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최초 -2- >
“멸혼, 지옥, 천멸이라……”
궁극 속성 부여로 쓰게 된 속성은 딱 3가지.
하나같이 강력했다.
멸혼은 상대를 백치로 만든다. 기계 괴수라면 인공지능을 초기화시켰다. 지옥은 명중하는 즉시 9가지 속성이 동시에 일어나 상대를 공격했다. 천멸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능력이 있었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멸혼이었다.
기계 괴수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차지할 수도 있으니까.
전리품으로 내다 팔든, 용이를 시켜 기계용으로 융합시키든 간에.
수한은 밝은 얼굴로 밀실을 나왔다.
새미가 눈물범벅이 되어 수한을 맞았다.
“오빠! 걱정했잖아!”
“응? 왜? 나한테 별 일 없을 건 진작 알지 않았어?”
“오빠가 밀실 들어간 지 3일이나 지났단 말이야!”
“뭐?”
수한은 깜짝 놀라 시계를 살폈다.
새미의 말대로였다. 수한이 밀실에 들어가고 정확히 3일이 지나 있었다.
거의 정신을 놓다시피 하긴 했는데, 그 사이 3일이나 지났을 줄은 몰랐다. 끽해야 몇 시간 정도 흘렀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SSS급 흡수하는 게 힘들긴 힘든가 보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네?”
“어휴, 진짜.”
수한이 건강한 것을 보고 새미도 마음을 놓은 모양이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더니 수한을 흘겨보았다.
눈이 퉁퉁 부어 있어 우스꽝스런 모양새가 되었지만, 수한은 감히 장난을 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새미가 화를 내면 본인만 곤란해질 테니까.
수한이 SSS급 이능력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공격대를 강타했다.
안 그래도 다들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사내 업무망과 SNS, 개인 스마트폰을 통해 승급 사실이 들불처럼 번졌다.
직원들이 달려와 축하 인사를 쏟아냈다.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역시 우리 사장님이세요!”
“사장님이 지구 최초죠? 정말 말이 안 나오네요!”
“사장님 이러다 종족 연합 의회에 출마하시는 거 아니에요?”
직원들만이 아니라, 수한 일행을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축하한다는 전언을 보내왔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무슨 국회의원, 각 지자체장, 대기업 회장과 사장, 공격대장들, 수호자 연맹의 간부들, 방송인과 운동선수는 물론 국내외 유명 이능력자들까지.
밀실에서 나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국내의 언론들이 속보를 쏟아내고 있었다.
수한은 사장실에서 TV를 보며 쓰게 웃었다.
외국 방송에서도 수한의 승급 사실이 대대적으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장을 고친 새미가 그걸 보고 말했다.
“외국도 난리네. 죄다 오빠 이야기뿐인데?”
“하하, 그러게. 자기도 한 번 도전해 보지 그래?”
“우웩, 농담하지 마. 난 절대 SSS급 승급 안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새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반면 라오그뉴는 심각한 얼굴로 TV를 보았다.
[SSS급이랑 SS급은 차이가 심하겠지?]
라오그뉴의 물음에, 수한은 아는 대로 답했다.
“뭐, 그렇지요. 예전에 막 SS급이 됐을 때는 제가 결정적인 공격력이 좀 부족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던 게 SS급 능력을 조합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보강이 됐지요. 천지돌파나 뇌룡 숨결 같은 것 때문에요. 이젠 그런 게 없어도 됩니다. 궁극 속성 부여로 한 방 날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렇겠지?]
라오그뉴가 시무룩한 기색을 보였다.
안 그래도 질라 행성 원정에서 용기사보다 활약을 못했는데, 이젠 더 밀릴 거라고 생각하니 침울해진 모양이다.
쥬페르 행성에 있을 때는 어딜 가나 가장 주목받곤 했었다. 그건 지구에 처음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젠 뒤로 밀려나는 형국이니, 치기 어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했다.
새미가 라오그뉴를 다독였다.
“그래도 우리한테는 라오그뉴님이 최고인 걸요? 라오그뉴님이 안 계셨으면 미르 공격대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요.”
라오그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용이가 꼬리로 라오그뉴를 꾹 찔렀다.
[못생긴 사자야, 배고파?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이게?]
라오그뉴가 눈을 부라리지만, 반응은 평소와 훨씬 달랐다.
수한은 슬쩍 운을 뗐다.
