.

세라프들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우리 종족이 그런 짓을 했다니 그대의 종족에게는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지금 지구는 온전한데요. 혹시 행성 표면만 부순 겁니까?]

[아니. 행성 자체를 터뜨렸다. 태양계에는 태양과 각 행성의 파편만 남았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지구인들은 우주선을 타고 탈출했다.

거의 대부분은 세라프 종족에게 사냥 당했다. 그나마 탈출에 성공한 이들이 있어, 세라프 종족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먼 은하계로 도망쳤다.

그 이후에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오랜 세월 세라프 종족의 지배를 받은 종족들은 대부분 우주를 누비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인과의 전쟁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세라프 종족이 태양계 전체를 날리자 격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또다시 전쟁이 터졌다.

노예 취급을 받던 종족들이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다.

세라프 종족은 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행성을 소멸시키는 것은 예사였고, 태양계를 하나 부수는 것도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기나긴 전쟁 끝에, 세라프 종족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종족의 수도 줄고, 많은 식민지를 상실했다.

그러나 승리는 세라프 종족의 몫.

애초에 우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예정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제국이 출현했다.

레벨 업 도우미를 이용해 충분히 강해진 제국이었다. 예전 지구도 강했지만, 제국은 그보다 수백 배는 더 강했다.

진이 다 빠진 세라프 종족으로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헤븐 행성을 제외한 우주 전역이 제국의 손에 떨어졌다.

세라프 종족은 공포에 떨었다.

자기들이 지구에 했던 것처럼, 제국이 헤븐 행성 자체를 소멸시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맞서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제국은 세라프 종족과의 전쟁으로 더욱 강해져서, 이젠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까.

최후의 방법으로 시공 회귀가 입안되었다.

제국이 성립되기 전, 즉 지구가 막 발견되었을 때의 시점으로 돌아가자는 것.

돌아가기만 하면 방법은 많지 않겠나.

세라프 종족은 생존자의 절반을 희생시켜가며 시간을 되돌렸다. 막 우주 개척을 시작하던 때로 돌아갔다.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시간 이동을 하면서 유전자가 변이되고, 그에 따라 세라프 종족의 성(性)이 사라진 것이다.

수한은 눈을 크게 떴다.

[세라프 종족은 원래 무성 생식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종족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게 지금처럼 변한 것은 시공 회귀 직후의 일입니다.]

세라프 종족은 얼핏 보면 지구인 여성처럼 보인다. 하지만 난소나 자궁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작은 가슴과 위축된 질, 불완전하게 발달한 남성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 생식은 불가능했다. 튜니에가 말하기를, 인공 수정과 인공 자궁을 이용하여 아기를 탄생시킨다고 했다. 더구나 그렇게 태어난 세라프 아기들은 극도로 허약해서, 세심하게 보살펴도 열 중 하나둘이 성인이 되는 게 고작이었다.

부작용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행성 전체가 황폐화되었다. 생물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새끼들을 낳지도 못했다. 땅도 말라붙어 작물이 자라지 않았다.

심지어 수많은 기술과 지식을 잃어버렸다. 자기네 종족의 이름조차 잊었다. 세라프라는 종족명은, 시공 회귀 후 명명한 이름이었다.

그래도 세라프 종족은 희망찬 미래를 꿈꾸었다.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종족의 인구가 늘지 않을 테니 예전처럼 우주 전체를 장악하긴 힘들겠지만, 우주 패권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이 힘겨운 평화가 세라프 종족에겐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아예 종족 자체가 통째로 다른 행성으로 이사를 했다. 시공 회귀 부작용으로 많은 기술과 지식을 잃었어도, 행성 하나 정도 테라포밍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인구의 감소는 기술의 쇠퇴를 야기했다. 반면 생존을 위해 개인의 이능은 더욱 발전해서, 광기의 시대보다 강한 이능력자들이 많이 출현했다.

수한은 듣고 있다가 질문을 던졌다.

[요즘 세라프 종족의 수가 늘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힘의 결정과 관계가 있습니까?]

[예. 우리 종족의 아기들은 너무 허약해서 이능으로 보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힘의 결정을 주기적으로 흡수시키면 건강하게 자랍니다. 성인이 될 때쯤에는 모든 계열 이능을 S급 이상으로 보유하게 되고요.]

[하……]

수한은 혀를 내둘렀다.

말 그대로 사육이다. 그냥 공격하는 게 아니라, 공격하는 척 세심하게 키워준 것이다.

돼지를 살찌운 뒤 잡아먹는 것처럼.

[그럼 제국은 어떻게 된 겁니까?]

우주 전체의 시간을 되돌린 거라면, 제국은 존재하지 않아야 할 텐데.

튜니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공 회귀를 실행할 때, 거기 휘말린 제국의 전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차원 도약을 사용하여 시공 회귀에서 빠져나갔는데, 시공 회위와 아차원 도약이 서로 반응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간 겁니다.]

[아……]

[그들이 어느 시간대로 도착했는지는 모릅니다. 이동한 전함이 1척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데, 정확히 몇 척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같은 시간대로 도착했는지, 다른 시간대인지도 모르고요.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미래일 거라는 점과, 미래의 은하 하나 정도가 아닌 드넓은 우주 전체

를 정복했을 거라는 점입니다.]

[하하하.]

웃음 밖에 안 나왔다.

과거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좋은데, 되레 갑갑함만 늘었다.

라오그뉴가 고개를 모로 꼬며 세라프들을 노려보았다.

[그럼 이 모든 것이, 너희들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거냐?]

[예. 죄송합니다.]

세라프들이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라오그뉴가 뭐라고 더 하려는 것을, 수한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추궁할 수는 없지요. 더구나 세라프 종족은 이미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누구 책임이냐고 따질 때가 아니고, 대책을 마련하는 게 시급합니다.]

[체엣.]

라오그뉴가 혀를 찼다.

그러더니 토라진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새미가 한 가지를 지적했다.

[제국을 공격하려면 미래로 시간 여행을 가야 한다는 얘긴데, 그게 가능한가요?]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제국에 의해 생성된 차원을 벗어나 제국이 존재하는 차원계로 진입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어떻게든 수를 낼 수 있을 겁니다.]

[시공 회귀는 안 돼. 용신 중 하나가 진작 시도했었어. 제국 본거지는 시공 요새가 보호하고 있으니까 통하지 않을 거야.]

[우리도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용이가 전해준 기술을 최대한 빨리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서관에 비장된 옛 기술을 되살리는 것도 필요했다.

수한과 세라프 종족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전폭적인 협력을 할 것을 다짐했다. 힘을 합쳐야 지금 상황을 극복할 가능성이 단 0.01%라도 생길 테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제국을 분쇄할 수가 있을까.

제국이 전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기껏 힘을 모아 돌진하여 제국의 황제를 제거해 봤자, 제국 자체를 무너뜨릴 순 없을 테니까.

이것으로 이야기를 나눌 만큼 나눴다.

용이도, 세라프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수한은 일행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세라프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저희는 이만 지구로 돌아가겠습니다. 다음 원정을 가려면 준비할 게 좀 많아서요.]

[알겠습니다. 혹시 저희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참, 아까 말씀드린 것은 대외비입니다. 꼭 기밀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비룡들이 수한 일행을 날개 요새로 데려다주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만큼 오늘 들은 내용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수한은 비룡 위에 앉아 헤븐 행성의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클로아의 기억 중, 과거 시간대에서는 지구가 보이는데 왜 미래 시간대에서는 지구가 보이지 않는 걸까?

지구의 발전상을 보면, 미래 시간대에서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거 어쩌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