“라오그뉴님도 SSS급에 도전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라오그뉴의 귀가 쫑긋 섰다.
사실 라오그뉴는 편의상 SS급이라고 하는 거지, 정확히 말하면 이능력자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타고 났고, 수련을 통해 강화시킨 힘이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마엘른과 같다고 할까.
라오그뉴가 앞발로 바닥을 벅벅 긁었다.
[나도 너희처럼 힘의 결정 흡수해서 강해지면 좋겠는데, 그게 불가능하다고 들었어.]
“아, 쥬페르 행성에서요?”
[응. 갓 태어난 신들은 힘의 결정을 먹는 게 효과가 있는데, 어느 정도 이상 먹고 나면 효과가 없어져. 애초에 우리한테는 그냥 영약 정도인 걸.]
“그럼 쥬페르 행성의 신들은 어떤 식으로 강해집니까?”
[제일 중요한 건 신도의 수야. 직접적으로 숭배를 받아야 해. 신도의 믿음이 강할수록, 수가 많을수록 내 힘도 강해져. 그러다 세라프 종족이 말하는 SSS급 정도 되면 신계에 입성할 수 있게 되지.]
“신도라…… 그거 꼭 쥬페르 행성인이어야 합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아. 지구인들도 내 신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더라.]
“지구인도요?”
[응. 내가 요즘 구해준 사람이 좀 있는 건 알지? 그 사람들이 내 신도가 되더라. 신도라고 하니까 좀 이상한데, 어쨌든 그들을 구해줄 때마다 내 신격이 상승하는 게 느껴져.]
수한의 눈이 번뜩였다.
신격이 상승한다고?
그렇다면 라오그뉴가 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라오그뉴가 더 강해진다는 얘기 아닌가.
수한이 그 얘기를 하자, 새미가 혹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라오그뉴님이 구해줄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일부러 사고를 낼 수도 없는 거잖아.”
수한은 빙긋 웃었다.
“어렵지 않아. 라오그뉴님의 회복 능력을 사용하면 되니까.”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새미가 무릎을 쳤다.
옆에서 듣고 있던 라오그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왜? 여긴 병원이 있어서 병 걸려도 금방 치료하잖아.]
“치료하지 못하는 병도 많습니다.”
수한의 구상은 간단했다.
세상에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라오그뉴가 회복 능력을 베풀어 구하자는 얘기였다.
라오그뉴가 반색했다.
[좋은 생각이야. 내가 먼저 생각했어야 했는데, 역시 너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
수한이 방법을 제시했다.
“우리 공격대 차원에서 치료소 형식으로 교단을 세울 겁니다. 지구에 머무는 동안은 라오그뉴님이 방문하는 환자들을 치료하면 되겠습니다. 기자들도 불러서 언론에 노출도 시키고요. 기존 지구 의학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만 치료하는 게 좋겠지요.”
“그렇게만 해도 괜찮나요? 가령 개종해야 하거나 그러지는 않죠?”
[그럴 필요 없어. 내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매일 상기하면서 감사 인사를 하면 돼.]
라오그뉴가 쥬페르 행성의 신도와 신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쥬페르 행성의 종교는 지구에서 말하는 종교와 사뭇 달랐다. 보다 세속적이고, 대가를 주고 받는 것에 익숙했다.
신 대 인간이 아니라, 봉건제의 영주와 평민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까.
지상에 거하는 신은 신도를 보호한다. 천상에 오른 신은 행성 전체를 관리한다. 그 대가로 신도를 신에게 자신의 생명과 믿음을 바친다.
신도가 자신의 신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서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면 그게 무형의 힘으로 변환이 된다. 그러면서 신의 힘을 키워주는 것이다.
[한 번에 여러 신을 모시는 신도들도 있어. 뭐, 나만 섬기는 신도가 많으면 좋겠지만 여긴 이계잖아.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그럼 얘기가 간단해지겠네요. 관건은 매일 감사 인사를 하게 하는 건데……”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해서, 10년 20년 뒤에도 한결같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몇이나 될까?
분명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까맣게 잊어버릴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고 관리하는 게 필요하다.
그것은 미르 공격대가 도맡아야겠지. 라오그뉴는 방랑벽이 심해 언젠가는 떠나갈 테니까.
“진행해 보지요. 과연 언제 라오그뉴님이 강해질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신경써줘서 고마워.]
라오그뉴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수한은 즉각 행동했다.
승급 기념 기자 회견 자리에서, 기자들의 벌떼 같은 질문에 일일이 대답을 했다. 그리고 막 끝나려는 시점, 폭탄선언을 했다.
“저희 미르 공격대는 조만간 사옥 안에 라오그뉴님이 직접 운영하는 치료소를 세울 계획입니다. 라오그뉴님의 회복 능력은 S급 이능과 맞먹으니, 저희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에 걸린 분들이 많이 이용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어?”
“사장님, 질문 좀!”
수한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행정적인 절차는 진작 진행하고 있었다.
회복 이능이 있는 이능력자는 병원에서 일하기도 하고, 본인 명의로 치료소를 만들기도 했다. 공격대에서 원정을 나가는 게 벌이가 훨씬 좋지만, 대신 안정적이다 보니 이쪽을 선호하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수한이 SSS급이 되고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치료소를 열었다.
라오그뉴가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잘 될까?]
“잘 될 겁니다. 걱정 마세요.”
기자 회견 후, 다각도로 라오그뉴의 치료소에 대해 알렸다.
무조건 무료.
조건이라고는 라오그뉴의 본체 사진이 들어갈 액자를 가져가고, 하루 중 일정한 시간에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밖에 없었다.
라오그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걸핏하면 미르 공격대 사옥 꼭대기에 앉아 사방을 굽어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범죄나 사고가 일어나는 것 같으면 뛰어들어 시민들을 구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라오그뉴에 대한 시민들의 평판도 좋았다.
그 때문일까.
치료소를 연 첫날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말기 암 환자, 중증 신부전 환자, 간경화 환자, 그리고 이름을 듣도 보도 못한 각종 불치병 환자들까지.
대기실이 가득 찼다.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라오그뉴가 그것을 보고 잔뜩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예비 신도들이 많은 걸? 힘내야겠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치료소 안으로 들어갔다.
라오그뉴가 처음 마주한 환자는 폐암 말기 환자였다. 숨을 쉬기도 힘들어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고, 전신에 전이되어 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 받는데도 그 정도.
환자 가족들이 간절한 눈으로 라오그뉴를 보았다.
“선생님, 우리 재훈 아빠 좀 살려주세요.”
안 해 본 게 없다고 했다.
사재를 털어 S급 이능력자는 아니어도 고위 이능력자에게 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효과가 있어서 많이 호전되었지만, 뿌리를 못 뽑은 탓에 재발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세계수의 열매 같은 기적의 성약을 구할 만큼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라오그뉴는 환자를 살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선생님? 이상한 호칭이네. 그냥 내 이름을 불러.]
지금 라오그뉴는 인간 형태. 사자 귀와 꼬리만 내놓고 간단한 옷에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어여쁜 손을 뻗었다.
환자의 가슴에 손을 올린 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일곱가지의 찬연한 빛이 떠올랐다.
칠채 옥좌에서 비롯된 회복 능력.
단순히 외상을 재생시키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질병 치료에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힘이 환자에게 쏟아졌다.
암세포가 봄날 눈 녹듯 스러졌다. 통증이 사라지며 환자의 얼굴이 편해졌다. 항암 치료로 바싹 말랐던 몸에 살이 오르고, 심지어 모발까지 새로 돋아났다.
환자 가족들이 놀람과 기쁨에 휩싸여 환자를 쳐다보았다.
“여보!”
“아빠가 건강해졌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환자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라오그뉴에게 허리를 연거푸 굽혔다.
진통제에 취해 있던 환자가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스스로 인공호흡기를 떼어냈다. 숨이 가쁘지도 않고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자, 꿈인 줄 알고 자기 뺨을 세게 꼬집었다.
“아야!”
환자가 질겁하는 것을 보고 가족들이 울고 웃었다.
라오그뉴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마 다 나았을 거야. 확실하게 하고 싶으면 근처 병원 가서 CT? 그거 한 번 찍어보고. 확인한 다음에는 알지? 나한테 하루에 1번씩 꼭 감사 인사를 해야 돼.]
“정말 그것으로 됩니까?”
[그럼. 너희가 나한테 감사 인사 하는 만큼 내 힘도 커지니까 꼭 그렇게 해줘야 돼. 그리고 나중에 뭔가 문제 있으면 날 찾아와. 최대한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